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근본적인 원인은 원유가 상승이다. 두바이유니, 북해산 브렌트유니, 텍사스 중질유니 하는 것의 가격 상승은 사실 우리 정부나 관련 업계로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일이다. 그러니 기름값이 아무리 오른다 해도 국민들은 그저 손 놓고 국제 석유시장의 큰손들이 굽어살펴 주시기만을 빌어야 하는 걸까.
높은 세금비율도 문제 … 미국보다 세 배가량 높은 61.8%
그렇지 않다. 국내 유가가 결정되는 메커니즘을 보면 정부와 업계의 의지 여하에 따라 기름값에도 상당한 변화가 올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핵심은 유류에 매겨지는 높은 세금, 두 번째는 SK·GS칼텍스·에쓰오일·현대오일뱅크·인천정유 등 5개 정유사의 교묘한 ‘이중가격제’다. 이를 이용한 일부 주유소의 마진 챙기기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특히 정유사들이 공식 발표하는 ‘공장도 가격’보다 대리점 등에 제시하는 이른바 ‘현물가격’이 더 싸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유사들의 이중가격제는 왜 원유가가 치솟을수록 정유사들의 이윤 또한 큰 폭으로 상승하는지, 어떻게 공장도 가격보다 더 싼값에 기름을 파는 주유소가 있을 수 있는지를 명쾌하게 설명해준다.
“1997년 경·소형차에 휘발유를 가득 채우는 데 드는 비용은 3만원 정도였다. 그러나 현재는 6만~6만5000원을 호가한다. 97년 당시 휘발유 1ℓ당 부과되는 세금은 약 350원이었다. 지금은 870원 수준이다.”
대한석유협회 관계자의 말이다. 휘발유 가격 상승폭보다 세금 상승폭이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석유협회 측은 2001년 1차 에너지 세제 개편 후 2004년까지 석유류에 대한 국민의 세수 부담이 6조438억원이나 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해마다 1조5100억원 이상씩 늘어난 셈이다.
3월23일 에너지시민연대 회원들이 서울 명동에서 국제유가 급등으로 인해 국민경제가 맞고 있는 어려움을 에너지 절약을 통해 극복하자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지난해 4월 말을 기준으로 OECD 주요 국가의 ℓ당 휘발유 가격을 원화로 환산하면 영국 1657원, 프랑스 1467원, 한국 1353원, 스페인 1184원, 일본 1132원, 미국 552원이다. 선진국 국민 소득이 우리보다 2~3배 높음을 감안해 가격 지수로 환산할 경우, 우리나라 휘발유값이 100이라면 영국은 52.3, 프랑스 53.1, 스페인 63.5, 일본 30.2, 미국 12.8이 된다. 우리나라 휘발유 가격이 세계 최고 수준임을 알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정유사들은 물론, 전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 무역협회 등 주요 경제단체들은 오래전부터 유류세 중 교통세를 ℓ당 150원 인하해 일본 수준으로 낮춰줄 것을 정부에 건의해왔다.
그러나 세제를 담당하는 재정경제부(이하 재경부)의 태도는 단호하다. 유가가 고공행진을 계속하는 때일수록 단기 처방보다는 경제구조 자체를 ‘에너지 저소비’ 형태로 바꾸기 위한 고(高)유가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비싸면 덜 쓸 것 아니냐는 논리다. 정부는 유류 사용으로 파생되는 환경오염 등에 대한 비용도 감안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경기가 나빠지면 자동차 관련 세금까지 낮춰가면서 국민들에게 차를 많이 사라고 부채질하는 것 또한 정부다.
그러니 정부가 유류세 인하를 거부하는 실질적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세수 감소에 대한 우려일 것이다. 재경부 측은 “세금을 깎아주면 유가가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정유사의 이익만 키워주게 된다”고 주장한다. “세금을 ℓ당 10원씩 내린다 치자. 하지만 소비자들은 정유사 또는 주유소가 이를 가격에 반영하는지 하지 않는지조차 알 수 없다. 워낙 적은 액수이기 때문이다. 반면 세수는 매달 500억원이나 줄어들게 된다”는 설명이다.
높은 유가는 소비자들이 유사 휘발유를 찾는 이유가 되고 있다. 2004년 8월11일 서울 자유로 부근에서 유사 휘발유를 팔고 있다(왼쪽).높은 유류세와 정유사들의 복잡한 가격 책정 구조는 고유가 시대를 사는 국민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는 법적으로도 아무 문제가 없다. 현행 교통세법은 국민경제 안정상 필요할 경우 30% 범위 안에서 세율을 조정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정유사들은 올 7월 시행 예정인 제2차 에너지 세제 개편안에 이러한 내용을 반영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정유사들이 이처럼 유류세 인하에 목숨을 거는 것 또한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높은 세금으로 인해 기름값이 비싸지면 아무래도 소비가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유사들은 “높은 세금으로 인해 정유사가 유가에 관여할 수 있는 비율은 2%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며 비싼 기름값은 정유사 탓이 아니라는 점을 누누이 강조해왔다.
