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시대’가 개막됐다. 세계화, 정보화 등으로 무장한 시민사회의 선택은 변화와 개혁이었고 그 중심에 노무현이 서 있었다. 50대 대통령의 등장은 필연적으로 3김 시대의 퇴장을 동반한다. 권위주의와 집단주의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었다. 대신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로 무장한 20, 30대가 신파워그룹으로 등장했다. 그들은 정치개혁과 사회변혁을 강력히 주문한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로서는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노무현 시대, 과연 어떤 비전을 제시할 것인가.
대선 패배 이후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왼쪽).이회창 후보가 2002년 12월20일 정계은퇴를 선언한 뒤 한나라당 당사를 떠나고 있다(오른쪽).
“이후보의 지지율이 현찰이라면 노후보의 지지율은 (부도가 잘 나는) 어음이다.” 한나라당 김영일 사무총장이 투표일 하루 전 선거전략회의에서 한 말이다. “여론조사의 노후보 지지율에는 거품이 많다”면서 승리를 확신한 것이다. 그러나 다음 날 막상 개표를 해보니 노후보 지지율은 ‘현금’이었다. 개표 상황을 지켜보면서 김총장은 망연자실했다.
이후보의 한 특보는 개표 상황을 지켜보다가 밖으로 나와서 폭음을 했다. “정권을 되찾겠다는 희망으로 5년을 버텼는데, 어떻게 야당 생활을 10년을 할 것인가”라며 넋을 잃었다. 이후보는 다음 날 “당원들이 5년간 또 가시밭길을 걸어야 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진다”며 눈물을 쏟아냈다.
12월21일 일부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전자개표 과정에서의 조작설’이 유포됐다. 한나라당은 이와 관련한 대책회의를 열었다. 위로전화도 받기 싫다면서 휴대폰을 꺼놓고 지내던 당직자도 이날 회의에 참석했다. 컴퓨터를 활용한 표 집계 과정에 의혹이 있다는 게 조작설의 내용이었다. 한 의원은 “반드시 수작업에 의해 재검표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른 한 의원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느냐”며 회의론을 폈다. 재검표를 하기 위해선 노후보를 상대로 당선무효소송을 제기해야 하고, 재검표 결과가 전자개표 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경우 정치적 부담이 클 것이며, 무엇보다 승복문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이유였다. 이 같은 내용은 당 지도부에도 보고됐다. 한나라당에서 재검표 논란은 몇 차례 더 계속될 전망이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바닥에 깔려 있다.
거대 인재풀 ‘부국팀’ 해체 초읽기 돌입
대선 패배 후 한나라당은 그야말로 초상집이다. 패배의 충격이 워낙 큰 탓이다. 당 지도부가 가장 우려하는 대목은 야당 역사상 현재의 한나라당과 같은 상황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대선에서 패배한 이전의 정당은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이회창과 같은 거물이 여전히 당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혼란과 이탈을 쉽게 제어할 수 있었다는 것. 한나라당의 경우 차세대 주자가 전혀 등장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후보가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는 당의 내분과 구심력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후보의 퇴진은 한나라당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당 내외 ‘인재 풀’의 동반 쇠락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후보 개인후원회인 부국팀은 대선 직전 사회 각계에 걸쳐 수천명의 전문가집단을 회원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이후보의 친구, 핵심 측근들이 이들 전문가들과 거미줄처럼 얽혀 이후보를 위한 거대한 싱크탱크를 형성했다. 법조인, 예술인 등 각계 인사들이 대선 기간 동안 이후보 지지선언을 한 것도 이런 조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후보 집권시 각 부처당 장관후보만 4~5명은 추천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부국팀은 대선을 앞두고 당 공식기구로 편입됐다. 그러나 부국팀 관계자는 “당 공식기구건, 이후보의 사조직이건 부국팀은 이회창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유일 목표로 결성된 만큼 그 진로가 매우 불투명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후보가 신뢰를 보내며 힘을 실어주었던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도 이후보 정계은퇴 이후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이후보는 당 공식기구 이외에 정무, 외신, 공보, 홍보, 법률, 행정, 직능, 통일, 경제, 민생, 과학·기술, 환경 등의 분야에 걸쳐 30여명에 이르는 개인 특보를 두고 있었고, 이들 외에 20여명의 후보 보좌역 조직이 따로 있었다. 이후보 특보들은 이후보 당선시 청와대 수석비서관, 정부부처 장관 등 각계 요직에 등용될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으나 이후보가 정계은퇴를 선언함으로써 이들의 앞날에도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당사 건축비 미지급금 77억 엄청난 부담
한나라당이 재정적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한나라당은 서울 여의도 당사에 97년 11월 입주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당사 건축비 230억원 중 77억원을 시공회사에 아직 납부하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선거가 시종 박빙으로 진행되자 한나라당은 후원금, 국고보조금으로 받은 자금 대부분을 선거운동에 ‘베팅’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 재정담당 관계자는 “대선에서 승리하면 당 살림이 숨통이 트일 것으로 보고 채무문제 해결은 대선 이후로 미뤘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은 빚 독촉에 시달릴 공산이 커진 셈이다.
