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읍성.
봄이 오는지 가는지도 바람이 부는지 모르고,
비가 내리는지도 모르고 살았던 세월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래서 “봄날 아침이었네, 누가 와서 가자고 했네.”
이성복 시인의 이 시 한 구절처럼 아침마다 길을 나서면서 얼마나 마음이 설 던가. 바다도 아니고 깊은 산속도 아니면서 푸르게 봄물이 드는 곳, 길목에 벚꽃이 피어 아름다운 곳, 진달래가 황홀한 해미를 찾아가는 기분은 말 그대로 설렘이다. ‘아름다운 바다’라는 뜻을 지닌 해미(海美)는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을 합해서 만든 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태조 때 큰 공을 세운 몽웅역의 아전 한(韓)가에게 대광의 작호를 내리고, 고구현(지금의 홍주 속현) 땅을 분할해 정해현으로 만들어 그의 본관으로 삼게 했다. 현종 9년에 운주로 붙였다가 뒤에 감무를 두었다. 여미현은 본래 백제의 여촌현이었으나 신라 때 여읍으로 고쳐 혜성군의 속현이 된 곳이다. (중략) 조선 태종 7년에 두 현을 합쳐 이름을 해미라 하고, 정해를 다스리는 곳으로 삼았는데, 13년에 다른 예에 따라 현감을 두었다”고 한다.
해미는 고종 32년에 군이 되었다가 1917년에 서산시 해미면으로 바뀐다. 해미면 산수리에 있는 안흥정이라는 정자는 고려 문종 때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송나라 사신을 맞아들이고 보냈던 곳이라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본현 동쪽 11리 지점에 있다. 고려 문종 31년에 나주도 제고사 태부소경 이당감이 아뢰기를 ‘중국 조정의 사신이 왕래하는 고만도의 정자는 수로가 막혀 있어 배의 정박이 불편하오니, 청하건대 홍주 관하 정해현 땅에 정자 하나를 창건하여 맞이하고 보내는 장소로 삼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제서(制書)를 내려 그 말을 따랐다”는 기록이 있다. 해미면 반양리는 옛 정해현 현청이 있었던 곳이다.
서해안고속도로 덕분에 사통팔달 교통 요지
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사통팔달의 고장이 된 해미에 사적 제116호로 지정된 해미읍성이 있다. 순천의 낙안읍성, 고창의 모양성과 더불어 우리나라 읍성 중 거의 제 모습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충남 덕산에 있던 병마절도사의 병영을 해미읍성으로 옮긴 것은 조선 태종 14년인 1413년이었다. 병마절도사가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성이 필요하자 성종 원년(1469)에 성을 착공, 성종 22년에 완성했다. 그 뒤 병영은 효종 2년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서해안 방어의 요충지 구실을 했다. 해미읍성은 이순신 장군이 병사영의 군관으로 10개월간 근무를 했던 곳이고, 숙종 때는 온양에 있던 충청도 좌영이 이곳으로 옮겨왔다. 성 둘레에 탱자나무 울타리를 둘렀다고 하여 ‘탱자나무 성’이라고도 불렀다. 조선 초기의 대학자 서거정은 해미읍성을 “백마가 힘차게 세류영에서 우는데 중요한 땅, 웅장한 진번의 절도사가 큰 성을 이루었네. 아낙네의 쪽처럼 떠오르는 산이 둘러싸고 있고, 바다는 고래 물결로도 동하지 아니하고 맑고 깨끗하다”고 했다. 그것은 해미읍성을 둘러싼 가야산의 맑고 고요한 모습과 규율이 엄격한 군대의 주둔지를 표현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 둘레 1.8km, 높이 5m, 총면적 6만여 평의 거대한 성으로 동·남·서에 세 문루가 있다. 몇십 년 전까지 성 안에 행정관청과 학교를 비롯한 민가 160여 채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모두 성 밖으로 옮겨짐에 따라 고요한 성이 되고 말았다.
개심사(위)와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마애삼존불.
임진왜란 화 피한 개심사는 조선 고건축 귀중한 자료
해미읍성을 지나 개심사에 이르는 길은 봄꽃들이 아우성이다. 마음을 열게 하는 절로 알려져 있는 개심사를 찾아가는 길에서 만나는 풍경은 다소 이국적이다. 김종필 씨가 3공화국 시절 조성한 거대한 삼화목장은 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국립종축장으로 바뀌었는데, 저수지를 돌아가면 소나무 숲이 아름다운 개심사에 이른다. 몇 년 전만 해도 한산하기 이를 데 없던 개심사에 웬 사람들이 이리도 많은지, ‘세심동’이라고 쓰여 있는 푯돌이 낯설어 보인다.
그래도 변하지 않은 것은 청청한 소나무 숲이다. 소나무 숲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다 연못의 나무다리를 건너 돌계단을 오르면 안양루가 보인다. 근대 명필로 이름을 남긴 해강 김규진이 예서체로 쓴 ‘상왕산 개심사’라는 현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후세에 ‘건물에 비해 글씨가 너무 크다’는 평가를 받는 안양루를 돌아서면 개심사 대웅보전이 눈앞에 나타난다.
개심사는 백제 의자왕 14년에 혜감 스님이 창건했는데 원래 이름은 개원사였다. 고려 충정왕 2년(1350)에 처능 대사가 중창하면서 개심사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재의 모습은 1941년 해체 수리 때 발견된 자료에 의하면 조선 성종 6년(1475) 불탄 것을 중창했으며 그 뒤 17세기와 18세기에 한 차례씩 손보았음을 알 수 있다.
개심사는 우리나라 절 중에서 보기 드물게 임진왜란 때 전화를 입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시대 고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건물들이 여러 채 남아 있다. 보물 제142호로 지정된 대웅보전과 심검당이 그것이다. 심검당은 대웅보전과 같은 시기에 지어져 부엌채만 신축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나무의 자연스러움을 마음껏 살린 건물로 손꼽힌다.
1962년 해체 수리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1475년에 세 번째 중창되었고, 영조 때까지 여섯 번이나 중창을 거쳤으며 시주한 사람들의 명단과 박시동이라는 목수의 이름까지 들어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해미읍성 호야나무.
현존하는 마애석불 중 웃는 모습이 아름답기로 소문나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은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있다. 백제의 분위기를 가장 잘 표현한 작품으로 꼽히는 마애삼존불은 1959년에 발견돼 국보 제84호로 지정됐다. 중앙에 석가여래입상이 있고 왼쪽에 보살입상, 오른쪽에 반가사유상이 작게 조각돼 있다. ‘신비한 미소’라고도 불리는데, 부처의 표정이 빛에 따라서 다양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또 양옆의 협시보살들 또한 얼굴 가득 웃음을 띤 여자다운 모습이다. 어떤 사람들의 말로는 살짝 토라진 본부인에 의기양양해진 첩 부처라는 장난스런 이야기도 전해온다지만, 분명한 것은 누구나 편안하게 만드는 그 너그러운 웃음은 고구려의 미소를 백제화한 한국 불상의 독특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햇살이 따스하고 미소 또한 아름다운 해미 일대에서의 하루는 어쩌면 봄날에 꾸었던 꿈이 아니었을까.
§ 가볼만한 곳
근처의 수덕사와 안면도, 그리고 만리포·몽산포 등의 아름다운 해수욕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