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마늘 협상에서 기인한 손실액의 일부를 기업돈으로 메웠다.
가족이 함께 즐긴 꽃게탕과 숙취를 다스려준 복지리에 납이 녹아들었을지 모른다는 데 국민들은 경악했다. 납덩어리가 거푸 발견되면서 ‘중국산 수산물 공포’가 퍼져나가자 정부는 중국에 철저한 진상 조사를 요구하고, 재발을 막아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정부는 ‘반품’이나 ‘환불’은 관철시키지 못했다.
당국이 한 일이라고는 인력을 투입해 창고에 보관된 중국산 수산물을 납이 든 것과 들지 않은 것으로 분류한 것뿐이었다. 납이 든 꽃게를 발라낸 수입량의 상당 부분은 시중에 정상 유통됐다. 소비자들의 식탁에 올랐다는 얘기다. 소비자들로선 억장이 무너질 노릇이지만 정부는 중국에 맞서 반품·환불을 받아낼 협상력을 갖지 못했다.
준비 없이 덤볐다가 중국 보복에 ‘백기’
시계를 앞으로 돌려 6월13, 14일 국회에선 ‘쌀 관세화 유예 협상’의 실태 규명을 위한 청문회가 열렸다. 납 꽃게도 제대로 반품·환불받지 못한 협상력은 5년 새 크게 변하지 않은 듯싶다. 야당 의원들은 “쌀 협상은 누가 보더라도 낙제점”이라고 거세게 몰아붙였다. 누구 탓을 할까. 협상의 ‘협’자만 나와도 국민들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는다.
한나라당 정문헌 의원은 “현재대로라면 쌀 관세화보다 관세화 유예 비용이 더 들어갈 형편”이라고 몰아세웠다. 열린우리당 신학용 의원도 “정부는 준비조차 않다가 허둥지둥 대책을 마련했다. 한-일 어업협상이나 한-중 마늘협상에서 보여준 무대책이 대책이던 NATO(No Action, Talk Only) 행태를 여실히 보여줬다”고 꼬집었다.
협상은 포연 없는 전쟁이다. 그러나 실패한 한국의 협상은 훈련도 끝마치지 않은 신병을 무기도 없이 전장으로 보내는 꼴이었다. 전략과 전술이 상대에게 노출돼 끌려 다니다가 ‘옷까지 벗어주고’ 돌아온 예가 적지 않다. 무능, 준비 부족으로 인한 협상의 실패는 아프다. 그 패배의 대가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전가된다.
시곗바늘을 다시 돌려 2002년 여름, 한국 사회는 한-중 마늘 협상에서의 이면 합의 논란으로 뜨거웠다. 2000년 이뤄진 중국과의 마늘 협상 후폭풍이 한국을 덮친 것이다. 1차협상에서 영어로 된 합의문조차 작성하지 않은 아마추어리즘은, 합의문 부속서의 한국어와 중국어의 해설 문구를 놓고 한-중 간의 해석 논란을 가져왔다.
정치권과 농민단체는 “정부가 2003년 1월부터 민간업자가 추가 관세를 물지 않고 자유롭게 수입할 수 있다는 내용을 중국과 합의했다”고 몰아붙였다. 마늘 협상은 영문 합의문 미작성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실책이 적지 않았고, 정부는 2년 뒤 불어올 후폭풍조차 예측하지 못할 만큼 무책임하고, 또 무능했다.
실패한 협상의 대가는 크다. 수십 년간의 국부 손실로 이어질 수도 있다. ‘마늘 협상’의 현재 모습은 억장이 무너지게 한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국회 역시 사회적 이슈가 되자, 마늘 협상의 문제점을 지적했을 뿐, 그 뒤로 어떤 결과가 초래됐는지 지켜보지 않았다”면서 “쌀 관세화 유예 협상을 둘러싼 논란도 마늘 협상의 재판이 돼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2005년 6월 현재, 마늘 산업은 손실액을 가늠키 어려울 만큼 붕괴했다. 그것뿐인가. ‘주간동아’가 단독입수한 농림부 내부 문건에 따르면 정부는 중국과의 합의에 따라 중국산 마늘을 대신 수입하면서 2002년부터 2004년까지 139억원의 손실을 보았다. 잘못된 협상 탓에 해마다 국민의 혈세가 낭비돼온 것이다. 정부는 중국과의 마늘 수입가격 협상에서 불리해질 수 있다는 이유로 손실액을 공개하지 않아왔다.
