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수목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극본 김도우, 연출 김윤철)이 이렇게 도무지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일 수 없을 것 같은 여성 캐릭터를 내세워 ‘비평’과 ‘흥행’ 양쪽에서 놀라운 바람몰이를 하고 있다. 6월15, 16일 방영한 5, 6회 전국 시청률은 각각 35.4%와 35.1%. 광고 수주의 척도라는 서울 지역 시청률은 벌써 39.6%로 40% 고지를 코앞에 두고 있다. ‘다모’ ‘파리의 연인’ 못지않은 파죽지세다.
‘삼순이와 삼식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일명 ‘3344’라는 마니아 커뮤니티도 생겼다. 공식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온 글만 3만여 건(6월17일 기준). 인터넷에선 ‘삼순삼식 어록’, 패러디 포스터, 동영상 캡처, 일명 ‘삼순이 놀이’ 등이 빠르게 번져가고 있다.
시청률을 기준으로 볼 때 ‘삼순이’를 지지하는 제1 세력은 30대 여성이다. 20대 여성이 그 다음. 드라마 잘 안 보는 30대 남성이 세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솔직한 싱글’ 삼순이의 삶이 그 누구보다 궁금한지 모르겠다.
20대 후반~30대 여성들은 “삼순이가 꼭 나 같다”고 말한다. “콤플렉스투성이인 그녀의 속앓이에 절절한 공감이 간다”는 거다. 한편으론 “삼순이의 유쾌·상쾌·통쾌한 말과 태도에 10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간다”며 깔깔댄다. 이런 공감은 “삼순이 같은 언니, 삼순이 같은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이어진다. ‘팬터지 덩어리’인 로맨틱 코미디 여주인공이 마침내 강림하사 땅 위에 굳건히 두 발 딛고 선 모양새다.
“그것도 고졸에 쭈구렁탱이 연상? 어디서 저런 호빵같이 생긴 걸 여자라고. 호빵도 유통기한 한참 지나서 짓물러 터졌겠네. 목소린 또 몸살 걸린 고양이마냥 엥엥엥엥.”
삼순이(김선아 분)의 외모는 평범하다. 아니, 화면상으로는 대한민국 30세 여성의 표준 체형보다 오히려 더 나가 보인다. 얼굴도 동글동글, 그야말로 호빵이다. 때문에 삼순이는 드라마 속에서 개나 소나 아무한테나 “살쪘다, 살 좀 빼라”는 소리를 지겹도록 들어야 한다. 계약연애 상대인 진헌(현빈 분, 일명 ‘삼식이’)의 어머니(나문희 분)도 마찬가지다. ‘내 잘난 아들이 저런 곰탱이랑 정분이 날 리 없다’며 경계의 시선을 늦추지 않는다.
연기자 김선아는 이 ‘보통 여자 삼순이’를 연기하기 위해 몸무게를 8㎏이나 늘렸다. 그 변신이 워낙 파격적이라 인터넷에는 ‘김선아 말랐을 때 사진’이 따로 편집돼 돌아다닐 정도다.
김선아, 그러니까 김삼순은 옷도 ‘보통’으로 입는다. 패션 감각도 그저 그렇다. 지금껏 로맨틱 코미디 주인공들은 아무리 안 예쁘고 빈한한 여성으로 설정이 돼 있더라도 브라운관에 비친 모습만큼은 늘 예쁘고 부티가 났다. ‘파리의 연인’의 김정은이, ‘발리에서 생긴 일’의 하지원이 그랬다. 때문에 시청자들은 드라마를 보며 “쟤는 지금 안 예쁜 거다, 가난한 거다” 하며 자기최면을 걸어야 했다.
삼순이는 외모뿐 아니라 하는 짓도 ‘리얼’하다. 우선 자기 전 화장을 지운다. 인조속눈썹까지 붙이고 잠자리에서도 예쁜 척하는 여타 드라마의 여주인공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날씬한 언니가 얼굴에 팩을 붙이고 누워 복근운동을 하면 눈치채지 못하게 그 행동을 슬쩍슬쩍 따라한다. 옛 남자친구의 약혼 케이크에 넣으려다 만 청양고춧가루를 좌변기에 쏟아부울 때는 혹 변기에 고춧가루가 묻을까 비닐봉지로 탁탁 털어낸다. 세 살 어린 진헌이 술값을 내겠다고 하자 잔뜩 취해 “어떻게 저 핏덩어리한테 술을 얻어먹냐아. 잠깐만 지달려, 엉?” 하며 비틀비틀 돈 뽑으러 간다. 그리고 캐시로비 안에서 화끈하게 토해버린다.
