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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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이즘, 그 무관심의 지배

  • 유진상 계원조형예술대 교수·미술이론

    입력2006-06-01 18: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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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다이즘, 그 무관심의 지배
    트리스탕 차라(1896~1963·사진)는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를 태동시킨 핵심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두 사조가 일본에서 열광받았던 것과 달리 한국에서는 인기를 끌지 못했다. 그 이유로 일본 문화를 지배하는 불교가 내세나 환생 등 초현실적 현상에 관대한 데 비해, 한국의 유교 문화는 현실과 질서에 엄격하기 때문이라는 관점이 있다.

    그런데 1918년에 차라가 작성한 ‘다다이스트 선언문’을 보면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의 밑바탕에는 초현실에 대한 막연한 동경보다 현실에 대한 강렬한 비판의식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고민했던 것은 ‘개인이 억압적인 사회체제에 맞서 결정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는 무엇일까’ 하는 점이었다. 즉, 제1차 세계대전과 파시즘을 초래한 현실을 보면서 ‘과연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의식이 그가 이끌었던 주요 예술운동으로 표출됐던 것이다. 그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자발성(spontaneity)이다. 그것이 다른 것보다 더 낫거나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비롯된 것만이 외부의 어떤 사변적 관념의 개입 없이 우리 자신을 표현하기 때문”이라고 선언한다.

    ‘다다’의 의미에 대해 그는 “다다가 발견하려고 하는 바는 말(단어)이 문법적 관점에서가 아닌 표현의 관점에서 그것이 사용되기 이전에 이미 의미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것은 일종의 정신 상태이며 삶의 방식이다. 그가 추구하려던 바는 ‘무관심(indifference)’의 지배에 대해 저항하는 개인의 결단이었으며, 또한 이를 유머러스하게 실행하는 것이었다.

    “다다가 오로지 격렬함을 통해 표현되는 것을 모순이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파괴’에 의해 전염된 인간의 대응은 격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대응마저 지쳐버리고 나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하는가?’라는 악마적 설득에 의해 의지조차 소멸돼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면 남는 것은 ‘무관심의 지배’뿐이다. 나는 그것에 대한 그 반대를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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