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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인물, 조선의 책|홍대용과 유리창(琉璃廠) 下

책에 대한 열망 국경 뛰어넘어

베이징서 많은 책 사고도 귀국 후 중국 친구들 통해 재차 구입 시도

  •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책에 대한 열망 국경 뛰어넘어

책에 대한 열망 국경 뛰어넘어

충남문화재자료 제349호로 지정된 충남 천안시의 ‘홍대용 선생 생가터’. 풀만 무성해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베이징(北京)의 유리창(琉璃廠)은 18세기 말 규모를 더 키워 그야말로 천하의 서적이 집적(集積)되는 거대한 서적시장으로 성장한다. 그런데 베이징에는 유리창 외에 다른 서적시장도 있었다. 융복사(隆福寺)가 그곳이다. 융복사는 명나라 경태(景泰, 1450~1457)의 재위기간에 세워진 절이다. 이 절의 넓은 마당에 8·9·10이 드는 날 베이징의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상품은 서화와 골동품, 서적으로 유리창과 같았다. 다만 유리창이 상설시장이라면, 융복사는 정기시(定期市)였던 것이다.

전 호에서 언급했듯, 홍대용은 1월26일 유리창의 미경재(味經齋) 서점을 방문하고, 사흘 뒤인 29일 역관 조명회(趙明會)와 수레를 타고 융복사로 간다.

패루(牌樓) 아래에 이르러 수레에서 내렸다. 문에 들어서자 사방 백 보 가량 되는 넓은 마당이 있었다. 마당 주위로 천막을 쳤는데, 일용의 온갖 물화가 없는 것이 없었다. 그 찬란한 모습이 마치 오색구름과 아침노을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사람과 상품이 그득히 쌓여 걸어서 지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몇만 명의 사람이 지껄이는데도 다만 큰 퉁소 소리처럼 은은한 소리만 들릴 뿐, 크게 외치거나 부르거나 놀라거나 꾸짖거나 하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여기서 그 사람들의 차분하고 조용한 풍습과 성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수만 명의 인파를 뚫고 홍대용은 책을 파는 시장, 곧 유리창처럼 거창한 책시(冊市)로 파고들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수천 수백 질의 서적들이 종류별로 정연하게 꽉 들어차 있다.” 이곳 역시 유리창과 같은 책의 바다였던 것이다.

유리창과 융복사는 큰 규모의 서적시장



융복사 책시장에서 작은 해프닝이 있었다. 홍대용을 담당하던 서반(序班) 한 사람이 먼저 와 있었던 것이다. 서반은 조선 사신단에 서적과 서화 따위를 독점적으로 판매하는 하급 관리이자 상인임은 이미 말한 바 있다. 서반이 홍대용을 보고 어색하게 웃자, 홍대용도 따라 웃고 말을 건넸다.

책에 대한 열망 국경 뛰어넘어

1939년 발행된 ‘담헌집’(맨 오른쪽)과 홍대용의 책을 현대에 맞게 꾸미거나 그의 사상을 다룬 책들.

“내 주머니에 천금이 있어 이곳의 수천 수백 질의 책을 당신 모르게 깡그리 다 사가지고 가려 하니, 그대는 나를 어쩌시려우?”

“나 역시 책을 팔려고 왔으니, 그대가 원하시는 대로 사서 가시우.”

서반은 홍대용이 유리창과 융복사에 갈 때마다 따라다니면서 책을 사는지 엿보았던 것이다. 홍대용이 좋은 말로 따라오지 말라고 달래보았지만 당최 듣지 않았고, 홍대용이 베이징 시내를 나다니는 것 자체를 싫어하여 늘 길을 막고 나서곤 했다. 홍대용은 자신과 동갑내기인 ‘부(傅)’씨 성의 서반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는데, 아무리 같이 이야기해도 속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유리창과 융복사의 서적을 본 홍대용의 머리에는 어떤 생각이 오갔던가. 그는 유리창 미경재에 가득한 신간서적을 보고 주인에게 묻는다.

“듣자하니 중국에서는 책을 더러 토판(土板)으로 찍어내기에 비용은 적지만 일이 갑절이나 많다 하는데 과연 그렇습니까?”

“나무는 쉽게 닳기 때문에 반드시 단단한 것을 골라 써야 하지만, 토판은 그럴 필요가 없지요.”

