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향교
서경덕의 위 시를 읽으면 어차피 세상은 왔다가 가는 것, 흘러간 것에 연연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아직도 고산엔 연연해할 곳이 남아 있으니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일반국도 17번 선형 개선에 따라 새로운 길이 나고 있는 그곳을 생가하면 가슴이 아프다. 폐사지 봉림사 때문이다.
삼기초등학교 뒤편 나지막한 봉림산 서쪽 기슭에 자리잡은 봉림사. 신라 때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지만 정확한 창건과 폐사 연대를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고구려의 반룡산 연복사에 기거하던 보덕화상이 당시 실권자였던 연개소문이 밀교를 받아들이자 신통력으로 하룻밤 새 전주의 고덕산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그때 그의 제자들이 세운 사찰들 중 하나일 것이라는 전설만 남아 있다.
지금 봉림사 터에는 그 흔한 표지판 하나 없다. 무성한 고추밭 가장자리에 감나무 한 그루가 무심히 서 있고, 밭고랑 이곳저곳에는 천년 세월 비바람에 씻긴 기왓장들이 뒹굴고 있다. 그리고 몇 걸음 내려온 곳에 있는 논 가운데의 거대한 초석들과 댓돌들은 과거 번성했던 봉림사 이야기를 말없이 들려주고 있다.
봉림사에 있었던 귀중한 문화유산들은 일제강점기 때 군산의 한 일본인 농장으로 옮겨졌고 나머지는 1970년대에 전북대 박물관 앞으로 옮겨졌다. 고향을 그리워하며, 타향살이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석등’과 ‘오층석탑’ 고향 그리며 타향살이
1940년대 군산 개정의 발산리에 큰 농장을 가지고 있었던 미치야라는 일본인이 자기 정원 꾸미는 데 쓰기 위해 봉림사 터에서 석등(보물 제234호)과 오층석탑(보물 제276호)을 가져갔다. 그 뒤 해방이 되면서 미치야 농장에 발산초등학교가 들어섰지만 유물은 아직도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문화유산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것도 일제 잔재청산 작업이 될 터인데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천년 고찰 화암사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화암사(花巖寺) 주줄산에 있다. 가느다란 잎사귀에 털이 텁수룩한 나무가 허리띠처럼 어지럽게 드리웠는데, 푸른빛이 구경할 만하며 다른 군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세속에서는 전단목이라고 부른다”는 기록이 있다.
화암사는 신라 문무왕 때 창건된 것으로 추측된다. 전설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이곳에 있는 별장에 와 있을 때, 용추에서 오색찬란한 용이 놀고 있었고 그 옆의 큰 바위에 무궁초가 환하게 피어 있어 그 자리에 절을 짓고 화암사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또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화암사에서 수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원효와 의상. 두 스님이 이곳에 머물 때 극락전에 봉안되었던 수월관음보살에 대해서는 “의상 스님이 도솔산에서 친견했다는 수월관음의 모습을 사람 크기로 그려서 모셨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화암사 동쪽에서는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원효대’의 전설이 전해오고, 불명산 정상 아래에는 의상대사가 용맹정진했던 ‘의상대’의 흔적도 남아 있다.
원효와 의상 이후 고려시대 사찰 기록은 남아 있는 게 거의 없다. 세종 7년(1425년)에 전라관찰사 성달생(成達生)의 뜻에 따라 당시 주지 해총(海聰)이 4년(1429년까지)에 걸쳐 중창해 이때 화암사가 대가람의 면모를 갖춘다. 그 후 화암사는 임진왜란을 겪으며 극락전과 우화루 등만 남기고 모조리 소실되었으며, 훗날 명부전과 입을 놀리는 것을 삼가라는 뜻의 철영재, 산신각 등의 건물들이 ㅁ자를 형태로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제 때 고산현이었지만 이젠 고산 면으로
화암사 극락전(보물 제663호)은 중국 남조시대에 유행하던 하앙식 건축 기법으로 지어진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 건축물. 때문에 건축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필수 답사처이기도 하다. 형태는 정면 3칸, 측면 3칸에 맞배지붕이고 중앙 문은 네 짝으로 된 분합문이며 오른쪽과 왼쪽 문은 세 짝으로 된 분합문이다. 극락전은 남쪽을 향해 1m 정도의 높은 기단 위에 세워졌다. 전면은 처마를 앞으로 길게 하기 위해 하앙을 얹은 뒤 서까래를 이중으로 만들었다.
하앙이란 하앙부제를 지렛대와 같이 이용해 외부 처마를 일반 구조보다 훨씬 길게 하는 기법으로, 특히 건물의 높이를 올려주는 장점이 있다. 하앙식 건물은 비바람을 막아주면서도 유연한 자태가 빼어나 삼국시대부터 써온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그 현존 양식을 찾지 못하다가 1978년 문화재관리국이 처음 밝혀냈다.
적묵당은 우화루와 극락전 사이에 지어진 후원을 겸한 건물로 날개를 맞대고 서 있는데, 마루에 앉으면 한없는 부드러움이 세상 돌아감을 잊게 해준다.
고려 때 백문절(白文節)은 화암사를 이렇게 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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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사 옛길(왼쪽). 고산현감 최득지가 세웠다는 삼기정(위)과 화암사 우화루.
봉림사 터와 화암사를 품고 있는 고산은 본래 백제 고산현[난등량(難等良)이라고도 한다]이었는데 신라 때 전주에 포함됐다. 고려 현종(顯宗) 때까지 그대로 두었다가, 훗날 감무를 두어 진동(珍同)을 겸하게 했다. 이를 조선 태조 때 다시 나누었고, 그 뒤에 차례로 현과 군으로 바뀌었다. 고려 때 문장가인 이규보는 고산을 두고 “높은 봉우리 우뚝한 재가 만 길 벽처럼 서 있고 길이 좁아서 마을은 내려서야 다닐 수 있다”고 했다. 윤자운(尹子雲)은 “산은 가까운 성곽 따라 둘러 있고 물은 먼 마을을 안고 흐르네”라고 노래 했다. 그러나 지금의 고산은 완주군에 딸린 한가한 면일 따름이다.
고산면 성재리의 안수산 북쪽 골짜기에는 8남 8녀를 낳고 살았다 해서 ‘팔남 팔녀 난골’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아이를 적게 낳아 국가 경쟁력이 떨어질 것을 우려하는 오늘날 같으면 대접받았을 것이다.
만경강 상류에 자리잡은 고산은 지금도 곶감과 대추가 많이 나기로 유명하고, 그 아래 봉동은 ‘택리지’의 기록처럼 생강이 많이 난다. 하지만 고산현감 최득지가 세웠다는 삼기정 아래에는 푸르게 흘렀다는 냇가와 늙은 소나무는 사라지고 없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전해오는 말바위 밑의 논다랑이에는 봄풀만 무성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