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형세(산머리 부분에 김시민 장군의 어머니 묘가 있다).
이렇게 거시적으로 땅을 살피는 것을 물형(物形)론, 또는 형국론이라고 한다. 물형론은 대개 특정 동식물이나 사람의 모양에 빗대어서 땅의 기운을 설명한다. 물형론이 우리 시대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아해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땅에 대한 인간의 미학적 인식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심미(審美)의식을 고양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또한 땅의 특성을 파악, 적절한 쓰임을 찾아주며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 방법론을 제시한다. 땅에 대한 학대가 심한 요즘, 물형론적 사유방식이 더욱더 절실할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백전(잣밭) 마을. 앞산에 진주대첩을 이끈 김시민 장군(1554~92)의 어머니 창평 이씨 무덤이 있다. 이 무덤에 대해서는 두 가지 전설이 있다고 김시민장군 기념사업회 이영림 감사는 전한다.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형국(渴馬飮水形)이 그 하나고, 나머지 하나는 명나라 명풍수 두사충(杜師忠, 주간동아 382호에 소개)에게 부탁하여 잡은 자리라고 한다.
이 두 전설을 가지고 이곳 터와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보면 몇 가지 사실을 확인, 또는 추론할 수 있다. 먼저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형국은 산세가 말처럼 힘 있고 규모가 커야 한다. 목마른 말에게는 물을 마실 수 있는 샘(泉)이나 연못(池), 호수(湖), 내(川)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 장군 어머니 무덤 바로 앞으로 ‘산방천’ 물이 흘러 들어와 그러한 요건을 충족시킨다. 또 목마른 말의 경우 신경이 모두 머리에 쏠려 있기 때문에 무덤을 말머리 부분에 써야 하는데, 김 장군 어머니 무덤은 말머리를 연상시키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뿐만 아니라 흘러 들어오는 물을 마셔야지 나가는 물을 마셔서는 안 되는데 무덤이 물이 들어오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김 장군 어머니와 동생 김시진 무덤.중국 양식의 도정강사(桃汀講舍)(아래).
두 번째, 이 무덤을 임진왜란 때 귀화한 명풍수 두사충에게 은(銀) 서 말을 주고 잡게 했다는 전설에서 몇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김 장군이 두사충에게 부탁하여 잡았을 것이라는 말이 있으나, 앞뒤 정황을 보면 동생 김시진(1564~1632)이 주도한 듯하다.
두사충은 임진왜란이 나자 이여송 군대를 따라 1592년 12월 평양에 머문다. 그런데 이때는 김 장군이 이미 전사(1592년 10월)한 뒤이므로 김 장군과 두사충의 만남이 불가능하고, 또 김 장군의 어머니 창평 이씨는 그로부터 2년 뒤인 1594년에 죽었다. 게다가 김시진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무덤 입구에 ‘도정강사(桃汀講舍)’를 짓고 글을 읽었다고 하는데, ‘도정강사’의 건축 양식은 중국식이다.
이로 보아 두사충에게 묘지 소점을 받으면서 정사 터와 공간배치까지 조언받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두사충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아산에 와서 이순신 장군의 무덤(옛 무덤 터)을 잡아준 기록이 있어 그 즈음에 이곳에 들렀는지, 그 이전에 들렀는지는 불확실하다.
이 터를 소점받기 위해 두사충에게 지불한 은이 서 말이다. 보통 지관에 대한 보수는 일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말은 정중하게 하고, 예물은 후하게 한다(卑辭重幣)’가 지관에게도 적용되는데, ‘쌀 서 말에 두루마기 한 벌’이면 비교적 점잖은 사례였다. 은 서 말이 현재 시가로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중국의 명풍수라고 알려진 두사충이었던 만큼 지관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보수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