“중국에도 주자(鑄字)와 철판(鐵板)이 있는지요?”

“모두 목판을 쓰고, 철판과 주자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토판은 흙을 빚어 도자기처럼 구운 활자로 조판한 것일 터이다. 토판 인쇄에 대해 묻지만 대답은 모호하다. 흥미를 끄는 것은 두 번째 질문의 답이다. 중국에는 금속활자 인쇄가 없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민족의 문화를 말하는 사람치고 언필칭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떠들지만, 그 활자로 찍은 책이 과연 유리창과 융복사의 서점에서처럼 쌓여 팔렸던가. 아니, 책시장이란 것이 있기나 했던가.

서신에 원하는 책 제목 담아

홍대용은 유리창과 융복사란 책의 바다에서 어떤 책을 구입했던가. 불행하게도 구입한 책의 목록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가 어떤 책에 관심을 가졌는지는 추측할 수 있다. 홍대용은 베이징에 도착한 뒤 1월20일 오상(吳湘)과 팽관(彭冠)을 만났을 때 ‘독례통고(讀禮通考)’ 속편이 있는지 묻는다. 이에 팽관은 금시초문이라면서 도리어 홍대용에게 책의 저자에 대해 묻는다. 홍대용이 중국 서건학(徐乾學, 1631~1694)의 저작인데 아직 보지 못했느냐고 하자, 팽관은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홍대용은 오상과 팽관을 두고 학문이 별로 볼 것이 없다는 평가를 하는데, 아마도 ‘독례통고조차 모르다니’ 하는 심경이 아니었을까?

홍대용은 이어 1월26일 유리창의 미경재에서 장본(蔣本)·주응문(周應文)·팽광려(彭光盧)를 만났을 때 주응문에게 다시 ‘독례통고’를 비롯한 서적에 대해 묻는다.

“‘목재속집(牧齋續集)’이 있는지요?”

“아직 출판되지 않았습니다.”

“‘독례통고속집’은 있는지요?”

“‘독례통고’는 본조의 서건학 상공(相公)의 저서인데 속집은 없습니다.”

두 종의 책을 묻고 있는데 ‘목재속집’은 전겸익(錢謙益, 1582~1664) 문집의 속편이다. 전겸익의 문집 ‘초학집(初學集)’이 조선에 전해져 조선 후기 문학비평과 창작에 큰 충격을 던졌던바, 그 속편을 찾고 있는 것이다. 홍대용이 집요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독례통고’는 상례(喪禮)에 관한 고금의 설을 종합한 예서(禮書)의 기념비적 저작이다. 이 책 역시 조선에 전래돼 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홍대용은 이 두 저작을 읽고 그 속편을 베이징 유리창에서 찾았던 것이다. 홍대용은 엄성, 반정균과 건정동에서 필담을 나눌 때도 역시 ‘독례통고’의 속편을 찾았다. 또 여유량(呂有良, 1629~1683)과 같은 항청(抗淸)의식을 가졌던 지식인의 문집과 명나라가 멸망한 뒤 중국 남쪽에 일시 잔존했던 남명(南明) 정권의 역사를 기록한 책을 찾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전겸익 문집의 주해본 유무에 대해 문의했고, 전겸익이 원래 항청을 표방하다가 뒷날 청나라에 항복해 신하가 됨으로써 절조를 잃은 사람이라는 정보를 얻기도 한다.

홍대용은 귀국해서도 베이징에 있는 친구를 통해 서적 구입을 시도했다. 그는 엄성(嚴誠)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조선 쪽의 사신이 계속 파견되어 중국의 서적이 제법 많이 흘러 들어오고는 있지만, 오직 ‘황면재집(黃勉齋集·朱子의 제자인 黃幹의 문집)’만은 4, 5권의 소본(小本)이 있을 뿐입니다. 듣자하니, 전집의 예(禮)를 논한 글에 볼만한 것이 많다 하기에 해마다 북경의 저자에서 구입하려고 했지만, 끝내 구하지 못했습니다. 이 밖에 ‘소자전서(邵子全書)’와 ‘천문류함(天文類函)’ 두 책은 평생 보기를 원한 것이지만 그 권수가 적지 않을 것이고, 또 설령 있다 해도 어떻게 멀리 부칠 수가 있겠습니까?

