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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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도우려다 ‘기름’ 뒤집어썼다

러 유전개발 북에 석유 공급 큰 뜻(?) … 열악한 북한 시설 때문에 중도 포기 화 불러

  •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입력2005-05-11 15: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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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北 도우려다 ‘기름’ 뒤집어썼다
    오일 게이트’란 별명을 얻은 한국철도공사의 러시아 유전개발 사업 의혹 사건을 둘러싸고 많은 보도가 쏟아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전 대통령 국정상황실장인 이광재 의원(열린우리당)과 노 대통령의 전 후원회장 이기명 씨 이름이 거론되면서 권력이 개입된 게이트로 의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유전개발 사업을 담당하는 한국석유공사는 빠지고, 유전 개발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철도공사가 개입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철도공사는 러시아 유전개발에 뛰어들었을까.

    그 정답은 ‘북한’에 있다. 러시아에 초점을 맞추고 이 사건을 바라보면 절대로 해답을 찾지 못한다. 그러나 북한에 시선을 맞추고 살펴보면 ‘아하! 그래서 철도공사가 뛰어들었구나’ 하며 사건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철도공사가 개발하려고 한 러시아 유전은 부실한 유전이 아니다. 이 유전을 철도공사에 매각한 페트로사흐사는 ‘빵빵한’ 러시아 기업이다(주간동아 482호 참조). 철도공사는 러시아 유전에서 생산된 석유를 한국이 아닌 북한에 공급해주기 위해 러시아 유전 사업에 도전했던 것이다.

    對北 영향력 확대 위한 방법으로 논의

    철도공사는 왜 북한에 석유를 공급해주려고 했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북핵 일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1994년 제네바합의가 이뤄진 뒤 미국은 북한에 연 50만t의 중유를 제공해주었다. 그러나 2002년 2차 북핵 위기가 시작되자 미국은 “북한이 제네바합의를 어겼다”며 중유 제공을 중단했다. 미국이 중유 공급을 중단할 무렵 북한은 연간 70만t이 채 안 되는 원유를 수입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 미국이 북한이 공급받는 석유류의 70%에 이르는 중유 공급을 중단해버렸으니 북한이 겪는 고통은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한국이 개입해 북한의 석유난을 풀어준다면 한국은 북한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미국 중유에 크게 의존하기 전까지 북한은 주로 중국과 러시아로부터 원유를 수입해왔다. 그런데 북한은 두 나라와 송유관을 연결하지 않고 철도를 이용해 원유를 수송해왔다.

    중국에서 압록강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오는 철도는 신의주역 바로 북쪽에 있는 덕현이라는 곳에서, 유명한 ‘경의선’과 우리에게는 매우 생소한 ‘염주덕현선’으로 갈라졌다가 평북 염주역 바로 북쪽에서 다시 합쳐진다. 북한은 왜 염주덕현선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철도를 놓은 것일까. 염주덕현선에는 백마역과 비현역 등이 있는데, 백마역과 비현역 사이는 석유 관련 및 화학 공장 등이 즐비한 북한 최고의 중화학 공장 지대다.

    北 도우려다 ‘기름’ 뒤집어썼다
    염주덕현선의 철도는 백마역과 비현역 등에서 수많은 지선으로 분지(分枝)되는데, 분지된 철도는 바로 옆에 있는 화학공장과 석유공장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때문에 중국에서 물자를 싣고 온 화차는 미국 군사위성이 볼 수 없는 건물 안에서 화물을 내려놓을 수 있다.

    비현역 인근에 중국의 지원을 받아 건설된, 북한인들이 ‘비현정유공장’으로 부르는 정유공장이 있다. 북-중 관계가 매우 좋았던 덩샤오핑 집권 시절 이 공장은 중국으로부터 많은 원유를 공급받아 힘차게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개혁·개방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중국이 원유 수입국으로 돌아서고, 북한이 원유를 사올 외화 부족을 겪으면서 이 정유공장은 개점휴업 상태에 들어갔다.

