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한 유전지대.
상황이 이런데 정작 사할린-6 유전개발 사업이나 이를 추진해온 러시아 석유회사의 실체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게 없다. 또 이번 사건이 앞으로 러시아와의 에너지 협력 사업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없다. 뿐만 아니라 국가기관이나 에너지 관련 기업보다 정치인과 이권을 노린 ‘브로커’들이 설치는 대(對)러 에너지 사업의 현실에 대한 반성도 없다. 이번 사건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앞으로 대러 에너지 협력 사업도 비슷한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우려다.
먼저 사할린-6 사업부터 살펴보자. 이번 사건으로 사할린-6 유전은 마치 사업성도 없는 ‘깡통 프로젝트’인 것처럼 국내에 알려졌다. 그러나 사할린-6 사업은 사할린에서 진행되고 있는 9개 에너지 개발 사업 가운데 하나로 현실성 있는 ‘살아 있는’ 프로젝트다. 이 유전의 확인된 원유 매장량은 3억t. 개발이 본격화되면 해마다 100만~150만t의 원유를 생산할 수 있다.
사할린-6 사업, 살아 있는 프로젝트
이 사업을 주도해온 것이 러시아 유전개발 회사인 페트로사흐(Petrosakh)다. 알파에코(Alfa-eco) 그룹은 페트로사흐 지분의 95%를 가진 ‘주인’이었다. 일부 국내 언론은 알파에코가 실체도 없고 재무 상태가 부실한 ‘유령회사’인 것처럼 보도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알파에코는 러시아 최대의 민간 그룹인 알파그룹의 지주회사로, 러시아에서 가장 큰 투자회사다. 또한 에너지 관련 메이저 회사인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과 합작으로 세운 러시아 3위의 석유회사 BP-TNK의 대주주이기도 하다. 알파그룹은 금융과 에너지, 정보통신, 유통 등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는데 러시아 최대 민간은행인 알파방크와 각각 2, 3위인 이동통신사 빔펠콤과 메가폰도 계열사로 갖고 있다.
경제 전문지 포브스 조사에 따르면 알파그룹 총수인 미하일 프리드만(40) 회장은 개인 자산만 70억 달러에 이르는 러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부자.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모스크바 철강대학 재학 중인 1988년 기업 활동이 부분적으로 허용되자 친구들과 사업에 뛰어들었다. 개인용 컴퓨터(PC) 조립과 판매가 첫 사업이었다. 그는 공격적인 기업 인수·합병(M&A)과 전략적 제휴를 통해 알파그룹을 10여년 만에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알파에코는 사할린-6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2000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소규모 유전개발 회사인 페트로사흐를 인수했다. 2001년 페트로사흐는 러시아 국영석유공사(로스네프티)와 각각 50%의 지분으로 사할린-6 사업권을 따냈다. 이때까지만 해도 별 문제 없이 사업이 추진되는 듯했다.
하지만 사할린-6은 다른 사할린 프로젝트보다 규모가 작았음에도 사업 진행이 예상보다 더뎠다. 원래 사할린-6은 사할린을 비롯해 인근 러시아 극동 지역에 원유를 공급하기 위한 내수용 유전으로 개발되기 시작됐다. 사할린 주정부가 페트로사흐의 지분 5%를 갖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철도청은 필요한 석유를 직접 확보하기 위해 러시아 유전사업 참여를 구상하게 됐다고 설명했지만, 이 유전의 성격상 생산된 물량의 국내 반입은 처음부터 어려웠던 것이다.
