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1일은 ‘과학의 날’이다. 4월이 ‘과학의 달’로 불리는 이유다. 하지만 이것은 필자의 생각으론 심한 ‘관료주의’의 산물이다. “언제든 상관없는 ‘과학의 날’에 관료주의까지 들먹이냐”며 의아해하는 독자도 있을지 모르겠다. 필자가 이 성스러운 ‘과학의 날’을 두고 관료주의까지 운운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4월21일이 ‘과학의 날’로 정해진 까닭은 과학기술처라는 정부 부서가 정식으로 출범한 날을 기념해 생겼기(1967년) 때문이다. 우리 정부에 처음으로 과학기술 담당 부처가 생긴 날을 축하할 만도 하겠지만, 하필이면 그날을 ‘과학의 날’로 만들어 대대손손이 행사를 한다는 것은 뭔가 모자란 발상으로 비친다. 이런 식으로 기념일을 정한다면, 외교부 간판 단 날은 ‘외교의 날’, 국방부 출범한 날은 ‘국방의 날’, 특허청의 생일은 ‘특허의 날’이 안 될 법도 없다. 그러나 그런 기념일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도 없고, 만약 있다면 웃음거리만 될 것이다.
물론 ‘과학기술’이 중요하니 과학기술처 간판 단 날, 또는 다른 어떤 근거를 대 ‘과학의 날’을 만들었다고 해서 마냥 잘못이라 말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미약하나마 ‘과학의 날’이 있었는데, 마치 백지에서 시작하듯이 ‘과학의 날’을 성의 없이 만든 것이 문제일 것이다.
이미 1934년에 우리 선배들은 ‘과학 데이’란 기념일을 만들어 과학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의 일이이라고 폄하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 과학운동은 순전히 조선 민중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대단히 귀중한 사건이었다(때문에 필자는 일제강점기에서의 과학 부흥 운동을 ‘변형된 민족운동’ 또는 ‘위장된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34년 조선 민중의 자발적인 의사로 ‘과학 데이’ 행사가 치러졌지만 몇 년 뒤에 슬그머니 사라져버렸는데, 아마도 일제의 압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34년의 ‘과학 데이’ 행사에는 당시 민족지였던 동아일보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대표적인 조선인 지식층이 거의 모두 참가했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인은 단 한 사람도 그 명단에 들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듬해인 35년 ‘과학 데이’ 행사에는 당시로서는 진귀한 행사인 ‘카 퍼레이드’까지 서울 도심에서 펼쳐졌고, ‘과학의 노래’가 합창됐으며, 활동사진전·강연회 등이 열리기도 했다. 이 같은 행사에서 “과학기술의 진흥 없이는 조선의 앞날은 없다”는 식의 주장이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60년대에 또다시 ‘과학의 날’이 필요하다고 느꼈다면, 한 세대 전 선배들의 뜻을 이어받을 생각을 하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우연찮게도 34년에 정해진 ‘과학 데이’는 현재 과학의 날의 이틀 전인 4월19일이었다.
물론 ‘과학의 날’ 행사랍시고 70년 전에 우리 선배들이 했던 카 퍼레이드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또한 당시 불렀던 ‘과학의 노래’를 부활하라는 것도, ‘과학 데이’의 주동 인물인 김용관(金容瓘, 1897~1967)을 기리자는 뜻도 아니다. 하지만 ‘과학의 날’만은 70년 전의 ‘과학 데이’를 계승하여 4월19일로 바로잡는 것이 옳지 않을까. 과학기술에도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이 필요하고, 역사의 계승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4월21일이 ‘과학의 날’로 정해진 까닭은 과학기술처라는 정부 부서가 정식으로 출범한 날을 기념해 생겼기(1967년) 때문이다. 우리 정부에 처음으로 과학기술 담당 부처가 생긴 날을 축하할 만도 하겠지만, 하필이면 그날을 ‘과학의 날’로 만들어 대대손손이 행사를 한다는 것은 뭔가 모자란 발상으로 비친다. 이런 식으로 기념일을 정한다면, 외교부 간판 단 날은 ‘외교의 날’, 국방부 출범한 날은 ‘국방의 날’, 특허청의 생일은 ‘특허의 날’이 안 될 법도 없다. 그러나 그런 기념일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도 없고, 만약 있다면 웃음거리만 될 것이다.
물론 ‘과학기술’이 중요하니 과학기술처 간판 단 날, 또는 다른 어떤 근거를 대 ‘과학의 날’을 만들었다고 해서 마냥 잘못이라 말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미약하나마 ‘과학의 날’이 있었는데, 마치 백지에서 시작하듯이 ‘과학의 날’을 성의 없이 만든 것이 문제일 것이다.
이미 1934년에 우리 선배들은 ‘과학 데이’란 기념일을 만들어 과학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의 일이이라고 폄하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 과학운동은 순전히 조선 민중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대단히 귀중한 사건이었다(때문에 필자는 일제강점기에서의 과학 부흥 운동을 ‘변형된 민족운동’ 또는 ‘위장된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34년 조선 민중의 자발적인 의사로 ‘과학 데이’ 행사가 치러졌지만 몇 년 뒤에 슬그머니 사라져버렸는데, 아마도 일제의 압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34년의 ‘과학 데이’ 행사에는 당시 민족지였던 동아일보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대표적인 조선인 지식층이 거의 모두 참가했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인은 단 한 사람도 그 명단에 들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듬해인 35년 ‘과학 데이’ 행사에는 당시로서는 진귀한 행사인 ‘카 퍼레이드’까지 서울 도심에서 펼쳐졌고, ‘과학의 노래’가 합창됐으며, 활동사진전·강연회 등이 열리기도 했다. 이 같은 행사에서 “과학기술의 진흥 없이는 조선의 앞날은 없다”는 식의 주장이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60년대에 또다시 ‘과학의 날’이 필요하다고 느꼈다면, 한 세대 전 선배들의 뜻을 이어받을 생각을 하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우연찮게도 34년에 정해진 ‘과학 데이’는 현재 과학의 날의 이틀 전인 4월19일이었다.
물론 ‘과학의 날’ 행사랍시고 70년 전에 우리 선배들이 했던 카 퍼레이드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또한 당시 불렀던 ‘과학의 노래’를 부활하라는 것도, ‘과학 데이’의 주동 인물인 김용관(金容瓘, 1897~1967)을 기리자는 뜻도 아니다. 하지만 ‘과학의 날’만은 70년 전의 ‘과학 데이’를 계승하여 4월19일로 바로잡는 것이 옳지 않을까. 과학기술에도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이 필요하고, 역사의 계승이 중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