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콤달콤하면서도 도가니 씹히는 맛이 일품인 ‘알도가니무침’(큰 사진)과 기름과 힘줄을 완전히 제거하고 양념해 구운 ‘너비아니’.
한 음식에도 열 가지가 넘는 양념을 쓰는 남도 음식은 입 안을 얼얼하게 하면서도 독특한 맛과 향을 지니고 있다. 반면 서울과 경기도 음식은 궁중 요리처럼 깔끔한 맛을 강조하고, 양념을 많이 넣지는 않지만 세심하게 써서 강하고 진하지 않게 맛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인지 강렬한 인상을 주는 남도 음식이 은은한 멋을 풍기는 서울 음식보다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게 사실이다.
독특한 연기로 인상적인 배우 이정섭 씨가 운영하는 ‘종가’의 음식을 맛보고 나면, 서울 음식의 정갈하고 은근한 맛에 푹 빠지고 만다. 89년부터 꾸준히 서울과 경기도 음식을 선보여온 그는 이미 음식 솜씨 좋기로 정평이 나 있다. 이정섭 씨와 ‘종가’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긴 하지만 외국 음식을 공부하는 내게 새로 와닿는 바가 있어 소개한다. 또 ‘퓨전’ 일색인 요즘의 음식 만들기 유행에도 좋은 ‘딴죽 걸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정섭 씨의 음식 솜씨는 집안 내력이다. 4대가 모여 사는 서울의 400년 종가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집안일로 바쁘신 어머니를 도우면서 요리에 눈뜨기 시작했다고 한다. 부엌 출입 때문에 수없이 혼나기도 했지만, 다달이 있는 제사와 잔치 음식 준비가 눈썰미 좋은 그에게는 훌륭한 요리학교인 셈이었다.
“어서 오세요.”
낯익은 말투로 반갑게 맞이하는 이정섭 씨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으면, 15가지의 반찬과 숭늉이 나온다. 찬물 대신 내오는 숭늉은 우리 고유의 음료이기도 하지만, 음식으로 인한 탈을 막아준다고 한다. 이 집 차림표에는 흔히 한식집에서 내놓는 정식 메뉴가 보이지 않는데, 이는 보통 인원수와 식성에 맞춰 음식을 짜주기 때문이다.
먼저 나온 색색의 고명을 얹은 ‘족편’은 눈을 즐겁게 한다. 7시간 이상 찬물에 담가 피를 뺀 쇠족을 푹 삶아 묵처럼 굳혀 그 위에 달걀 지단, 채 썬 미나리와 파, 밤채와 대추채, 실고추를 고명으로 얹는다. 족편은 쫄깃하기보다는 부드럽고 담백하다.
이정섭 씨는 족편을 양념간장에 찍어 일일이 갠 그릇에 담아주면서,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끝없이 풀어낸다.
“너비아니는 양념한 고기를 석쇠에 창호지를 깔고 구어야 해요. 그리고 창호지에 참기름을 발라야지 안 그러면 종이가 타버려 좋지 않은 냄새가 나거든요. 단맛은 양파와 배로만 냈어요.”
기름과 힘줄을 완전히 제거하고 양념해 구운 일종의 쇠불고기인 ‘너비아니’는 양반들이 먹던 음식이다. 여기에도 강한 맛은 없다. 자극적인 것을 찾는 사람들이라면 아마 실망할 것이다. 하지만 씹을수록 살아나는 재료의 제 맛과 양념의 조화를 알아채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앞에 나온 음식도 그렇지만 ‘통북어튀김’ 또한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통북어를 물에 5시간 불린 뒤, 진간장·조선간장·양파·생강·참기름을 넣고 재놓는다. 재는 동안에도 뒤집기를 세 번, 튀기기 전에는 북어에 배인 양념을 보전하기 위해 밀가루를 살짝 입혀주고, 튀기면서도 북어가 말려 들어가지 않도록 주걱으로 눌러줘야 하는 등 정말 손이 많이 간다. 이렇게 정성 들인 음식을 맛볼 기회는 흔치 않다.
이정섭 씨가 운영하는 ‘종가’의 실내 모습(위)과 89년부터 꾸준히 서울과 경기도 음식을 선보여온 이정섭 씨(아래 왼쪽).
그의 음식 이야기도 끝이 없다.
황소 한 마리에서도 세 근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굵은 알도가니를 삶아 식힌 뒤 미나리, 양파, 고춧가루, 흑설탕 등으로 무쳐낸 ‘알도가니무침’은 매콤달콤하면서도 도가니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중간에 입가심용으로 나온 ‘장김치’는 젓갈이 아니라 조선간장으로 배추를 절이고 익힌 뒤 사과, 배, 대추, 감, 밤 그리고 미나리를 넣어 마저 익힌 물김치다. 간장으로 물들여진 국물에는 배추와 다섯 가지 과일이 익으면서 내는 시원하고 달콤한 맛이 살아 있다.
장김치로 입 안을 개운하게 씻고 나니 ‘녹두전’이 들어온다. 숙주, 고사리, 도라지, 돼지고기를 넣어 지진 녹두전은 두툼하고 겉이 바삭해 자꾸 먹고 싶게 한다. 또 치자로 노랗게 물들여 보기에도 먹음직스럽다. 어리굴젓과 진석화젓이 곁들여 나오는데, 이를 녹두전과 함께 먹으란다. 그 어울림이 절묘하다. 소금으로만 굴을 삭히는 ‘진석화젓’은 삭은 물을 달여서 넣기를 반복해 1년 넘게 숙성시킨 젓갈이다. 욕심대로 먹은 탓에 불러온 배를 걱정하고 있는데, ‘제육보쌈김치’가 또 유혹한다. 제육은 삼겹살을 생강과 감초, 된장을 넣고 삶은 것을 다듬잇돌이나 맷돌로 눌러 만든다. 26가지 재료를 써 충분히 숙성시켜 만든 보쌈김치는 속성으로 번지르르하게 만들어낸 일반 보쌈김치와는 확연히 다르다. 보쌈김치를 깔고 그 위에 제육을 놓은 다음 새우젓을 조금 얹고 다시 보쌈김치를 얹어 싸 먹어보니, 김치의 시원한 맛이 제육 씹히는 맛과 조화를 잘 이룬다.
식사 내내 우리를 즐겁게 했던 또 하나의 주인공은 이정섭 씨가 직접 빚은 ‘이화주’였다. 쌉쌀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을 지니고 있어 음식과 궁합이 잘 맞는 이 청주는 배꽃 필 무렵의 온도에 맞춰 담근다 해서 이화주다. 알고 있던 순탁주 이화주와는 사뭇 다르다. 간장에 이르기까지 이정섭 씨의 손이 안 가는 음식이 없다. 서울 토박이 종가의 정성과 맛내는 솜씨가 그대로 접시마다 녹아 있는 것은 당연한 일. 감칠맛 나는 음식에, 이화주에 취해 농익어가는 음식 이야기는 밤 깊은 줄 모르고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