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57

2008.10.21

탄가루 날리던 해안촌 추억마저 울긋불긋 새 단장

공화춘·자유공원·만물상 등 세월 가도 변함없는 명소 즐비

  • 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입력2008-10-15 14:4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탄가루 날리던 해안촌 추억마저 울긋불긋 새 단장
    우연일까. 언제나 인천은 잿빛이었다. 1980년대 말 부평 쪽에서 무슨 ‘운동’이랍시고 일을 할 때, 그때 보았던 부평과 주안과 남동, 그 공단 거리의 하늘은 소설가 김성동의 표현을 빌리건대 짙은 승복 빛이었다. 한낮에도 어두웠다. 주물 기계들이 토해내는 차디찬 마찰음들 위로 뻘건 쇳물이 스파크를 일으켰다.

    무슨 전단지를 돌리고자 부평의 큰 자동차 공장 정문 앞에 서 있었던 일이 있다. 출근길이었다. 푸른 신호등이 켜지자 건너편에서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성큼성큼 건너오고 있었다. 나는 유인물을 돌려야 하는 의무를 잠시 잊은 채, 짙은 푸른색 작업복을 입고 건너오는 거대한 군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행렬 앞에 건네는 유인물은 그야말로 종이 쪼가리에 지나지 않았다. 돌이켜보니 이십 년 전 그때의 감정은 일상의 엄숙함에 떠밀릴 수밖에 없는 한낱 문생의 초라한 감상일 뿐이었다.

    흡사 트라우마처럼, 그때의 기억 때문에 언제나 인천은 잿빛으로 남아 있다. 이는 인천에서 나날의 삶을 운영하시는 분들에게 지극히 죄송스런 표현일 뿐만 아니라, 내 다른 기억과도 마찰을 빚는 것이다. 예컨대 나는 2002년 한일월드컵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 즉 포르투갈과의 경기를 찬란한 밤하늘 아래에서 관전하였고 SK와이번스의 빛나는 경기 또한 주말의 강렬한 햇살 아래에서 보았다.

    평일에도 관광객들로 북적 … ‘연경’ 2층에선 거리 한눈에 들어와

    탄가루 날리던 해안촌 추억마저 울긋불긋 새 단장
    그랬음에도 인천이 내게 잿빛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혹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를테면 1934년에 소설가 강경애는 장편 인간문제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면서 당시의 인천항과 만석동의 동양방직을 무대로 삼았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 ‘문제작’ 속에서 인천은 어두컴컴하다. 80년대에는 소설가 정화진이 쇳물처럼에서 주안공단의 애환을 다뤘다. 소설가 박민규는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으로 가난했던 시절의 인천을 그렸고, 몇 해 전에는 김중미가 쓴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널리 팔렸는데 역시 만석동이 주요 공간이다. 영화의 기억으로도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가 있는데, 이 역시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서울로 나갈 수밖에 없는, 20대 후반의 불안한 서정이 깔려 있다. 이 작품들 속에는 언제나 바닷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리고 중국인 거리가 있다. 한국 근현대문학사 100년 역사에서 가장 애틋한 정조로 일관한 오정희의 단편 중국인 거리, 혹시 그 때문이 아닐까, 내 기억의 인천에 늘 애틋한 구름이 끼어 있는 까닭은 이 소설 때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이 숨막히는 소설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

    “시(市)를 남북으로 나누며 달리는 철도는 항만의 끝에 이르러서야 잘렸다. 석탄을 싣고 온 화차(貨車)는 자칫 바다에 빠뜨릴 듯한 머리를 위태롭게 사리며 깜짝 놀라 멎고 그 서슬에 밑구멍으로 주르르 석탄 가루를 흘려보냈다. (중략)/ 석탄은 때로 군고구마, 딱지, 사탕 따위가 되기도 했다. 어쨌든 석탄이 선창 주변에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있는 현금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고, 그래서 우리 동네 아이들은 사철 검정 강아지였다./ 해안촌(海岸村) 혹은 중국인 거리라고도 불리는 우리 동네는 겨우내 북풍이 실어나르는 탄가루로 그늘지고, 거무죽죽한 공기 속에 해는 낮달처럼 희미하게 걸려 있었다.”

    ‘낮달이 희미하게 걸려’ 있는 소설 속의 ‘중국인 거리’는 지금 울긋불긋하게 화장한 관광처소로 바뀌었다. 주말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중국인 거리를 찾는 인파는 단락이 없다. 끝없이 이어지는 행렬은 서너 가닥으로 나뉘면서 혹은 전통의 중국음식점 ‘공화춘’으로 들어가고 혹은 맥아덕 장군 동상이 있는 ‘자유공원’으로 올라가고 혹은 저렴한 물건이 잔뜩 쌓여 있는 ‘만물상’ 같은 곳으로 사라진다.

