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란 단어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말이다. 그런데 철학은 서양이든 동양이든 이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해 답을 해온 학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헤겔 이후 존재에 대한 질문이 무망해진 측면이 있지만, 인류의 사상이 존재에 대한 궁금증으로 점철된 것은 존재 자체가 깊은 사유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불가(佛家)의 ‘無’자 화두와 같은 것임을 짐작게 한다.
그런데 문제는 존재에 글자 하나를 덧붙인 ‘존재자’다. “저기 사과가 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사과라는 존재자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지각한다. 물론 눈을 감았을 때는 눈앞에 있어도 지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 눈을 뜨고 본 사과의 존재에 대해 우리는 그 속성을 모두 이해하는 것일까? 내가 인식한 사과라는 존재는 겉으로 보이는 것일 뿐 내용은 각각 다르다.
각각 다른 사과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또 다른 이음을 붙이거나 ‘달다’ ‘시다’ ‘벌레 먹었다’ ‘단단하다’ ‘크다’ ‘작다’라고 표현하지만, 그 모든 서술이 사과의 존재를 명확히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존재는 평균, 혹은 일반화한 개념이다. 그냥 밥, 사과, 사람 심지어 ‘나’조차도 명확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온갖 철학자가 머리를 싸매고 덤볐고, 그리스 철학에서 근대철학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와 씨름한 것이다.
한데 마르틴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전양범 옮김, 동서문화사 펴냄)에서 존재에 대한 규정을 하기보다 ‘존재의 의미를 묻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는 우선 우리가 알고 있는 존재자(인식 대상)와 존재의 성격을 오해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우리가 파악 가능한 것은 존재자에 대한 파악이지 존재에 대한 파악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사과’라는 존재자를 인식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존재에 대한 파악이 이뤄진다고 여긴다. 하지만 사실은 반대다. 우리가 존재자를 파악하는 것은 존재의 속성에 대한 어렴풋하고 일반적인 이해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즉 사과의 속성을 감각적으로 이해하고 있기에 사과라는 존재자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에 대한 관계에 질문을 던지면서 ‘존재적’이라는 제3의 관념에 대한 자각을 요청한다. 존재적이라는 말은 존재자에 대한 설명이다. 존재자를 두고 어떻게 설명한 것인지를 고민하면 그것이 존재적이라는 뜻이다. 즉 존재자와 그 속성인 존재, 그리고 그것을 설명하려는 존재적이라는 3개의 개념이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우선 필요한 준비다.
그 다음으로 나아가는 것은 ‘현존재’의 개념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자의 존재를 존재적으로 해명할 때, 존재자에 대해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고 규정하고 그것을 가리켜 ‘현존재’라 칭한다. 즉 존재자 중에서 존재에 궁금증을 가지고 존재적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유일하고 그 인간은 우리 자신이다. 이것이 현존재다.
인간은 사물과 달리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관계 속에 규정된다. 지배를 받거나 질서에 소속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불안해지고 소외된다. 심지어 하루 종일 전화벨이 울리지 않아도 곤란한 것이 인간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와 관련된 나를 가리켜 ‘실존’한다고 말한다. 즉 나는 나의 존재와 여러 가지로 관계하며, 그래서 나는 실존적이다. 때문에 나는 스스로에 대해 존재를 물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과 관계하는 현존재다. 그리고 나의 존재를 관계하며 소통하고 이해하고 규정하는 것은 실존인 것이다. 물론 나의 존재에 대해 문제 삼을 수 있고 질문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다. 그 다음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이 책 ‘존재와 시간’은 현존재의 일상성, 세계 내 존재, 주체와 객체, 시점과 도구, 현존재와 공간성, 자신과 타자 등으로 사유가 이어진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과 반성으로 연결된다. 철학 전공자가 아닌 독서가가 이 책을 쉽게 읽는다는 것은 역부족이다. 마냥 쉽지만은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한 인간의 극한적 사유가 이렇게까지 전개되는 엄청난 ‘사유의 바다’를 눈앞에 두고, 그 바다에 뛰어들어보지도 못한다면 곤란하다. 아직 접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쉬엄쉬엄 읽어나가면 생각보다 무리가 없다.