러시아 연방정부와 사할린 주정부의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인 데다, 한때 로스네프티가 사업 철수를 검토하는 등 사업 주체 사이에 갈등까지 생기자 이 사업에 대한 흥미를 잃은 알파에코는 페트로사흐를 팔아치우기로 결심하고 인수할 업체를 찾기 시작했다. 사할린-6 유전은 내수용이기 때문에 페트로사흐도 러시아 국내 석유업체에 팔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페트로사흐를 사라는 제의가 한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일부 밝혀진 대로 ‘에너지 브로커’들의 구실이 있었다. 가장 먼저 제의를 받은 곳은 석유공사. 그러나 석유공사는 사업제안서가 너무 부실하다며 단번에 거절했다. 물론 그럴듯한 사업제안서를 갖고 왔다고 하더라도 사할린-6 유전 개발이 만만치 않다는 사정을 아는 석유공사가 나섰을 리도 없다. 결국 페트로사흐라는 미끼를 문 것은 에너지 개발에 문외한인 철도청이었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뒷줄 왼쪽)와 푸틴 러시아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합작회사 BP-TNK 설립계약서를 교환하는 미하일 프리드만 알파그룹 회장(앞줄 왼쪽)과 존 브라운 BP 사장.
뒤늦게 연방정부도 인수를 승인했으나 유전에서 생산된 물량의 ‘내수 우선’ 조건이 달렸다. 게다가 철도청 측이 베이커 & 맥킨지(Baker & Mckenzie)를 통해 페트로사흐를 실사해봤더니 부실 징후까지 나왔다. 페트로사흐는 2000만 달러의 세금을 내지 않고 있었는데 인수하면 이를 떠안아야 한다는 것.
결국 정황을 볼 때 알파에코가 사할린-6 사업과 페트로사흐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숨긴 채 페트로사흐를 철도청에 팔려 했다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에너지 개발 사업은 투자 위험이 높게 마련이다. 해외 석유 개발에 참여하겠다고 나선 것치고 철도청은 너무 ‘어수룩했던’ 것이다.
알파에코는 철도청이 계약을 해지하자 계약금을 돌려주지 못하겠다며 버텼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발 빠르게 다른 인수 희망자를 찾기 시작했다. 철도청으로부터 계약 해지 통고를 받은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알파에코는 페트로사흐의 지분 30%를 러시아 석유회사인 우랄스에너지(Urals energy)에 팔았다. 우랄스에너지의 바실리 스타비치크 부회장은 “점차 지분을 넓혀나가겠다”고 밝혔지만, 러시아 에너지 업계에서는 이미 우랄스에너지를 사실상 페트로사흐의 새 주인으로 보고 있다.
다시 철도청과 알파에코의 계약금 반환 분쟁으로 돌아가자. 국내에서 철도청이 러시아 유전사업에 섣불리 투자했다가 계약을 파기하는 바람에 계약금을 떼이게 됐다는 보도가 나오자 상황은 급박해졌다.
올해부터 한국철도공사로 이름을 바꾼 옛 철도청은 왕영용 사업개발본부장을 모스크바에 급파해 알파에코로부터 계약금을 돌려받기 위한 협상에 나섰다. 철도공사는 계약 파기의 귀책사유가 알파에코에 있다며, 계약금 반환을 자신했다. 만일 양측이 합의를 하지 못하면 분쟁은 스위스의 중재법원으로 넘어가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미 알려진 대로 4월6일 철도공사는 계약금 620만 달러 중 310∼350만 달러를 알파에코 측에 그동안의 행정 비용으로 보전해주기로 하고 협상을 끝냈다. 계약금의 절반가량을 떼인 셈이다.
귀국한 왕 본부장은 계약금 전액을 돌려받지 못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해명했다. “철도공사가 페트로사흐의 인수를 포기해 기업 가치가 떨어지는 바람에 알파에코는 가격을 깎아서 다른 업체에 페트로사흐를 팔아야 했고 그에 대한 손실 보전을 철도공사에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랄스에너지는 페트로사흐를 ‘헐값’에 인수했다는 얘기다. 러시아 에너지 업계에서는 우랄스에너지가 페트로사흐의 기업 가치를 5500만~6000만 달러로 평가해 지분을 인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철도공사가 6200만 달러에 인수하려 했던 것보다 무려 700만 달러 이상 싼 가격이다. 이는 왕 본부장의 설명과 일치한다.