정부는 또 삼성전자, LG전자, SK텔레콤, KTF 등 정보통신 업계에서 ‘돈을 당겨와’ 손실액의 일부를 벌충한 것으로 확인됐다. ‘무능 협상’의 손실액을 메우는 데 뚜렷한 근거도 없이 ‘불량배’처럼 업계의 돈을 끌어온 것이다. 외국과의 협상에선 나약함을 드러내면서, 안에선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른 꼴이다. 무능한 협상 탓에 발생한 손실액의 일부를 업계에 돌렸다는 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1999년 11월, 정부는 전쟁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중국을 향해 선전포고를 했다. “국내 마늘 농가를 보호해야 한다”면서 관세율이 30%이던 중국산 마늘에 대해 285%의 긴급관세를 부과하고, 이듬해 6월1일 세이프가드(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을 제한하는 것) 조처를 취했다. 선제공격을 당한 중국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러나 중국의 전략, 전술은 치밀했다. 중국은 2000년 6월 마늘 수입 규제에 대한 보복으로 한국산 휴대전화와 폴리에틸렌에 대한 수입 중단을 선언하면서 반격에 나선다. 결과적으로 정부가 농가를 위한다며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통상 전쟁’에 나선 셈이었다. 그해 8월 베이징에서 한-중 마늘 실무협상이 타결돼 한국은 총 3만2000t의 마늘을 30~50%의 낮은 관세로 수입키로 하고, 중국은 휴대전화와 폴리에틸렌 수입금지 조처를 해제한다.
중국서 마늘 수입해 3국에 헐값 넘겨
2001년 4월 중국은 한국이 협상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며 다시 공세에 나선다. 중국은 “한국이 수입키로 합의한 3만2000t 중 정부가 떠맡기로 한 물량 1만2000t은 수입이 완료됐으나, 민간이 수입하기로 한 2만t 중 1만5000t을 사가지 않았다”면서 휴대전화와 폴리에틸렌을 다시 수입 금지 품목에 넣겠다고 윽박질렀다. 정부는 재협상을 벌여 아직 들여오지 못한 물량을 정부가 매입해주기로 한다.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벌집을 건드렸다가 낭패를 본 셈이다.
정부는 재협상 결과에 따라 ‘울며 마늘 먹기’로 민간 부분에서 소진되지 않은 수입 물량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매년 발생하는 미(未)소진 마늘을 정부가 대신 구입해준 것이다. 의무수입물량으로 들여온 마늘은 국내 시장에 유통시킬 수 없었다. 비틀거리는 마늘 산업에 치명타를 날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중국에서 수입한 마늘을 인도네시아, 인도, 말레이시아, 일본 등에 ‘헐값’에 넘긴다. 이들 국가는 ‘마늘 횡재’를 한 것이다.
어설픈 협상의 결과로, 정부가 중국에서 수입한 마늘을 제3국에 헐값에 되파는 과정에서 발생한 손실은 농업안정기금으로 채웠다. 정부는 농업안정기금의 손실액을 메우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퍼부었다. 협상에서 기인한 손실을 국민들이 낸 세금과, 기업들에서 당겨온 돈으로 벌충한 것이다. ‘혈세’가 투입된 건 차치하더라도 기업들의 돈이 사용된 건 납득키 어렵다.
정부 관계자는 “중국의 휴대전화 수입 제한을 푸는 과정에서 일부 양보했기 때문에 정보통신 관련 업종의 민간 자본의 도움을 받은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민간에서 정부가 자초한 손실을 메워야 할 법적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농가를 보호한다면서 긁어 부스럼을 내고 돈을 내놓으라는 건 난센스다. 정보통신 산업이 외풍이 센 탓(규제 산업이기 때문에)에 처음엔 어쩔 수 없이 돈을 냈다가, 나중엔 더 이상 못 내겠다고 버틴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정부가 기업들로부터 직접 돈을 받은 건 아니다. 정보통신부가 거간으로 나서 한국정보통신산업협회에서 돈을 냈다. 한국정보통신산업협회는 정보통신 기업들이 상호 유대를 강화키 위해 꾸린 곳으로 굵직한 정보통신 기업들이 낸 회비로 운영된다. 회장사는 삼성전자가 맡고 있고, 부회장사는 LG전자, SK텔레콤, KTF 등이다. 기업들이 IT 사업 발전을 위해 낸 회비가 ‘농업안정기금’ 노릇을 하며 정부가 초래한 손실을 메우는 데 쓰인 것이다.
정부는 협상 실패로 혈세를 낭비했으면서도 이제껏 손실 내용을 발표하거나 사과한 바 없다. ‘줄 것 다 주고 얻은 것 별로 없는’ 프랑스와의 외규장각 도서반환 협상, 안보동맹과 통상이익을 혼동한 미국과의 자동차 협상 등 ‘번번이 뺨 맞는’ 협상이 앞으로 얼마나 더 계속될 것인가. 쌀 협상 청문회를 보면서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격언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협상의 ‘협’자만 나와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