하지만 고유가 행진이 본격화한 2004년, 정유사들이 3조9500억원이라는 사상 최대의 순익을 낸 배경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정유사 측은 이에 대해 지난해 석유화학 경기가 워낙 좋았고 수출도 호조를 보인 사실을 내세우고 있다. 매출액 구성에서 정유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79%나 되지만, 영업이익 구성에서는 53%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도 강조한다. 그럼에도 내수 시장에서 2조원이 넘는 순익을 거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2004년 10월 산업자원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 안경률 의원은 “국내 5대 정유사가 유가 인상을 빌미로 실제 인상요인보다 더 올려 최저 21.7%에서 최고 47.4%의 폭리를 취했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폭리 논란’에 대해 정유사들은 “석유제품 가격은 주유소가 결정하기 때문에 정유사는 무관하다”고 거듭 주장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국민들이 접하는 정유사 책정 기름값이란 바로 ‘세후 공장도 가격’을 말한다. 97년 가격 자유화 이전에는 정부가 소비자가를 결정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선 각 회사별로 가격을 주간 단위로 조정해 발표한다. 문제는 이렇게 언론 등을 통해 공표하는 ‘공장도 가격’과 정유사가 대리점이나 직거래하는 주유소에 제공하는 ‘현물가격’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현물가는 대부분 공장도 가격보다 낮게 책정된다. 또한 제품을 공급받는 대리점, 주유소 등의 신용도나 소화 물량 등에 따라 ‘그때그때’ 다르다(정유사는 도매점인 대리점 외에 소매점인 주유소에도 석유제품을 직접 공급할 수 있다). 신용도가 높고 많은 물량을 사가는 대리점, 주유소, 공장 등에는 더 큰 폭의 할인을 해준다. 때문에 인터넷에는 각 대리점이 정유사로부터 약속받은 그날의 휘발유·경유·등유 가격을 서로 비교하는 사이트까지 존재한다. 주유소, 중·소공장 등이 각 대리점 중에서도 가장 싼값에 기름을 파는 곳을 골라 거래할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다.
해당 사이트를 보면, 예를 들어 4월14일의 경우 A사의 휘발유 공장도 가격은 ℓ당 1369원이지만 최저 현물가는 1256원으로 책정돼 있다. 공장도 가격과 113원이나 차이가 나는 것이다. 대리점에서 등유를 사 각 가정에 난방용으로 판매하는 B씨는 “그런 만큼 공장도 가격으로 기름을 사고파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유사들이 왜 매주 실제 거래가도 아닌 공장도 가격을 공시하는지 파헤쳐볼 일”이라고 말했다.
정유사들은 이에 대해 “공장도 가격은 일종의 ‘기준가’일 뿐”이라 해명하고 있다. C사 관계자는 “마치 전자제품이 공장도 가격은 있되, 할인점이냐 양판점이냐 인터넷 쇼핑몰이냐에 따라 값이 천차만별인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시장 상황에 따라 유가도 매일 바뀌는데 이를 매번 따로 공시할 수는 없는 일 아니냐”고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 소비자들은 ‘가전제품도 아닌’ 기름값에 이런 식의 이중·삼중 구조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정유사가 발표하는 공장도 가격을 있는 그대로 믿고 있다. 아울러, 공장도 가격과 실거래 가격이 ‘따로 놀고’ 있는 점은 정유사들이 공장도 가격의 등락과는 상관없이 교묘한 방식으로 기름값을 조정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리점과 주유소를 모두 운영하는 D씨는 “예를 들어 특정 정유사가 휘발유의 공장도 가격을 ℓ당 100원 인하했다 하자. 언론을 통해 이 사실을 접한 소비자들은 당연히 해당 주유소에서 파는 휘발유값 또한 100원 내렸으리라 기대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정유사가 ‘이중 플레이’를 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를테면 평소에는 공장도가 대비 드럼당 1만6000원을 할인해주던 것을 1만2000원만 할인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주유소로서는 기준 가격(공장도 가격)은 100원 인하됐으되 할인 폭은 오히려 줄어든 만큼, 실제 판매 가격을 100원씩이나 내릴 수 없게 된다. 반면 정유사는 이런 식의 현물 시세 조정을 통해 공장도 가격 등락과 상관없이 매출과 순이익을 관리할 수 있다. 때문에 5개 정유사가 현물 시장에서 가격을 산정하는 방식, 즉 할인 폭 책정 방식은 최상급의 기업 비밀이다.
또 한 가지, 정유사들은 이러한 다층적 가격 구조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경쟁 과열로 인한 과잉 생산 탓에 빚어진 일”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유류는 저장과 이동이 까다로워 과잉 물량을 그때그때 털어버리지 않으면 낭패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잉 생산분을 줄이거나 공장도 가격을 현물가 수준으로 ‘현실화’하면 되지 않을까.
