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 무렵, 한국 중견 감독들과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신인들 사이에 스타일의 불연속선이 그어졌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 사실을 거의 인지하지 못할 텐데, 그건 임권택 같은 몇몇 선택받은 사람을 제외한 대부분의 ‘중견들’이 이 시기에 일어난 물갈이 여파에 거의 완벽하게 ‘도태’되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관객들은 그들의 영화를 더 이상 보지 않는다.
아무리 ‘301, 302’가 90년대 한국 영화의 새로운 문을 연 작품이라고 해도, 박철수는 여전히 ‘중견’이다. 그는 드물게 살아남았다. 그 때문에 그의 신작 ‘녹색의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고 관객들을 자극하는 것은 과감한 섹스 묘사나 실제 사건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서른두 살 이혼녀 문희(서정 분)와 열아홉 소년 현(심지호 분)의 (법적으로 금지된) 러브 스토리라는 설정과 종종 사실주의에서 한참 벗어나는 스토리 전개가 아니라, 그의 예스러운 스타일이다. 특히 대사들이 그렇다. ‘현’처럼 자음으로 끝나는 이름을 부르면서도 ‘아’를 떨어뜨리고, ‘하지만’ 대신 ‘그러나’를 접속부사로 선택하고, 막연한 관념들을 담은 뻔뻔스러운 문어체 문장들을 늘어놓으며, 심지어 그것으로 직설적인 교훈까지 전달하려는 대사들. 임권택의 최근 영화들처럼 ‘녹색의자’는 요새 관객들에게 아주 옛 영화처럼 보인다. 특히 살빛 영화들이 한창 유행이던 80년대 후반의 영화들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이 순진무구하고 조금은 촌스러워 보이는 원래의 스타일과 의도적인 장난을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남자 주인공의 성년식을 축하하기 위해 두 주인공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파티에 초대되는 후반부에 접어들면 영화는 작정하고 노골적으로 유치한 말장난들과 연극적 장치들을 끌어들여 클라이맥스를 만들어내니까.
그렇다면 관객들은 이 언(un)쿨함을 받아들일 것인가? 글쎄, 이 영화의 대사들과 설정들은 관객들이 앞서가는 예술적 실험으로 인정하도록 유려하게 흐르지는 않는다. 사실 몇몇은 그냥 형편없다. 그게 농담이건, 연극적인 과장이건, 진지한 무엇이건.
그러나 이런 투박함에도 ‘녹색의자’엔 힘이 있다. 그건 살아 숨쉬는 실제 사람보다는 막연한 관념의 그림자에 머문 듯한 캐릭터들의 빈자리를 온몸으로 채워준 두 배우 때문일 수도 있고, 덜컹거리는 와중에도 어떻게 살아남은 유머 때문일 수도 있고, 뻣뻣한 대사들과 설정의 방해에도 살아남은 러브 스토리의 힘 때문일 수도 있으며,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솔직하고 직설적인 성적 에너지 때문일 수도 있다. 80년대 살빛 영화들 이야기를 했는데, 이 영화에는 그들을 훨씬 능가하는 노출과 섹스 신들이 있지만 그런 영화들을 지배했던 굴종적인 신음으로 범벅이 된 사디즘은 없다. 여전히 박철수가 원하던 주제에 완벽하게 도달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 영화가 그 과정 중 얻어낸 건전하고 밝은 삶의 긍정은 무시하기 힘들다.
아무리 ‘301, 302’가 90년대 한국 영화의 새로운 문을 연 작품이라고 해도, 박철수는 여전히 ‘중견’이다. 그는 드물게 살아남았다. 그 때문에 그의 신작 ‘녹색의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고 관객들을 자극하는 것은 과감한 섹스 묘사나 실제 사건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서른두 살 이혼녀 문희(서정 분)와 열아홉 소년 현(심지호 분)의 (법적으로 금지된) 러브 스토리라는 설정과 종종 사실주의에서 한참 벗어나는 스토리 전개가 아니라, 그의 예스러운 스타일이다. 특히 대사들이 그렇다. ‘현’처럼 자음으로 끝나는 이름을 부르면서도 ‘아’를 떨어뜨리고, ‘하지만’ 대신 ‘그러나’를 접속부사로 선택하고, 막연한 관념들을 담은 뻔뻔스러운 문어체 문장들을 늘어놓으며, 심지어 그것으로 직설적인 교훈까지 전달하려는 대사들. 임권택의 최근 영화들처럼 ‘녹색의자’는 요새 관객들에게 아주 옛 영화처럼 보인다. 특히 살빛 영화들이 한창 유행이던 80년대 후반의 영화들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2003년 ‘녹색의자’ 촬영 전 배우 서정(오른쪽)과 심지호가 고사를 지내고 있다.
그렇다면 관객들은 이 언(un)쿨함을 받아들일 것인가? 글쎄, 이 영화의 대사들과 설정들은 관객들이 앞서가는 예술적 실험으로 인정하도록 유려하게 흐르지는 않는다. 사실 몇몇은 그냥 형편없다. 그게 농담이건, 연극적인 과장이건, 진지한 무엇이건.
그러나 이런 투박함에도 ‘녹색의자’엔 힘이 있다. 그건 살아 숨쉬는 실제 사람보다는 막연한 관념의 그림자에 머문 듯한 캐릭터들의 빈자리를 온몸으로 채워준 두 배우 때문일 수도 있고, 덜컹거리는 와중에도 어떻게 살아남은 유머 때문일 수도 있고, 뻣뻣한 대사들과 설정의 방해에도 살아남은 러브 스토리의 힘 때문일 수도 있으며,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솔직하고 직설적인 성적 에너지 때문일 수도 있다. 80년대 살빛 영화들 이야기를 했는데, 이 영화에는 그들을 훨씬 능가하는 노출과 섹스 신들이 있지만 그런 영화들을 지배했던 굴종적인 신음으로 범벅이 된 사디즘은 없다. 여전히 박철수가 원하던 주제에 완벽하게 도달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 영화가 그 과정 중 얻어낸 건전하고 밝은 삶의 긍정은 무시하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