한나라당이 최근 ‘여당 같은 야당’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 ‘이회창 대세론’ 덕이었다. 야당이 후원회를 통해 수백억원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이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선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다음 대선은 5년 뒤에 있고 현재 한나라당에는 이후보에 필적할 만한 대중성을 갖춘 대권 주자가 없는 상태다.
급격한 사기의 저하, 조직과 인재의 이탈, 재정적 어려움 등은 한나라당의 위기를 심화시키는 요인들이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 제기되는 ‘원내 중심정당으로의 개혁’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갖는 당내 인사도 상당수다. 대선 패배 직후의 어려운 시기에 ‘당 슬림화’를 위한 구조조정에 본격 나설 경우 ‘급격한 당세 위축’을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가 깔려 있다.
한나라당에선 서서히 대선 패배 이후 당 진로와 관련된 의견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당 단결론(보수파 원로의원), 조기 전당대회론(서청원 대표), 민정계 등 보수중진 2선 후퇴론(일부 개혁성향 의원), 당 개혁색깔 강화론(미래연대 등 일부 수도권 의원들), 원내 중심정당론(김덕룡 의원) 등이 그것이다.
일단 당내에선 20, 30대 유권자들로부터 한나라당이 외면당한 것을 선거 패배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고 있다. 전체 유권자 수의 절반에 육박하는 20, 30대 유권자들은 이번 선거에서 높은 투표 참여율을 보였으며 전국적으로 노후보에게 60% 이상의 지지를 보낸 것으로 나타났다. 20, 30대의 투표성향을 돌려놓지 않고서는 2004년 총선, 2007년 대선에서도 승리가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은 당의 인적 쇄신과 개혁성향 강화가 환골탈태의 기본 방향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한나라당 최고위원 7명 중 6명이 민정계 중진 보수성향 의원으로 채워져 있는 부분에 대해 당장 당내 비판이 제기되는 분위기다.
한나라당의 운명은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행보에 따라 상당한 영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대선에 패배한 이상 여권의 행보를 지켜본 뒤 수동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의원은 “노당선자에게 정치개혁 이슈를 또다시 선점당해 그의 개혁 행보에 끌려다닐 경우 한나라당엔 앞날이 없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은 1년4개월 뒤 17대 총선에서 다시 유권자들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원내 과반수 의석의 유지가 한나라당의 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 여의도연구소 관계자는 “역대 총선에서 유권자들은 집권세력 견제를 위해 야당을 원내1당으로 만들어주는 투표성향을 보였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이 대선 때 얻은 1100여만 표의 ‘정치적 인프라’를 바탕으로 내부 개혁과 당의 단합에 성공할 경우 총선 승리를 통해 위기의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는 논리다.
박근혜 의원의 측근은 “이후보도 없고, 당의 주류도 사실상 무너졌고, 당 소속 대통령도 없는 이때가 바로 집단지도체제를 제대로 운영할 수 있는 기회”라고 말했다. 정당 역사상 처음으로 한나라당은 구심점을 잃었다. 거꾸로 생각하면 1인 정당 지배체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얘기다. 하지만 현 한나라당의 체질상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