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복고풍 코미디 영화들이 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복고 바람을 대대적으로 일으킨 선두주자로는 곽경택 감독의 ‘친구’를 꼽을 수 있다. ‘친구’는 검은 교복과 롤러스케이트장, 버스 회수권 등을 동원해 386세대와 40, 50대 장년층에게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이후 등장한 영화들은 ‘친구’와 마찬가지로 지나간 시대를 배경으로 하되 코믹 요소를 크게 확대했다. 비록 흥행에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해적, 디스코왕 되다’는 본격적인 복고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이 밖에 10대의 성적 호기심을 질펀하게 풀어내 흥행에 성공한 정초신 감독의 ‘몽정기’는 복고풍 영화가 이제 한 흐름으로 자리를 잡았음을 입증해주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볼 때 조근식 감독의 데뷔작 ‘품행제로’는 코믹 복고풍 영화의 한 획을 그을 것으로 기대되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일단 코미디 영화답게 신선한 웃음을 선사하지만 그 웃음을 유발하는 장치(이론)들이 결코 억지스럽지 않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2002년 들어 흥행을 주도했거나 하고 있는 영화들, 예컨대 ‘라이터를 켜라’ ‘가문의 영광’ ‘광복절 특사’ 같은 영화들은 모두 코미디 영화들이다.

‘품행제로’는 이런 영화들의 뒤를 잇고 있으면서도 나름대로 뚜렷한 차별성이 있다. 일단 코미디 영화에서 허용될 수 있는 황당무계한 이야기 설정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런 황당무계한 상황 자체를 다시 한번 비튼다. 예컨대 특수효과를 적극 활용해 그저 폼만 잡으면 되었던 종래의 현란한 액션 장면들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비현실성을 여지없이 폭로해버리고 만다.



영화에서 주인공 박중필(류승범)은 문덕고의 ‘캡짱’이다. 그는 혼자 태권도부원 17명을 추풍낙엽을 만들어버린 전설적인 싸움꾼이다. 그런데 그 앞에 강적이 나타났다. 그 역시 유도부 유단자들을 삽시간에 해치운 괴력의 소유자다. 과연 이 두 강자가 맞붙으면 어떻게 될까.

그러나 감독은 이 싸움 자체보다 그 이면에 초점을 맞춘다. 실제 싸움과 그것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부풀려질 대로 부풀려진 무용담 간의 차이를 아주 예리하게 간파해 그로부터 오는 부조화(불일치)를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관객의 웃음을 이끌어낸다. 억지 웃음을 짜내려던 삼류 코미디물들이 맥을 못 추고 나가떨어질 만큼 관객의 눈높이가 높아진 상황에서 이처럼 수준 높은 웃음의 기술을 보여주는 ‘품행제로’는 당연히 관객의 환호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류승범이라는 걸출한 남자 배우도 돋보인다. 물론 그가 출연한 영화 편수를 감안할 때 류승범은 아직 신인이다. 그는 친형인 류승완 감독의 장편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 일찍이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이후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술집 종업원 역을 리얼하게 소화해 인기를 끌더니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뇌성마비 장애인 역할을 진짜처럼 연기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 작품에 와서야 비로소 자신의 끼를 유감없이 발산하고 있다.

류승범은 요즘 TV 드라마 ‘고독’에서 40대 미혼모를 사랑하는, 반항기가 있으면서도 진중한 청년 역할을 맡아 나름대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베테랑 연기자 이미숙의 상대역을 맡아 조금도 처지지 않는 연기를 선보인다.

미남형과는 거리가 먼 류승범은 단독 주인공을 맡은 최초의 영화 ‘품행제로’에서 거의 ‘원맨쇼’에 가까운 연기를 펼치면서 또 다른 도약을 시도하고 있다. 류승범의 부상은, 외모가 아닌 타고난 끼와 연기력으로 정상에 선 송강호나 설경구 같은 선 굵은 연기자들의 뒤를 잇는다는 측면에서 무척 고무적인 일이라 하겠다.

이 영화에서 중필을 사모하는 두 명의 여성 캐릭터도 눈여겨볼 만하다. 정란여고 오공주파의 리더인 나영 역을 맡아 신선한 연기를 보여준 공효진과 그녀와 연적 관계에 있는 ‘범생이’ 민희 역의 임은경이 그들이다. 공효진 역시 미모로 승부하기보다는 자신만의 개성으로 입지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여배우 기근에 시달리는 영화계가 주목하는 배우다. 흥행에서 참패한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에서 값비싼 수업료를 치러야 했던 임은경은 이 작품에 와서야 비로소 ‘신비의 베일’을 홀가분하게 벗어던지고 자신만의 연기를 찾아가는 느낌이다. TTL 광고 등에서의 고정된 이미지가 아닌,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2424’ 같은, 정말 웃기지도 않는 코미디물들에 식상해가고 있던 나에게 ‘품행제로’의 등장은 마냥 반가울 따름이다. 청산해버려야 할 것이 많은 이 연말에 이 영화를 보면서 실컷 웃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