    그 행렬에서 잠시 벗어나 오늘날 중국인 거리의 좌우 모든 광경을 가장 인상적으로 살필 수 있는 대형 중국음식점 ‘연경’ 2층 옆의 널찍한 마당에 앉아 있으면 오정희 소설에 묘사된 중국인 거리는 오간 데 없다. 하기야 오정희는 이 소설을 1970년대 후반에 썼고, 더욱이 소설 속의 시간은 50년대의 기억이니 그 수십 년 세월의 변천으로 인하여 예전의 중국인 거리가 실물로 남아 있기란 어려운 것이고, 그것이 차라리 박제된 ‘진열장’이라면 좋으련만, 오늘날 실제의 삶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또한 큰 상처일 것이다.

    중국인 거리는 비릿한 냄새가 풀풀 새어나오는 어른들의 세계, 그 생생하면서도 낯선, 오직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가야만 하는 생의 존엄함과 바로 그런 숙명이 내린 비루한 욕망과 의무가 가득 찬, 그런 어른들의 세계에 한발 한발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되는, 어느 성장기의 소녀 이야기다. 오정희는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의 문장에는 너무나 큰 빈틈이 많다고 했지만 그의 후배들이 되는 신경숙 은희경 천운영 같은 작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고, 일부 작가는 그것을 베껴 쓰면서 절망감까지 느꼈다고 토로하는데, 그런 고백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 소설의 문장은 완벽하게 쌓아올린 벽돌집의 견고함과 닮아 있다. 그 어디 하나라도 꺼내게 되면, 완벽성에 흠결이 나서 견고한 벽돌집이 무너질 것만 같은, 그런 세계이기 때문에 어디 한 구절 인용하는 것이 위험한 줄 알면서도 다시 그 소설의 한 대목을 읽어본다. 소설의 아이가 한밤에 중국인 거리 언덕 위의,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는 자유공원에 올라가는 대목이다.

    ‘중국인 거리’에서 성장한 오정희, 소설에 이곳 정취 자세히 담아

    탄가루 날리던 해안촌 추억마저 울긋불긋 새 단장
    “아직 겨울이고 깊은 밤이어서 나는 굳이 사람들의 눈을 피하지 않고도 쉽게 장군의 동상에 올라갈 수 있었다. 키를 넘는, 위가 잘린 정사면체의 받침돌에 손톱을 박고 기어올라 장군의 배 위에 모아쥔 망원경 부분에 발을 딛고 불빛이 듬성듬성 박힌 시가지를 내려다보았다. 지난해 여름 전진(戰塵)처럼 자욱이 피어오르던 함성은 이제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조용했다. 귀 기울여 어둠 속에 부드럽게 흐르는 소리를 좇노라면 땅속 가장 깊은 곳에서 숨어 흐르는 수맥이라도 손끝에 닿을 것 같은 조용함이었다./ 나는 깜깜하게 엎드린 바다를 보았다. 동지나 해로부터 밤새워 불어오는 바람, 바람에 실린 해조류의 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중국인 거리, 언덕 위 이층집의 덧문이 열리며 쏟아져나와 장방형으로 내려앉는 불빛과 드러나는 창백한 얼굴을 보았다. 차가운 공기 속에 연한 봄의 숨결이 숨어 있었다./ 나는 따스한 피 속에서 돋아오는 순(筍)을, 참을 수 없는 근지러움으로 감지했다.”

    오정희는 ‘중국인 거리’의 적산가옥에서 성장했다. 신흥초등학교를 다녔으며, 물신처럼 버티고 선 제분공장에서 몰래 밀알을 한 움큼 훔쳐먹기도 했다. 거리에는 중국인들이 많이 살았고 미군을 상대하는 아가씨도 많았다. 서울의 어느 한적한 골목이 아니라, 당시 ‘중국인 거리’는 항만과 미군기지와 공장과 술집과 가난이 뒤엉킨, 흡사 이 세상의 모든 욕망과 고통과 찰나의 희열이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아마도 세월의 변화는 그런 것들의 변화를 동반하였겠지만, 다만 그 형식이 다를 뿐 내용까지 완연히 달라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지금의 ‘중국인 거리’, 그러니까 울긋불긋하게 화장한 관광명소 차이나타운은 그 모든 기억을 말갛게 가리고 있지만 말이다. 사람이 살고, 살아가고 살아가고, 또 살아내야 하는 일들이 있다면, 이 소설의 마지막 대목, 산통과 초경의 기억은 영영 사라지기 어려울 것이다.

    탄가루 날리던 해안촌 추억마저 울긋불긋 새 단장
    “한낮이어도 벽장 속은 한 점의 빛도 들이지 않아 어두웠다. 나는 차라리 죽여줘라고 부르짖는 어머니의 비명과 언제부터인가 울리기 시작한 종소리를 들으며 죽음과도 같은 낮잠에 빠져들어갔다./ 내가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 어머니는 지독한 난산이었지만 여덟 번째 아이를 밀어내었다. 어두운 벽장 속에서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절망감과 막막함으로 어머니를 불렀다. 그리고 옷 속에 손을 넣어 거미줄처럼 온몸을 끈끈하게 쥐고 있는 후덥덥한 열기를, 그 열기의 정체를 찾아내었다./ 초조(初潮)였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