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57

2008.10.21

음식 불신 사회문제 A형 국민 늘어난 탓?

  • 90402201@hanmail.net

    입력2008-10-15 14: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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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식 불신 사회문제 A형 국민 늘어난 탓?
    고향에 계시는 아버지는 집에서 자전거로 3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조그만 텃밭을 갖고 있다. 말단 공무원 생활 30년 만에 유일하게 마련한 부동산인데, 정년퇴직과 동시에 당신 하루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내고 있다. 200평이 조금 안 되는 밭을 쪼개고 쪼개 이것저것, 그러니까 고추와 옥수수, 상추, 고구마, 감자를 빽빽하게 심어놓고는 뜨거운 여름 한낮 태양과 씨름하는 것이다. 한데 그것 참. 아버지는 분명 오리지널 산골 출신에다 진짜배기 농부의 맏아들이 맞건만, 직장생활 30년 만에 농사짓는 법을 다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손자들 먹을거리를 직접 재배해 택배로 보낸다는 것이 아버지의 야심찬 계획이었지만, 박스 포장 전 언제나 어머니에게 제지를 당하는 눈치였다.

    “거 농약을 얼마나 세게 치는지 모른다. 그런 걸 어찌 손자들에게 보내누?”

    시외통화 저편에서 어머니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지난번 너희 집에 보낸 옥수수도 말이다, 이제야 말하지만 그게 알고 보니 사료용 옥수수라더라. 어째 맛이 좀 이상하다 했어.”

    나는 어머니와의 통화내용을 아내에겐 말하지 않았다. 아내는 그 옥수수를 처형에게도 나눠주면서 ‘이게 우리 시아버지가 유기농으로 지은 거잖아. 맛은 또 얼마나 좋은데!’ 하고 한참 동안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저 이 자리를 빌려 처형과 그 가족에게 아내를 대신해 깊은 사과의 뜻을 전할 뿐이다.



    전화로 늘 아버지 흉을 보는 어머니지만, 그래도 적극적으로 아버지의 농사를 만류하진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의견인즉슨, 그나마 그게 더 낫다는 것이다. 농약을 얼마나 쳤는지 빤히 아니까 그만큼 더 씻게 되고, 종자가 뭔지 알고 있으니 어디, 어떤 음식에 얼마만큼 넣어야 하는지 당신이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시장이나 마트, 음식점에서 파는 음식들은 그런 정보 자체가 없으니 찜찜하고, 언제나 속는 기분이 든다는 것. 그러니 비록 소가 먹는 것을 함께 먹는다 할지라도 참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먹는 음식 언제나 찜찜하고 속는 기분

    살림살이 30년 베테랑 어머니가 그러할진대, 이제 2년차에 접어든 아내의 고충이야 말하지 않아도 뻔한 것이었다. 대형마트로 함께 장을 보러 가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이건 뭐 두부 한 모 고르는 데 들이는 집중력이 가히 올림픽 결승전 마지막 한 발을 겨누고 선 양궁선수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GMO(유전자변형식품)가 함유되었는지 안 됐는지, 국산인지 중국산인지, 기타 다른 성분이 포함되었는지, 아내는 양손에 각기 다른 두 제품을 든 채 비교하고 또 비교했다. 그러니 장 보는 시간이 하염없이 길어질 수밖에. 이럴 경우 우리 남편들은 대개 어떤 행동을 취하는가? 먼저 주차장으로 가 있거나, 옥상 공원 벤치에 앉아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 한 잔과 함께 담배를 피우지 않겠는가? 그러면서 난생처음 만난 다른 남편들과 갑작스러운 친분을 쌓지 않겠는가? 며칠 전 대형마트 옥상에서 만난 40대 초반의 남자도 그런 경우에 속했다. 남자의 한 손엔 커다란 비닐봉투가 들려 있었고, 다른 한 손엔 ‘쭈쭈바’가 있었다. 담배 한 개비를 계기로 말을 트게 된 남자는, 대뜸 이게 다 특정 혈액형을 가진 인구가 증가했기 때문이라는 다소 황당한 주장을 펼쳤다.

    음식 불신 사회문제 A형 국민 늘어난 탓?

    알고 먹는 것과 모르고 먹는 것은 다르다.

    -거 형씨, 우리나라에 제일 많은 혈액형이 뭔 줄 아쇼? 바로 A형이래요, A형.

    -그게 뭔 상관인데요?

    -참 답답하네. 거, 주위에 A형 사람들 못 봤어요? 꼼꼼하고, 의심도 많고, 한번 삐치면 오래가고, 예민하고, 뭐 여하튼 내성적인 사람들 말이에요.

    나는 그게 우리 아내들의 장 보는 시간이 길어진 것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재차 물어보았다. 그러자 남자는 ‘쭈쭈바’ 빈 껍질을 질겅질겅 씹어대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요 내 말은, 예전부터 음식에 나쁜 짓 하는 인간들은 쭉 있어왔다는 거예요. 한데 이게 왜 갑자기 심각한 사회문제가 됐느냐, 그건 다 A형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 말이죠.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이게 끝이 없는 거예요, 끝이.

    -에이, 그래도 음식 갖고 장난치면 안 되죠. 애들도 먹는 건데….

    나는 남자의 말에 그렇게 교과서처럼 대꾸해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뭐, A형에게 개인적 원한을 가진 사람도 아니고, 그렇게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러자 남자의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더 커졌다.

    -형씨, 형씨도 어린 시절 쫀드기라는 거 사 먹어봤을 거 아니요? 난 초등학교 다닐 때 그걸 입에 달고 살았어요. 선생님들이 불량식품이다 뭐다 겁을 줬는데도 연탄불에 구워 밥반찬으로 먹었을 정도였다, 이 말입니다. 왜냐? 우리 아버지가 학교 앞에서 문방구를 했는데 거기에서 그걸 팔았다, 이 말이죠. 울 아버지가 불량식품을 팔 리 없다, 아버지가 파는 음식이 몸에 해로울 리 없다 믿었던 거죠. 저 말입니다, 이때까지 감기 한번 걸린 적 없이 팔팔하거든요. 그게 다 뭐겠어요? 믿어서 그런 거 아니겠어요?

    나는 입을 조금 벌린 상태로 그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남자는 논리적으론 뭔가 많이 허술해 보였지만, 그만큼 또 순수해 보이기도 했다. 무조건 믿으라는 말씀, 그러면 음식을 파는 사람들도 감화감동해서 더는 음식 갖고 장난치지 않을 거라는 말씀. 나는 그것이 논리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제발이지 그렇게 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한데 그때 남자가 나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불쑥 이렇게 물어보았다.

    -형씨도 A형은 아니죠?

    -네, 그건 맞는데, 어떻게…?

    음식 불신 사회문제 A형 국민 늘어난 탓?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걸 보니… 거, 멜라민인가 뭔가 있다던데.

    남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씨익 웃어 보였다. 나는 남자의 미소를 보고, 들고 있던 자판기 커피를 내려다보았다. 커피는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아아, 제발이지, 나는 믿고 싶을 따름이었다. 혈액형과 상관없이, 성격과 상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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