베이징의 친구에게 서적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고 있다. 좁은 조선으로 돌아온 지식인 홍대용에게 그가 목도했던 베이징의 서적시장은 그야말로 갈망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른바 홍대용의 실학적 저술, 곧 ‘주해수용(籌解需用)’‘임하경륜(林下經綸)’‘의산문답(醫山問答)’은 베이징의 서적과 관련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베이징의 서적시장 없이는 저술이 불가능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그 구체적인 상관성은 앞으로 정밀하게 따져야겠지만.

책에 대한 열망 국경 뛰어넘어

중국 베이징 유리창의 상인과 물건들. 청나라 때 서적, 골동품 시장으로 명성이 높았던 이곳은 지금도 서울의 인사동 같은 문화의 거리로 통한다.

홍대용은 귀국 후 세손익위사(世孫翊衛司) 시직(侍直)이란 벼슬을 한다. 세손은 곧 뒷날의 정조(正祖)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었기에 세손이 되었던 것이다. 세손익위사를 계방(桂坊)이라 하는데, 그는 세손을 보호하면서 가르치는 일을 맡았던 것이다. 그때의 일기가 ‘담헌서’에 실린 ‘계방일기(桂坊日記)’다. 영조 51년(1775) 3월28일 세손, 곧 뒷날의 정조와 홍대용이 나눈 대화의 일부를 보자.

“계방(桂坊·홍대용을 말함)은 베이징에 가본 적이 있소?”

“가보았나이다.”

“어떤 일로 가보았소?”

“신의 숙부 전 승지 신(臣) 홍억(洪檍)이 을유년 사행 때 서장관이었는데, 신이 자제비장(子弟裨將)으로 수행했나이다.”

“그때 상사·부사는 누구였소?”

“상사는 순의군(順義君)이었고, 부사는 김선행(金善行)이었나이다.”

“오갈 때 무슨 옷을 입었던가?”

“다른 비장처럼 전립(氈笠)을 쓰고 군복(軍服)을 입었습니다. 돌아올 때는 포립(布笠)을 쓰고 도포를 입었습니다.”

동궁(東宮)께서 웃으며 말씀하셨다.

“백면서생이 난데없이 군복 차림이라 아주 쉽지 않은 일이니, 또한 호사가라 할 만하겠소.”

……

“서사(書肆)는 어떠하던가?”

“유리창(琉璃廠)에 예닐곱 개의 서사가 있어 과연 직접 가서 보았는데, 사방에 판자로 시렁을 설치해놓았고, 책을 종류대로 표지를 정확히 붙여 질서정연하게 진열하고 있었습니다. 한 서점에 간직한 책만 해도 적어도 몇만 권 아래는 아니었습니다.”

정조는 호학의 군주였다. 정치적으로 노론의 심한 견제를 받고 있던 즉위 전의 정조는 오로지 근신하면서 학문에 전념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정조는 비록 베이징 땅을 밟지는 못했지만, 홍대용에게 베이징 유리창의 서점에 대해 물을 정도로 베이징 지식시장의 동향을 꿰고 있었던 것이다.

학문적 제자인 정조에게 베이징 책시장 소개

정조는 청나라가 ‘사고전서’를 편찬하기 위해 중국 최대 출판단지인 저장(浙江)에서 서적을 수집하고 엮은 ‘절강채진유서총록(浙江採進遺書總錄)’이라는 책 목록을 구입하고, 여기서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골라 다시 ‘내각방서록(內閣訪書錄)’이란 목록을 엮는다. 이 목록에 의거해 책을 수입한 정조는 18세기 후반 베이징 책시장의 책을 가장 많이 읽은 박학한 독서가가 된다. 홍대용이 베이징 지식시장에서 경험한 충격으로 낙후한 조선을 개혁할 학문, 곧 실학을 궁리했다면, 정조는 뒷날 베이징에서 수입된 책이 조선의 지식인을 오염시키고 주자학을 해체한다고 판단해, 베이징 서적시장에서의 수입을 금지했다. 그리고 지식인들의 저작을 검열해 사상의 자유를 억압했다. 동일하게 베이징에서 수입된 서적을 읽었지만, 홍대용과 정조가 나아간 방향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뒤에 좀더 자세히 해보도록 하자.



주간동아 2006.12.05 563호 (p90~92)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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