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짧지 않은 방황 끝에 마침내 사회에서 내 자리를 찾아갈 즈음, 그는 가요계를 은퇴하고 한국을 떠났다. 서태지가 은퇴 선언을 하던 날, 눈이 쏟아지는 종로 거리를 혼자 헤매며 울던 생각이 난다. 내게 젊음은 축복이 아니라 형벌 같은 시간이었다. 그 힘겨운 시간을 함께 보냈던 벗이 떠나가는데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으랴.
이것은 기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담이다. 그러나 90년대를 살았던 젊은이의 대다수는 이와 비슷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서태지가 은퇴하고 한국을 떠나자 충격 받은 기자의 지인 한 사람 역시 ‘한국에서의 청춘 시절’을 접고 유학을 떠났다.
서태지라는 이름은 90년대를 관통했던 하나의 총알이다. 이념이 실종되고 불경기가 시작되고 여전히 대학입시는 어려웠던 시절, 서태지는 적잖은 젊은이들에게 위안이자 구원이었다. 그는 ‘대학, 그까짓 게 뭔데!’라고 소리쳤고, 집을 나간 아이들에게 ‘더 나은 미래가 있다’며 돌아오라고 손을 내밀었다. 당시로서는 생각도 못했던 통일을 노래로 부르기도 했다. 서태지가 노래에 담았던 메시지들은 지금 다시 들어보면 지극히 평범하다. 그러나 모두 알고 있지만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을 나서서 외치는 사람을 선구자라고 한다면, 서태지는 젊은이들의 선구자였다.
2002년 3월은 서태지가 ‘서태지와 아이들’로 데뷔한 지 꼭 10주년이 되는 달이다. 서태지는 1992년 3월23일 ‘난 알아요’ ‘환상 속의 그대’가 수록된 ‘서태지와 아이들’ 1집을 내며 데뷔했다. 작곡가들과 가수들은 그에게 혹평을 퍼부었고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의 반응과 정반대로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지난 10년간 서태지는 ‘서태지 세대’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서태지가 성공한 후 보여준 행보는 더욱 의미심장하다. 서태지는 기존 권력에 적극적으로 저항하기는 했지만 상업적인 성공과 돈에 결코 초연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자신을 신비화하는 전략을 통해 스스로를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만드는 데 앞장섰다. 강박적일 정도로 독창성, 새로운 것을 외치면서도 외국의 첨단 조류는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서태지의 이중적 성향은 결국 한국 젊은이들의 모습에 지나지 않았던 것.
그러나 현재진행형인 서태지 세대를 분석하려는 시도는 일견 무의미해 보이기도 한다. 서태지의 첫 음반이 발매될 때 대학교 1학년이던 세대가 이제 막 30대가 되었다. 서태지 세대는 여전히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서태지는 솔로 2집 ‘울트라맨이야’ 앨범에 이런 문장을 남겼다. ‘아무런 위로 없이/ 시간과 이 시대의 속도감을 이겨온, 그대로인 너에게/ 내가 약속이 되고 이제 위로가 되었으면.’ 그 모든 분석과 수식어를 떠나 서태지는 젊은 세대에게 위로가 되는 존재다. 그것만으로도 당분간 서태지의 가치는 충분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