이에 대해 업계 상황에 정통한 F씨는 “안 그러는 게 훨씬 더 이익인데 뭐 하러 움직이겠느냐”고 반문한다. F씨는 “표면적으로 보면 정유사로서는 현물가를 책정하지 않고 높은 공장도 가격으로만 기름을 파는 것이 더 이익일 것이다. 그럼에도 현물 시장을 만들어 어떤 대리점에는 비싸게, 어떤 대리점에는 싸게 파는 것은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동시에 가격 결정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특정 정유사의 휘발유 공장도 가격이 1400원, 평균 현물가가 1350원이라고 하자. 평균 현물가가 실제 거래액인 만큼 이를 그대로 공표하면 정유사는 1350원 이상으로는 기름을 팔지 못한다. 하지만 이중가격 구조를 만들어놓으면 직영 주유소처럼 정유사의 지배력이 강한 곳에는 평균 현물가보다 비싸게, 시장점유율이 낮은 지역에는 그보다 싸게 팔 수 있다.
물론 정유사들의 경쟁심리를 이용해 현물시장에서 싸게 구입하고도 소비자에게는 ‘충분한’ 마진을 붙여 판매하는 주유소도 일부 있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주유소 마진도 줄여야 소비자가를 낮출 수 있다”고 지적했다. ‘수급 안정’에 신경써야 하는 정유사가 생산과잉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일부 주유소가 오히려 현물시장에서 싸게 구입해 비싸게 팔고 있다는 주장이다.
정유 시장에서 시장점유율은 매우 중요하다. 브랜드 간 제품 변별점이 거의 없기 때문에 고객 이동이 적어, 요지에 많은 주유소를 갖고 있는 것이 최선인 까닭이다. 그럼에도 특정 정유사가 가격을 확 내려 시장점유율을 획기적으로 늘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 5개 정유사 사이에 눈에 드러나는 담합 행위가 없음에도, 마치 입이라도 맞춘 듯 기름값이 비슷하게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몇 년 전 G정유사가 가격을 확 낮춰 공격적인 시장점유율 확대에 나선 적이 있었다. 그렇게 되자 다른 정유사들도 비슷하게 가격을 낮출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어땠느냐. G사의 경우 시장점유율 확대로 인한 이익은 100억~200억원 수준이었는데, 매출 손실은 2000억원에 이르렀다. 다른 정유사들도 손해를 보았음은 마찬가지다. 그런 ‘학습’을 통해 파격적인 가격 경쟁보다는 서로 눈치를 보며 높은 값을 유지하는 것이 이익이 더 크다는 점을 알게 된 것이다.” F씨의 말이다.
가격경쟁 암묵적 기피 … 눈치 보며 비슷하게 높은 가격 유지
‘비슷하게 높은 가격’을 유지하는 전략은 고유가 시대에 특히 큰 힘을 발휘한다. 국제 유가가 낮았던 2000년, 2001년에는 석유수입사의 활약이 상당했다. 때문에 국내 5개 정유사들은 두 해 다 총 5000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하지만 국제 유가가 올라가자 석유수입사들은 국내에서의 가격 경쟁력을 잃어버리게 됐다. 2002년 이후 5개 정유사가 이익을 내기 시작하고 특히 지난해 사상 최대 순익을 기록할 수 있었던 데는 이렇듯 경쟁자인 석유수입사들의 몰락이 큰 몫을 했다. 생산자 간 경쟁이 이루어져야 가격이 떨어지는 것은 정한 이치. 그런데 고유가로 인해 석유수입사들이 사라지다시피 하면서 가격 경쟁 또한 실종되고 5개사 간 ‘눈치 보며 값 올리기’만 남은 것이다.
때문에 업계 일각에서는 “정유 가격 자율화가 결국 소비자가 아닌 정유사 이익 극대화만 불러온 것 아니냐”는 비판이 심심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자율화 당시 정부의 목표는 첫째, 품질 경쟁을 통한 정유산업의 경쟁력 강화 둘째, 소비자 이익 극대화였다. 첫째 목표는 정부의 감독 아래 어느 정도 달성이 됐으나 둘째 목표는 오히려 과거만 못하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지적이다. 결국 소비자 이익을 높이려면 수입사들의 적극적인 시장 참여로 자발적 경쟁이 일어나야 하는데, 이는 고유가 시대에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산업자원부 당국자 또한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해법을 찾기 힘들다”며 답답한 속을 털어놓았다.
어쨌거나 이래저래 죽을 맛인 것은 소비자들이다. 정부는 세수를 포기하지 않으려 하고, 정유사는 고유가 상황에 기인한 최대 호황을 보란 듯 즐기고 있다. 덕분에 국민들은 국제 원유가 상승, 그 이상의 경제적 고통을 고스란히 감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