가파마을에서 무논에 오리를 풀어주고 있다.
6월 둘째 주 일요일, 가파마을에 들어서니 마을이 왁자지껄했다. 이 마을에서는 논에 오리를 풀어 농사짓는 집이 여럿인데, 이날이 바로 논에 오리를 풀어주는 날이었다. 자매결연을 한 회사의 직원 가족이 찾아오고, 잠원동 주민들도 찾아와 행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도시 손님들이 오리 한 마리씩을 두 손에 감싸 잡고 논둑으로 들어섰다. 엄마 아빠의 권유로 오리를 붙들었지만, 무서워서 고개는 돌린 채 오리를 붙든 두 팔만 쭉 뻗어 종종거리는 아이도 있었다. 오리는 한 마리에 2000원 하는 어린 것들이었다.
무논에는 모가 한 뼘가량 자라 있는데, 이때가 오리를 넣어주기에 적합한 시기다. 모가 너무 어리면 오리에게 짓밟히기 때문이다. 마을 이장이 징을 치자, 도시 손님들이 그물이 쳐진 무논 안으로 오리를 풀어주었다. 무논에 내려선 오리는 모 사이사이를 부지런히 헤집고 다녔다.
용두리마을 어귀의 느티나무 밑에 서 있는 멋진 장승. 해마다 새로 세우지만 역사가 오래돼 한국의 대표 장승으로 꼽힌다.
그렇게 농사지어진 쌀이 가파마을에서 가파오리쌀로 상품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비자는 이날 찾아온 도시 손님들이었다. 지난해에 가파마을을 아홉 번이나 찾아왔다는 잠원동 부녀회장 신영희(53) 씨는 지난해에도 오리 풀어주기 행사에 참여했고, 그 오리가 농사지은 쌀을 사서 먹고 있다고 했다.
오리를 무논에 풀어주고 돌아오는 길에 마을 이장 임광빈 씨는 돌미나리가 돋아난 개울을 도시 아줌마들에게 가르쳐줬다. 금세 개울가는 돌미나리를 뜯는 아줌마들의 차지가 되었다.
또 다른 체험행사가 1억원의 지원금을 받아 마을 사람들끼리 지은 전통문화전수관 앞마당에서 열렸다. 한쪽에서는 손두부를 만들고, 다른 한쪽에서는 떡메 쳐서 인절미를 만들었다. 여자들은 콩을 삶는 솥단지를 둘러서고, 힘깨나 쓰는 남자들은 떡메 치는 떡판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가파마을 노인들은 그늘진 평상에 앉아 새끼를 꼬아 금줄 만들기 시범을 보였다. 아이들은 목걸이용 장승을 파고, 그 옆에서는 다식판에 송홧가루를 뭉쳐 넣어 다식을 만들었다.
① 누에고치와 누에를 살펴보고 있다. ② 누에고치에서 명주실을 뽑고 있다. ③ 가파마을 전통문화전수관 앞마당에서 두부를 만들고 있다. ④ 일벌 무리 속에서 여왕벌을 찾고 있다.
이날 행사를 위해 대치면 면장도 참석하고, 농업기술센터에서 생활개선을 담당하는 김미숙 계장도 나왔다. 오후에는 김 계장의 안내를 받아 칠갑산 주변의 다른 체험마을을 가게 됐다. 세 가족, 승용차 3대가 뒤따랐다. 칠갑산을 넘어 목면 본의리에 있는 누에치기 농가를 찾아갔다.
누에는 농약 치는 논밭 가까이에서는 기를 수 없다. 그래서 누에농가인 계봉농원은 작은 골짜기, 외딴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천장 높은 조립식 건물 안 그늘에서 누에가 뽕잎을 먹고 있었다. 가로 1m, 세로 2m, 높이 1m쯤 되는 한 그물망 안에서 뽕잎을 갉아먹고 있는 누에가 2만 마리쯤 된다고 했다. 모두 50만 마리쯤 되는 누에를 기르는 유원조 씨는 ‘넉잠 자고 나서 고치를 만든다’는 누에의 생태에 대해 설명했다. 대전에서 온 초등학생 선영(8)이는 유치원 다닐 때 누에를 분양받아서 기른 적이 있다며 징그러워하지 않고 누에를 만지작거렸다. 선영이 엄마는 누에 기르기가 유치원의 인기 실습과정이라고 했다.
농원 뒷산에 올라가 뽕잎을 따서 누에 먹이 주기 체험도 했다. 누에가 뽕잎을 어찌나 빨리 갉아먹는지, 여름날 소나기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누에 한 마리를 집어보니 살결이 비단만큼이나 보드랍고 가벼웠다. 누에고치에서 나오는 것이 명주, 비단이니 부드러운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누에농가에서 가장 흥미로운 체험은 누에고치에서 실 뽑기였다. 하얀 고치를 물에 넣고 끓이면, 고치의 조직이 실을 뽑기 좋게 느슨해진다. 거미줄 같은 고치실을 잡고 실패에 감으면, 고치실이 한없이 풀려나온다. 고치 하나에서 나오는 실의 길이는 무려 1500~ 2000m나 된다. 고치실이 거의 다 풀려나올 때쯤 되면 번데기가 드러난다. 예전에는 번데기 먹는 재미로도 고치실을 풀었다는데, 이젠 선뜻 번데기를 먹으려는 사람은 없었다.
계봉농원에서도 명주나 번데기는 생산하지 않고, 누에에 버섯균을 접종한 동충하초, 누에를 냉동하여 분말로 만든 누엣가루, 수놈 누에로 만든 누에그라 등의 건강식품을 만들고 있었다. 냉동된 누에의 몸속을 들여다보니 뽕잎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버섯균이 누에 몸속에서 자라 동충하초가 되는 이유를 알 만했다.
해가 저물기 전에 찾아간 또 다른 곳은 꿀벌체험 농가였다. 느티나무 아래, 몸은 가늘지만 표정이 깊은 장승이 서 있는 정산면 용두리마을이었다. 특성화마을(농림부)로 지정된 곳이다. 마을 안에서 꿀벌을 100통 넘게 기르는 김기수 씨는 찾아오는 도시 손님들에게 벌통 속의 벌집을 꺼내서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여왕벌과 갓 태어나는 수벌을 보여주고, 벌집 속의 꿀을 채취하는 방법까지 소개해줬다. 단순히 벌꿀을 팔기 위한 설명이 아니었다.
벌통 하나 들여다보는 것도 생태학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친절한 해설이었다. 꿀벌은 위협하지 않으면 침을 쏘지 않는다는 말에 아이들은 돋보기를 들고 벌을 관찰하기도 했다. 꿀벌이 실어온 꽃가루 뭉치를 꿀에 찍어 맛까지 보고 용두리마을을 빠져나오는데, 마을 어귀의 장승이 환한 얼굴로 배웅을 했다.
논에 오리 풀어주고, 뽕잎 따서 누에 먹이고, 갓 태어나는 일벌들을 관찰하고 나니, 긴 초여름 해가 서산에 걸려 있었다. 농촌에서 이뤄지는 모든 노동이 도시 손님들에게는 생생한 현장 체험이고, 생태 기행이 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