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6월 청와대에서 열린 정·재계 간담회에 김우중 회장(왼쪽에서 두 번째)이 전경련 회장 자격으로 참석해 김대중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방금 청와대에 들어가서 김대중(DJ) 대통령을 독대하고 오는 길인데, 대통령도 대우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어. 내가 대우 상황에 대해 보고하면서 ‘정부에서 조금만 지원해주면 고비를 넘길 수 있다’고 했더니 대통령도 고개를 끄덕이며 오케이했어. 아마 오늘 내일이면 금융권 쪽에도 대통령의 이런 뜻이 전달될 것이니 은행 실무진을 만나 잘 마무리해봐.”
김 회장의 말을 듣고 잔뜩 기대를 품고 찾아간 대우 임원들은 그러나 금융권 관계자들의 냉담한 반응을 직면하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대우 관계자들이 김 회장 얘기를 전하면서 지원을 부탁했더니 ‘무슨 소리냐’는 반응이었던 것. 당시 김 회장의 지시를 받고 금융권을 찾아다녔던 한 임원은 “나중에 청와대 쪽 인맥을 통해 확인해봤더니, 김 회장이 당시 DJ의 사인을 잘못 해석했다”고 회고했다. DJ가 고개를 끄덕인 것은 ‘김 회장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의미였는데, 김 회장은 이를 오케이 사인으로 해석했다는 것.
98년 여름부터 ‘믿기 힘든 사람’ DJ 신뢰도 금 가기 시작
물론 DJ가 김 회장의 얘기를 듣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DJ는 당시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을 불러 김 회장이 두고 간 노란 봉투를 전달하면서 “김 회장이 가지고 온 것인데, 잘 검토해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 위원장은 금감위로 돌아와 간부들이 보는 앞에서 “김우중 회장이 또 대통령을 상대로 ‘이상한’ 것을 보고한 모양이더군”이라고 중얼거리면서 내용을 보지도 않고 문서 파쇄기에 집어넣어버렸다고 한다. 당시 금감위 관계자의 증언.
“그 무렵엔 이미 김우중 회장이 관료들뿐 아니라 시장에서도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당시 대우가 살길은 부실 계열사 정리를 통해 재무구조를 튼튼하게 하는 것뿐이었는데도 김 회장은 말 바꾸기를 계속하면서 자구 노력을 게을리 했다. 물밑으로는 대통령과 상대하면서 정부 지원만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정부가 특정 재벌에 지원해줄 수 있는 방법이나 수단은 없었다. 이 위원장도 이를 잘 알았기 때문에 김 회장의 보고서를 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김 회장이 시대가 변했음을 몰랐다는 얘기다. 당시 대통령경제수석실 관계자들도 금감위 관계자와 비슷한 얘기를 했다. 당시 대통령경제수석실에 근무했던 현 정부 고위 관계자의 설명.
1998년 10월22일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정·재계 정책간담회에 앞서 이규성 재경부 장관(왼쪽 사진 맨 왼쪽)과 김우중 전경련 회장, 이건희 삼성 회장(왼쪽에서 세 번째) 등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외환위기 당시 ‘재벌 개혁의 전도사’였던 이헌재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오른쪽 사진 왼쪽).
역시 비슷한 시기 김 회장에 대한 DJ의 신뢰도 금이 가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통령비서실 관계자는 “김우중 회장이 정·재계 간담회 등 공식석상에서 김 대통령에 의해 자주 발언을 제지당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고 회고했다. 김 회장이 논지와는 동떨어진 얘기를 하다 보니 자주 김 대통령이 중간에 끼어들어 “그게 아니고…”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공식석상서 관료 질타 … DJ노믹스와 근본 차이
사실 과거의 패러다임으로 보면 김우중 회장의 몰락은 아이러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찍혀’ 해체의 길을 걸었던 비운의 국제그룹과 달리, 김 회장은 DJ 정부 들어 거침없는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엔 두 번이나 법정에 서야 했지만 DJ 정부 들어선 재계의 ‘수장’격인 전경련 회장에 취임했다. 대우 계열사 사장 출신인 배순훈, 윤영석 씨는 각각 정보통신부 장관과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사장에 임명됐다.
그러나 대우 관계자들은 김우중 회장이 DJ와 너무 가까웠던 게 오히려 ‘화근’이었다고 말한다. 김 회장으로서는 대통령과 가까우니 언제라도 정권의 시혜적 지원을 기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에 정작 필요한 구조조정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대우 몰락으로 이어졌다는 것. 김 회장은 대신 ‘정치적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 하곤 했다. 앞에서 예로 든 사례도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당시 금융권 고위 임원은 기자에게 이런 얘기도 했다.
“김우중 회장으로선 ‘소나기만 피하면’ 정권과의 밀월을 통해 그룹 몸집을 크게 불릴 수 있다고 판단했을 법하다. DJ의 재벌 개혁 시도를 과거 정권이 정권 초기에 했던 ‘재벌 군기 잡기’ 정도로 파악하고 이 고비만 잘 넘기면 된다는 안이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삼성 등 다른 그룹에서는 ‘대우와 한 덩어리로 5대 그룹으로 분류하지 말라’는 얘기를 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DJ와의 관계에 대한 김우중 회장의 자신감은 관료들과의 불화를 초래하는 계기가 됐다. 98년 초 무렵. DJ가 참석한 자리에서 김 회장은 관료들을 향해 “수출 신용장도 모르는 관료들이…”라며 질타했다. 김 회장은 ‘98, 99년 2년간 경상수지 500억 달러 달성을 통해 외환보유고 1000억 달러를 쌓아놓으면 외환위기는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는데, 98년 초 수입의 절대적인 감소로 한 달에 30억~40억 달러의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으니 목소리를 크게 낼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김 회장의 이런 주장은 ‘DJ노믹스’와 근본 차이가 있었다. DJ노믹스는 정부 기업 금융기관의 과도한 유착으로 기업들의 수익성을 고려하지 않은 방만한 투자가 가능했고, 이로 인한 기업들의 연쇄 부도가 금융기관 부실로 이어져 대외신인도 하락과 함께 외환위기가 찾아왔다고 보았다.
당연히 동석했던 강봉균 경제수석의 표정이 굳어졌음은 물론이다. ‘김 회장과 불화를 빚은 관료들에 의해 대우가 타살됐다’는 ‘음모론’의 근거로 제시되는 대목이다. 당시 대우 구조조정본부 한 임원은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임원들 사이에서는 ‘김 회장이 너무 오버한 것 아니냐’고 크게 걱정했다”면서 “그런 행동보다는 차분히 내실을 다지는 게 더 중요했다”고 회고했다.
대우 관계자들은 DJ와 김우중 회장이 가까워진 것은 80년대 초반부터라고 말한다. 전 대우 임원은 “80년 ‘서울의 봄’ 당시 3김이 경쟁할 때 김우중 회장은 상대적으로 DJ에게 호감을 가졌다”고 말했다. “김우중 회장은 당시에도 외국으로 나돌아다녀서인지 외국인들의 평가에 기울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열린우리당 한 의원은 “14대 국회 당시 국회에서 대우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자 DJ가 전화를 걸어 ‘살살 좀 하지’라고 한 적도 있다”고 귀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