남자친구를 만나러 갈 땐 울퉁불퉁한 뱃살을 감추기 위해 코르셋을 찬다. 물론 숨 막혀 죽을 지경이다. 바로 그 남자친구가 자신을 헌신짝 버리듯 차자 “3년 동안, 흑…, 넌 한 번도 사랑한단 말을 해준 적이 없어. 날 사랑하긴 한 거니?” 하며 치졸하게 매달린다. ‘세상에 태어나서 절대 해서는 안 될 일 중 하나가 바로 헤어진 남자한테 전화질하는 것’임을 이론적으로는 빠삭하게 알면서도, 실수긴 하지만 결국 그 짓을 하고야 만다. 그러고는 남자가 전화를 받지 않자 “그래도 그렇지, 난 줄 뻔히 알면서 생까고 있단 말야 지금? 나쁜 자식” 하며 이를 박박 간다.
이어 몇 달 만에 다시 맞선을 보러 가서, 매력남이 삼순이 대신 ‘희진’이란 가명을 불러주자 “어쩜 좋아! 저 입으로 희진이라고 부르니까 너무 에로틱한 거 있지? 그래, 오늘 이 분위기로 미끄러지는 거야” 하며 희희낙락한다. 하지만 진헌의 방해로 맞선이 잘 안 풀리니 혼자 노래방 가 “남자들이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와…” 어쩌구 하면서 열심히 스트레스를 푼다. 그러고는 결국 포장마차에서 입 안에 소주를 털어넣으며 말한다. “내 이상형은 말이지…, 그저 탄탄한 직장 다니면서 월급 꼬박꼬박 갖다 주는 남자면 되지. 우리 부모님이랑 언니들한테 자랑스럽게 ‘내 남자예요’라고 소개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자기 부모님하고 친구들에게 자랑스럽게 ‘내 여자예요’ 이렇게 소개시켜 줄 수 있는 그런 사람.”
삼순이는 까놓고 말한다
“니들 남자들은 안 늙니? 뱃살 축 늘어져 가지고 영계 찾으면 안 비참하니? 그리고 백수라고? 그게 내 잘못이야? 경제 죽인 놈들 다 나오라고 해!”
진헌과 얼떨결에 키스를 할 뻔한 날 밤, 쪽팔림과 당혹감에 잠 못 이루던 삼순이가 중얼댄다. “내가 너무 오래 굶은 게야.” 이런 대사에 공감하지 않을 ‘서른 살 싱글’은 많지 않다.
또한 삼순이는 솔직하다. 진헌의 어머니와 처음 상견례 하는 날. 호텔 사장인 진헌 어머니의 날카로운 질문이 쏟아진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생전에 무슨 일을 하셨나?”
“식품업에 종사하셨습니다.”
“(반가움에) 식품업이라면 나도 좀 아는데, 무슨 회살 운영하셨을꼬?”
“삼순이네 방앗간이오.”
“방앗간?”
“자기 손으로 성실하게 일해서 그 돈으로 꿈을 키우는 여자예요. 그리고 주제 파악을 잘해요. 이 세상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건강한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갖고 있어요. 아주 명쾌한 여자예요.”
“시장에서 조그만 금융업이라면…, 새마을금고?”
“아뇨, 일수를 사알짝 놓고 계십니다.”
의외로 소심한 성격에 필요하면 내숭도 좀 떨지만 거짓말은 좀체 못한다. 이런 성격이다 보니 수틀리고 ‘저건 아니다’ 싶으면 대놓고 할 말 다 한다.
“전 맘이 안 맞는 고용주하고는 일을 못하거든요? 그런데 댁처럼, 아니 사장님처럼 그런 싸가지, 아 죄송합니다 이해하세요, 저한테 싸가지는 욕이 아니니까.”
또 그 문제의 사장인 진헌이 뻑하면 계약 준수 운운하며 빌려준 돈 5000만원을 들먹이자 이렇게 ‘작살’을 내버린다.
