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시대’가 개막됐다. 세계화, 정보화 등으로 무장한 시민사회의 선택은 변화와 개혁이었고 그 중심에 노무현이 서 있었다. 50대 대통령의 등장은 필연적으로 3김 시대의 퇴장을 동반한다. 권위주의와 집단주의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었다. 대신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로 무장한 20, 30대가 신파워그룹으로 등장했다. 그들은 정치개혁과 사회변혁을 강력히 주문한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로서는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노무현 시대, 과연 어떤 비전을 제시할 것인가.
김대중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 김종필 자민련 총재 (왼쪽부터)
대선 직전 JP는 “이회창도 싫고 노무현도 싫지만 이회창이 조금 더 싫다”는 발언으로 절묘한 수위로 다시 한번 영향력을 발휘하려 했다. ‘다행히’ JP가 조금 더 싫다고 한 이회창 후보는 낙선했으나 당선자 진영에선 ‘고맙다’는 말이 없고 누구도 JP를 찾지 않는다. 76세의 JP는 결국 ‘서산을 붉게 물들이지’ 못했다. ‘한나라당의 핵분열’과 ‘이삭 줍기’가 JP에겐 은퇴를 연장하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 모른다. 그러나 JP의 ‘견인력’을 회의적으로 보는 정치권 인사들이 많다. JP는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11월24일)라고 말했다.
2002년 11월21일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나라당이 대선에서 승리하는 것이 순리”라면서 이회창 후보 지지선언을 했다. 그러나 유권자들은 그의 순리를 저버렸다. 한나라당 서청원 대표는 YS의 지지선언을 이끌어내기 위해 직접 나섰다. “YS가 와서 득이 되는 것은 없지만 노후보에게 가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부정의 논리’가 컸다. YS 지지선언의 효과는 실제로 며칠 뒤 ‘후보단일화 뉴스’에 묻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올해 재·보궐선거에서 YS의 차남 현철씨는 끝내 한나라당 공천을 받는 데 실패했다. 한나라당은 YS보다는 여론을 훨씬 더 무서워했다.
초라한 JP, 힘없는 YS, 그리고 권력 놓는 DJ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비상경제대책위원회’를 가동해 당시 대통령이던 YS를 ‘식물대통령’으로 만들어버렸다. DJ는 IMF 관리체제를 부른 전임 정권으로부터 대통령 권한을 2개월 정도 일찍 ‘접수’한 셈이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요즘은 상황이 달라졌다. DJ는 임기종료일까지 대통령 권한을 행사하고 떠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2월25일은 곧 다가오며, 이날 그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한다. 그것은 청와대뿐 아니라 정치의 현장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퇴임 이후 DJ가 정치에 실질적 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로 보는 정치권 인사는 거의 없다.
DJ YS JP의 ‘3김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다. ‘정치는 길고 정권은 짧다’는 YS의 저서 제목처럼 정권은 짧았지만 3김시대는 영원할 듯했다. DJ가 신민당 후보로 71년 대선에 나선 시점을 기준으로 해도 30년이 넘는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63년 민정 이양으로 박정희 정권의 2인자가 된 JP와 야당의 패기만만한 미래 지도자로 발돋움하던 YS, DJ가 대결을 벌이기 시작한 63년부터 치면 만 40년이다. 그만큼 ‘3김’은 우리의 정치사를 오래 지배했다.
1. 73년 일본에서 납치됐다 귀국한 김대중씨가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2. 손을 흔들고 있는 김대중 신민당 대통령후보. 3. 71년 유세를 하고 있는 김대중 신민당 대통령후보. 4. 85년 미국에서 귀국하고 있는 김대중씨. 5. 2002년 6월 아들 구속과 관련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있는 김대중 대통령.<br><br>6. 69년 나영식 의원과 대화를 나누는 김영삼 의원(왼쪽). 7. 인권탄압 규탄대회에 참가한 김영삼 민추협 공동의장. 8.사복경찰관에 의해 끌려가고 있는 김영삼씨. 9. 92년 대통령선거 유세를 하고 있는 김영삼 민자당 후보. 10. 제14대 김영삼 대통령 취임식 장면. <br><br>11. 62년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12. 75년 고별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김종필씨. 13. 박정희 총재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있는 김종필 공화당 부총재. 14. 79년 공화당 총재로 취임한 김종필씨. 15. 67년 국회에서 대통령 시정연설을 대독하고 있는 김종필 국무총리.
