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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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의 겹, 미술 전체로 영역 확장

  • 유진상 계원조형예술대 교수·미술이론

    입력2006-09-11 10: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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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화의 겹, 미술 전체로 영역 확장

    재스퍼 존스의 ‘0에서 9까지 (0 through 9)’

    오늘날 포토샵에서 자주 사용하는 ‘겹(layer)’이라는 개념은 미술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겹에는 시각적인 것도 있지만 의미론적인 것도 있고, 또 때로는 매체의 사용에서 생겨나는 겹도 있다.

    가령 하나의 그림 위에 다른 그림을 얹어서 그린다면 시각적 겹이 강조된 것이고, 하나의 주제 위에 다른 주제를 병치하거나 동시에 사용한다면 의미론적 겹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캔버스 위에 나뭇조각을 붙여서 작업한다면 두 가지 이상의 매체가 사용된 것이므로 복수의 겹인 것이다. 원경, 중경, 근경은 원근법적 겹들이 중첩되어 있는 것이며 오래된 그림 위에 새로 덧그려진 그림을 보면 시간의 겹을 느낄 수가 있다.

    시각적인 겹의 사례들 가운데 아마도 가장 오래된 겹 이미지는 원시시대의 동굴벽화일 것이다. 예컨대 ‘라스코(Lascaux)’에서는 어둠 속에서 그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하나의 동물 그림 위에 다른 동물 그림들이 중첩되어 그려져 있다. 이 이미지의 구성은 현대에 와서는 비정상적이라고 느껴지기보다 상호 무관한 구도의 시간의 추이에 따른 중첩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매우 세련된 것으로 간주된다.

    고대의 대표적인 기록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 양피지 책(Palimpsest)은 수없이 기록된 그림이나 문자를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새로 기록되면서, 보일 듯 말 듯 한 수많은 기록의 흔적들이 빽빽한 시간의 겹을 표현한다.

    르네상스 회화의 ‘펜티멘토(Pentimento)’는 완성된 그림의 표면 밑에 보이는 드로잉이나 밑칠을 가리킨다. 이것은 현대회화 이전에는 완성된 그림에서 보여서는 안 되는 것으로, 불완전한 기술로 인한 결함으로 간주됐다.



    하지만 현대회화에서는 오히려 펜티멘토를 강조하거나 아니면 그것으로만 이루어진 그림을 그린다. 가령 추상표현주의 회화나 팝아트에서는 밑그림이나 초벌칠을 그대로 보여주는가 하면, 아예 캔버스 천을 남겨두는 방식으로 겹을 강조한다. 재스퍼 존스나 드 쿠닝, 톰블리 등의 작가는 회화 자체가 양피지 책처럼 그려져 있다.

    1980년대에 불붙었던 드로잉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미완성의 회화를 하나의 완성된 장르로 인정하게 만들었다. 겹은 이제 회화뿐 아니라 미술 창작과 비평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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