    염주덕현선상의 비현정유공장이 중국산 원유를 전문으로 처리하던 곳이라면, 함북선(원라선이라고도 한다)이 지나는 나진역의 승리정유공장은 러시아산 원유를 전문으로 처리하던 곳이다. 러시아산 원유를 실은 화차는 핫산역에서 두만강을 건너 두만강역에서 함북선을 만난 다음 이 철도를 따라 나진역에 도착한다. 나진역은 여느 기차역과 마찬가지로 철도가 여러 선으로 분지(分枝)돼 있는데, 승리정유공장은 철도들이 분지돼 나가는 중간에 들어서 있다. 때문에 러시아산 원유를 실은 화차도 바로 승리정유공장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그러나 승리정유공장도 북한이 외화 부족을 겪으면서, 그리고 북한이 러시아로부터 빌린 38억 루블을 갚지 못하면서 러시아로부터의 원유 공급이 중단되었다. 승리정유는 비현정유에 앞서 개점휴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2000년 6월15일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우선 남북한의 철도를 잇고, 이어 시베리아횡단철도와 연결함으로써 한반도를 21세기 동북아 물류거점으로 만든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이로써 암울했던 승리정유에 희망의 ‘햇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남북한을 이은 종단철도가 시베리아횡단철도와 연결되려면 함북선이 활성화돼야 하는데, 함북선이 활성화되려면 북한이 에너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수룩한’ 철도公 ‘독박’ 쓴 꼴

    당시 러시아는 노태우 정부 때 제공된 차관을 갚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 이용해 러시아 유전개발권을 따내고 이 유전에서 생산한 원유를 북한에 공급해 미국의 중유 공급 중단으로 고통받고 있는 북한 경제를 살리며 동시에 우리가 북한 문제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보자는 방안이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다.

    2003년 9월18일 김진표 당시 재정경제부 장관은 러시아 재무부 장관을 만나 원리금 합계액 22억4000만 달러인 대러 차관을 6억6000만 달러 탕감해 15억8000만 달러로 해준다는 합의문에 서명했다. 이 합의를 계기로 러시아 유전을 개발해 북한에 석유를 공급한다는 논의가 더욱 활성화되었다.

    처음에는 한국석유공사가 러시아 유전개발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한국석유공사는 금방 ‘못하겠다’며 떨어져나갔다. 한국석유공사 측이 내건 이유는 승리정유의 빈약한 처리 능력이었다. 전남 여수의 GS칼텍스 정유공장은 하루 65만 배럴의 원유를 처리하나, 승리정유공장은 그 1%도 안 되는 6000배럴밖에 처리하지 못한다. 이렇게 작은 정유공장을 위해 유전을 개발할 회사는 없으므로 한국석유공사는 재빨리 개발 사업을 포기했던 것.

    그러자 대안으로 거론된 것이 철도공사였다고 한다. 철도공사는 남북정상회담 합의에 따라 남북 종단철도를 이을 책임이 있는데, 마침 승리정유는 나진역 한가운데에 있으니 참여시킬 명분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철도공사는 ‘팔자’에도 없는 러시아 유전개발을 검토하게 됐는데, 계약을 한 단계에서 승리정유공장의 개선 비용과 빈약한 처리 시설 등을 고려하면 전혀 사업성이 없다고 판단해 ‘파기’ 결정을 내렸다.

    철도공사로서는 ‘수렁’에 빠지기 전에 철수하는 용단을 내린 것인데, 이미 계약금을 지불한 다음이었으므로 이것이 감사원 감사에서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오일 게이트’라고 하는 검찰 조사를 받는 이유가 되었다. 철도공사가 러시아 유전개발에 관심을 기울일 때 청와대에서도 몇몇 인사가 이 사업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철도공사가 철수를 단행하면서부터는 전부 물러서는 형세를 취했다.

    철도공사의 러시아 유전개발 의혹 사건은 회수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대러 차관 일부를 탕감해주는 대신 러시아 유전개발권을 획득하고 이 유전에서 생산한 원유를 나진역상에 있는 북한의 승리정유에 공급함으로써, 북한에 대한 개입 기회를 가져보자는 일부 정치권 인사의 ‘안이한’ 판단이 초래한 일종의 해프닝이다. 이 과정에서 철도공사는 ‘어수룩’하게 끼어들었다가 뒤늦게 발을 뺐으나, 이미 지불한 계약금 때문에 혼자 ‘독박’을 쓴 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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