한편 러시아 재계에서는 페트로사흐를 인수한 우랄스에너지의 레오니드 디야첸코 회장이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의 전 사위라는 점이 화제가 됐다. 옐친 전 대통령은 딸만 둘을 두었다. 그중 둘째 딸인 타티아나 디야첸코(45)는 아버지 못지않은 ‘뉴스메이커’다. 타티아나는 옐친 대통령 재직 당시 아버지의 이미지 메이킹 담당 보좌관을 지내며 병약한 아버지를 대신해 사실상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타티아나는 사생활도 복잡하다. 10대 후반에 동급생과 첫 결혼을 했으나 곧 이혼했다. 첫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옐친가(家)에서는 금기일 정도로 이 결혼은 행복하지 못했다. 타티아나는 첫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남편의 성이 아닌 아버지의 성과 이름을 따라 보리스 옐친 2세로 지었다. 외손자가 옐친 가문의 후계자가 된 셈이다.
사할린-6 유전개발사업을 주도해온 알파그룹의 계열사인 러시아 최대 민간은행 알파방크와 페트로사흐를 인수한 우랄스에너지의 디야첸코 회장 부부(작은 사진).
두 사람의 불륜을 안 옐친 대통령은 격분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다만 여론을 의식해 임기가 끝날 때까지는 이 사실을 극비에 부쳤다. 아버지가 사임한 지 1년이 지나자 타티아나는 디야첸코와 이혼하고 유마셰프와 세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이혼 후에도 디야첸코는 여전히 옐친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랄스에너지는 2002년 시베리아 코미공화국에 있는 유전을 놓고 러시아 최대 석유회사인 루코일과 분쟁을 빚기도 했다.
그럼 러시아 쪽에서 보는 ‘오일 게이트’ 사건의 본질은 뭘까. 국내에서는 큰 이슈가 됐지만, 러시아 언론은 이번 사건을 제대로 보도하지도 않았다. 러시아에는 수백여개의 크고 작은 에너지 관련 기업이 있다. 앞으로 2~3년 동안만 해도 100여개의 신규 광구 입찰이 예정돼 있다. 그 과정에서 국내외 기업 간의 제휴와 M&A는 수없이 많다. 한마디로 러시아 에너지 업계에서 이번 사건은 ‘얘깃거리’도 되지 않는 것이다. 투자를 결정했다가 문제가 생겨 사업을 청산하는 경우는 너무나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앞으로 한-러 간의 에너지 협력 사업에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인 오영일 박사는 “이번 사건 때문에 러시아와의 에너지 협력의 중요성이 희석되고 앞으로 대러 사업이라고 하면 막연한 불신감부터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우려했다.
대러 에너지 사업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이 확산돼 사업을 추진하는 국내 기업과 기관들의 부담이 커졌다는 것. 마찬가지로 러시아 에너지 업계에서도 사업 파트너로서 한국 기업에 대한 인식이 결코 좋아지진 않았을 것이다.
한편 모스크바 주재 한국 대기업의 주재원은 “정치인들이 ‘에너지 외교’ 한답시고 러시아에 드나들 때부터 언젠가 사고 칠 줄 알았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규모가 큰 에너지 사업에는 정치권 인사나 ‘브로커’들이 끼어들 여지가 많다. 특히 러시아 사업에는 ‘인맥’이 중요하다고 알려지면서 ‘실력자’를 통해 사업을 성사시켜주겠다고 접근하는 경우가 적잖다. ‘자원 외교’를 한다며 러시아를 자주 드나드는 정치권 인사들이 표적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한 전문가는 “러시아 같은 시장일수록 더욱 정상적이고 국제 관행에 맞게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유전개발이라면 석유공사, 가스전 개발이라면 가스공사처럼 전문성을 가진 기업이 주도하고 투자 결정부터 협상 과정까지 투명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