“너 개 키우니? 그 개 이름이 5000만원이야? 야 이 철없는 놈아, 너한텐 그 5000만원이 개 이름일지 모르겠지만 난 아냐. 우리 아버지가 평생을 바쳐서 만든 집이 그 돈 때문에 날아갈 수도 있어! 5000은커녕 500이 없어 자살하는 사람도 있구! 근데 넌 뭐야. 그 돈 니가 벌었니? 부모 잘 만나서 호강하는 주제에 뭐가 그렇게 잘났어? 돈 없어! 배 째!”
사실 그동안 시청자들은 수많은 로맨틱 코미디에서 착한 척, 속 깊은 척, 자존심 강한 척하느라 제 할 말 다 못하고 필요 없는 오해를 불러일으켜 상황을 배배 꼬이게 만드는 여성 캐릭터들을 질리게 봐왔다. 그에 비해 삼순이는 도무지 오해니 뒤끝이니 그런 게 생길 여지가 없다. 그냥 질러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래서야 스토리가 이어지지 않을 터. 그래서 기존 로맨틱 코미디의 ‘상황 배배 꼬이게 하는 역할’은 조연인 희진(정려원 분)에게 돌아갔다. ‘왕자’ 역할 또한 ‘썰렁맨’ 진헌보다는 희진이 그리워 미국에서 날아온 의사 헨리 킴(다니엘 헤니)에게 더 잘 어울린다. 이런 보조자들 덕에 삼순과 진헌은 나름껏 제대로 현실적인 모습을 시청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삼순이는 사랑을, 인생을 좀 안다
삼순이는 허황된 꿈은 꾸지 않는, 공주가 되고픈 욕망 따윈 애저녁에 지나가는 강아지한테 던져줘버린 성실하고 생활력 강한 여자다. 그렇기에 실연을 당한 뒤 죽을까 생각하다가도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장례 치르면 먹고사느라 바쁘고, 지 자식 낳아준 마누라도 돌아서면 남남인데 니가 뭐라고 너를 평생 기억해” 하며 어떻게든 털어버린다. 첫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는 진헌에게는 “웃기지도 않아 정말. 누군 왕년에 연애 안 해봤나? 연애가 거기서 거기지, 왜 그렇게 유난 떠는데?” 하며 마구 호통을 쳐주기도 한다.
“인생 별거 없다”던 아버지 입버릇을 그대로 가져와 쓰면서도, 한편으론 “아주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어” 안 해본 아르바이트 없이 해 모은 돈으로 프랑스 제과제빵 유학을 다녀온 야무진 여성이다.
‘헨리 킴’ 역의 다니엘 허니(왼쪽)와 ‘희진’ 역의 정려원.
“하지만 사람은 복잡한 동물이에요. 그런 화학성분으로만 단정 지을 수 없는 미묘한 무언가가 있다구요. 난 그렇게 믿고 그런 마음으로 사랑을 했어요. 호르몬이 넘치든 메마르든 진심으로 대하려 노력했다구요. 진심이요. 진심을 담당하는 호르몬은 혹시 없나요?”
끝까지 가는 거야, 좌악!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 이름은…’이 로맨틱 코미디가 아닌 것은 아니다. 별 볼일 없는 여자로 묘사된 김삼순이지만 그래도 그녀는 프랑스 요리학교 ‘르 코르동 블뢰’를 졸업한 제과기술자(파티시에)다. 그와 티격태격 사랑을 엮어갈 진헌도 비록 재벌 2세는 아니지만 20대에 고급 레스토랑을 운영할 만한 돈을 부모에게서 ‘증여’받은 잘나가는 상류층이다. 여기 옛 애인 희진과 그녀를 사랑하는 헨리 킴까지 끼어들었으니 삼각관계로 인한 속앓이며 신분을 뛰어넘는 신데렐라식 사랑 이야기가 이어질 건 뻔하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가 주목받는 건, 로맨틱 코미디가 ‘마땅히’ 가야 할 팬터지의 길을 가긴 가되, 그 안에 삶의 구체성과 일상성을 담아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바라는 거다. 삼순이가 ‘변절’하지 않고 죽 가기를, 끝까지 너무 예뻐지지 말고 너무 징징거리지도 말고 씩씩하게 늘 삼순이답기를. 그래서 ‘겨울연가’와는 또 다른 ‘한국 드라마의 힘’을 발견하게 해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