3김은 이제 국가 원로로 아태재단(DJ), 일본 와세다 대학(YS), 자민련(JP) 등에서 활동할 예정이지만 정치적 생명은 사실상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또한 이른바 정치구조로서의 ‘3김정치’도 폐기될 것이 분명하다. 3김정치라는 용어는 1인 중심의 비민주적 보스정치, 지역구도 정치 등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3김이 ‘한국 현대사’ 그 자체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랜 세월 정치권의 보스로 생존할 수 있었던 것도 나름대로 다수 국민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표 참조).
DJ는 여야 간 정권교체, 보수-개혁 세력 간 정권교체, 37년 영남 중심 정권의 종식에 성공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주류를 다변화했다. 논란이 있긴 하지만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켜 남북 간 교류 및 평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이 덕분에 노벨평화상도 수상했다. YS는 군사정부에서 문민정부로 ‘정부 주체의 성격’을 바꿨다. YS는 또 금융실명제 등 정치·경제 개혁을 단행해 수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정착시켰다. DJ와 YS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에 공헌했으며 80년대 말까지 제도정치권의 마이너리티에 불과했던 민주화세력을 국가 수권세력으로 끌어올렸다. JP는 보수층, 산업화세력, 정치·지역적으로 ‘소수’인 충청도 주민들의 정치적 이익을 대변하는 구심점이었다.
DJ와 YS가 정치적으로 키워준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3김정치 종식’의 ‘리더’가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면서 필연이기도 하다. 88년 인권변호사 활동이 ‘동아일보’에 크게 소개되면서 노당선자가 지명도를 얻게 되자 YS는 그를 발탁, 국회의원에 공천했다. YS를 떠난 노당선자가 “지역감정 깨겠다”고 찾아간 사람은 DJ였다. 2000년 8월 발표된 김대중 정부의 새 내각 명단에서 정치인 출신 장관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바로 노무현 해양수산부 장관이었다. ‘국정 경험 경력’을 쌓는 것은 대권을 꿈꾸고 있던 노당선자의 염원이었다. DJ는 노당선자에게 큰 선물을 안겨준 셈이었다. 노당선자의 대북정책, 개혁정책은 ‘DJ와 오차범위 내’에 있다. 반면 여론조사에서 뒤지는 상황에서 노당선자가 노-정 후보단일화를 수용할 땐 ‘YS의 승부사적 기질’이 읽힌다. 이 때문에 민주당 문희상 의원은 “노당선자는 머리는 DJ, 가슴은 YS를 닮았다”고 말한다.
이회창 후보를 감사원장, 국무총리, 신한국당 선대위 의장에 차례로 임명하면서 이후보에게 대권후보가 될 자양분을 준 사람은 YS였다. 이후보측 논리에 따르면 DJ는 이후보를 탄압함으로써 이후보를 반DJ세력의 구심점으로 만들어줬다.
국민들 ‘3김 청산 열망’ 표로 말했다
그러나 3김 덕에 성장한 노무현 당선자와 이후보는 3김 개개인과 3김식 정치에 대립함으로써 자신들을 차별화했다. 이는 시대적 변화의 반영이기도 했다. 이후보는 ‘김대중 정권 심판론’으로 직격탄을 날리며 노당선자를 DJ 양자로 몰아세웠다. 노당선자는 낡은 정치 타파를 선거 이슈로 내세웠다. 낡은 정치란 3김식 정치를 의미했다. 노당선자는 5년 전 3김 종식을 외쳤던 이후보를 3김식 정치의 주역으로 지목했다. 이후보는 이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반면 이후보가 제기한 DJ양자론은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고, 이는 선거의 패배로 이어졌다.
노당선자는 지역감정 타파를 위해 부산에 ‘자진 출마’해온 점을 들어 자신만이 3김식 지역분할 정치를 종식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유권자들은 노당선자 주장을 어느 정도 수긍해줬다. 13, 14, 15대 대선 때 DJ가 한나라당의 아성인 대구, 경북에서 얻은 득표율은 2.4%, 8.7%, 12%였다. 그러나 이번 16대 대선에서 노당선자는 18%(대구), 21%(경북)를 얻었다.
노당선자가 이후보의 정권 심판론에 맞서 선거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새 정치’ 구호가 주효했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은 한국 정치의 부정적 요소들을 ‘3김식 정치’라는 타이틀 아래 묶어 일소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 적임자로 ‘정권 심판론자’보다는 ‘새 정치론자’를 택했다. 3김정치가 선거 쟁점이 됐다는 점은 3김정치 종식에 대한 열망이 그만큼 크다는 뜻도 된다.
노무현 시대의 개막과 함께 3김시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