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김선양</b><br>변호사/ 합동법률사무소 里仁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는 최근 이와 같은 논지의 성명서를 냈다. 황 교수도 이에 관련한 생각을 피력한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의 저서 ‘나의 생명 이야기’에서 “일찍이 사람이란 그 어리석은 호기심 때문에라도 판도라의 상자를 열 수밖에 없기에 어쩌면 그런 불안감은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고 적었다.
아닌 게 아니라 황 교수의 쾌거가 연일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자 많은 사람들이 ‘혹시 황 교수가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게 아닌가’ 하는 불안함과 의구심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정 대주교의 성명은 이런 걱정을 하는 이들의 지지를 얻을 법도 하다.
배아줄기세포 복제를 생명파괴 행위로 봐선 안 될 일
사실 그간 난치병과 불치병 치료의 가능성을 높인 황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기대도 높았지만, 종교계와 학계 일각에서는 생명윤리에 대한 문제제기도 높이 일었던 게 사실이다. 때문에 문제를 제기한 정진석 대주교와 황 교수가 만나 생명윤리에 대한 대화를 나눈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뜻있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한 번의 만남으로 복제배아 생산을 인간 파괴로 보는 가톨릭계의 시각이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불치병 치료에 헌신하는 데 감사드리고 경축한다”는 정 대주교의 말은 황 교수로서 대단히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에서 인간복제와 생명파괴를 우려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그 불안함과 복제연구에 대한 반대는 도대체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가. 이 점부터 설득력 있게 밝혀야 그 다음으로 생명윤리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논할 수 있는 게 아닌가. 각양각색일 수밖에 없는 생명윤리에 대한 관점을 단 하나의 관점으로 대치하여 전제하는 것이 올바른 일인가.
필자가 아는 바에 의하면 배아복제 줄기세포 연구는 ‘사람’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세포’를 복제하는 것이다. ‘인간복제’가 아니라 황 교수의 말마따나 ‘인간을 위한 복제’가 그 목적이다. 그렇다면 자기 몸에서 생겨난 난자의 핵을 제거해 체세포 핵을 이식하는 방법으로 줄기세포를 배양하는 연구는, 인류가 제 몸속에서 자기를 치유할 수 있는 길을 찾는 시도일지언정 성급하게 생명을 해하고 사람을 죽이는 행위와 동일하게 취급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판도라에 대한 신화 한 대목을 들어보자. ‘먼저 생각하는 자’라는 뜻을 가진 프로메테우스는 아래로는 짐승을 다스리고 위로는 신을 섬길 줄 아는 사람을 만들었다. 그리고 추위와 굶주림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제우스의 벼락에서 불씨를 훔쳐 속 빈 회향나무 막대기 안에 넣고 불이 꺼지지 않도록 쉴 새 없이 흔들며 땅으로 내려왔다. 사람들은 프로메테우스 덕분에 농사짓고 사냥 도구를 만들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분기탱천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와 그의 아우 에피메테우스 형제에게 사람들을 벌하기 위해 그때까지만 해도 만들어지지 않았던 여자를 만들어 보냈으니, 그 여자가 바로 판도라였다.
판도라를 차지한 에피메테우스의 집에는 몹쓸 것들을 모두 넣어둔 상자가 하나 있었다. 에피메테우스는 판도라에게 그 상자를 열어서는 안 된다고 단단히 일러두었지만, 궁금함을 참지 못한 판도라는 결국 그 상자를 열었다. 상자에 들어 있는 육체의 고통과 질투, 원한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져나갔다.
‘황 교수 논란’ 앞에서 이 신화가 떠올랐다. 황 교수는 신이 복수심에 가득 차 세상을 고통에 빠뜨리기 위해 보낸 판도라 같은 인물일까? 오히려 황 교수는 사람에게 불치병극복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불을 훔쳐다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에 가깝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황 교수가 제우스의 벌을 받아 카우카소스 산 암벽에 묶여 독수리로부터 간을 쪼이는 벌을 받은 ‘비운의 프로메테우스’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