다만 독서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면 실패한다. 그저 한 위대한 철학자의 ‘사유에 대한 염탐’ 정도라고 해두면 좋겠다. 이 책을 소개하다 보니 갑자기 이 말이 생각난다. ‘그도 할 수 있고 그녀도 할 수 있는 일인데, 나라고 왜 못해!!!’
http://blog.naver.com/donodonsu
물론 헤겔 이후 존재에 대한 질문이 무망해진 측면이 있지만, 인류의 사상이 존재에 대한 궁금증으로 점철된 것은 존재 자체가 깊은 사유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불가(佛家)의 ‘無’자 화두와 같은 것임을 짐작게 한다.
그런데 문제는 존재에 글자 하나를 덧붙인 ‘존재자’다. “저기 사과가 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사과라는 존재자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지각한다. 물론 눈을 감았을 때는 눈앞에 있어도 지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 눈을 뜨고 본 사과의 존재에 대해 우리는 그 속성을 모두 이해하는 것일까? 내가 인식한 사과라는 존재는 겉으로 보이는 것일 뿐 내용은 각각 다르다.
각각 다른 사과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또 다른 이음을 붙이거나 ‘달다’ ‘시다’ ‘벌레 먹었다’ ‘단단하다’ ‘크다’ ‘작다’라고 표현하지만, 그 모든 서술이 사과의 존재를 명확히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존재는 평균, 혹은 일반화한 개념이다. 그냥 밥, 사과, 사람 심지어 ‘나’조차도 명확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온갖 철학자가 머리를 싸매고 덤볐고, 그리스 철학에서 근대철학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와 씨름한 것이다.
한데 마르틴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전양범 옮김, 동서문화사 펴냄)에서 존재에 대한 규정을 하기보다 ‘존재의 의미를 묻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는 우선 우리가 알고 있는 존재자(인식 대상)와 존재의 성격을 오해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우리가 파악 가능한 것은 존재자에 대한 파악이지 존재에 대한 파악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사과’라는 존재자를 인식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존재에 대한 파악이 이뤄진다고 여긴다. 하지만 사실은 반대다. 우리가 존재자를 파악하는 것은 존재의 속성에 대한 어렴풋하고 일반적인 이해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즉 사과의 속성을 감각적으로 이해하고 있기에 사과라는 존재자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에 대한 관계에 질문을 던지면서 ‘존재적’이라는 제3의 관념에 대한 자각을 요청한다. 존재적이라는 말은 존재자에 대한 설명이다. 존재자를 두고 어떻게 설명한 것인지를 고민하면 그것이 존재적이라는 뜻이다. 즉 존재자와 그 속성인 존재, 그리고 그것을 설명하려는 존재적이라는 3개의 개념이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우선 필요한 준비다.
그 다음으로 나아가는 것은 ‘현존재’의 개념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자의 존재를 존재적으로 해명할 때, 존재자에 대해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고 규정하고 그것을 가리켜 ‘현존재’라 칭한다. 즉 존재자 중에서 존재에 궁금증을 가지고 존재적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유일하고 그 인간은 우리 자신이다. 이것이 현존재다.
인간은 사물과 달리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관계 속에 규정된다. 지배를 받거나 질서에 소속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불안해지고 소외된다. 심지어 하루 종일 전화벨이 울리지 않아도 곤란한 것이 인간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와 관련된 나를 가리켜 ‘실존’한다고 말한다. 즉 나는 나의 존재와 여러 가지로 관계하며, 그래서 나는 실존적이다. 때문에 나는 스스로에 대해 존재를 물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과 관계하는 현존재다. 그리고 나의 존재를 관계하며 소통하고 이해하고 규정하는 것은 실존인 것이다. 물론 나의 존재에 대해 문제 삼을 수 있고 질문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다. 그 다음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이 책 ‘존재와 시간’은 현존재의 일상성, 세계 내 존재, 주체와 객체, 시점과 도구, 현존재와 공간성, 자신과 타자 등으로 사유가 이어진다.
<b>박경철</B><br>의사
다만 독서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면 실패한다. 그저 한 위대한 철학자의 ‘사유에 대한 염탐’ 정도라고 해두면 좋겠다. 이 책을 소개하다 보니 갑자기 이 말이 생각난다. ‘그도 할 수 있고 그녀도 할 수 있는 일인데, 나라고 왜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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