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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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사기거나 사치거나

전통과 귀족 이미지 자랑하며 유행 선도 … 아시아 소비자 맹목적 선호로 ‘짝퉁’ 창궐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6-08-23 15: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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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품 사기거나 사치거나

    서울 압구정동에 문을 열었던 ‘빈센트앤코’ 매장과 광고 이미지.

    “한국에서 명품 마케팅이란 상당 부분 ‘사기 마케팅’입니다. 업계 사람들은 다 알아요.”

    중국산 부품으로 경기도 시흥에서 제조한 시계를 100년 전통의 스위스산 명품 시계라며 판매한 희대의 사기극 ‘빈센트앤코’ 사건이 알려진 뒤 청담동의 초고가 시계 매장 매니저가 냉소적으로 던진 말이다. 뒤이어 180년 전통의 명품 시계라던 G 역시 시장에 나온 지 달랑 5년밖에 안 된 제품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명품 부티크가 몰려 있는 청담동에서는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이다.

    명품 마케팅은 ‘사기 마케팅?’

    “세계적 명품이라면서도 한국 지사를 사장 한 사람이 마음대로 운영한다는 점이 수상쩍긴 했어요. 9000만원짜리 시계를 50% 할인해서 판다는 것도 난센스죠. 시계를 조금만 안다면요.”(A, 스위스 시계와 주얼리 브랜드 한국법인 직원)

    “1억원대 시계를 파는 부티크를 청담동도 아닌 젊은 애들이 많은 압구정동 골목에 서둘러 낸 것이 이상하긴 했어요. 여긴 중저가 매장들만 있으니까요.”(B, 스타일리스트)



    “우린 아무것도 몰라요. 업체에서 자료 주니까 100년 역사인가 보다 했죠. 고객 중에도 100년인지 200년인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일 터지니 홍보사 실수라고 책임을 떠넘기는데, 정말 뻔뻔하네요.”(C, 홍보대행사 대표)

    “4억원을 내고 대리점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런칭 파티가 열리는 날 연예인들만 잔뜩 몰려왔을 뿐 정작 시계업체 사람은 한 명도 없더군요. 회사와 시계에 대한 소개도 없었어요. 이상한 소문까지 들려 계약 해지를 요구하던 중 사기로 밝혀진 겁니다. 난 명품이 뭔지도 몰라요. 정말 황당합니다.”(D, ‘빈센트앤코’ 투자자)

    경찰이 ‘빈센트앤코’에 대한 내사에 착수한 것은 청담동에 고가 시계들이 공짜로 돌아다닌다는 제보 때문이라는 설과, 해당 시계를 구입한 유명 인사가 명품 시계를 수리점에 맡겼다가 ‘메이드 인 차이나’라는 말을 듣고 경찰에 제보했다는 설 등 두 가지가 있다.

    어쨌든 ‘빈센트앤코’는 공식 런칭을 하기도 전인 올봄부터 이미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6월에 열린 호화판 런칭 파티와 스타몰이식 마케팅은 대중을 상대로 벌인 막판 사기쇼였던 셈이다.

    ‘빈센트앤코’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멤버십 명품지에 지속적으로 광고를 내고, 드라마와 패션지 화보촬영 등을 협찬하면서 노출 빈도를 늘렸다. 크고 작은 이벤트에 ‘셀레브리티(유명 인사)’들과 연예인을 초청해 인맥을 쌓은 뒤 대리점 운영권 및 딜러십을 주겠다는 명목으로 15억원이 넘는 돈을 끌어모았다.

    한 홍보대행사 실장은 “명품은 원래 소수 VIP를 상대로 비밀스럽게 마케팅한다. 그들은 돈은 많지만 명품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들통날 가능성이 없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 시계업체 마케팅 담당자는 “시계업체 한국 지사에서 쓸 수 있는 돈이 뻔한데 1쪽당 500만원씩 드는 화보 촬영을 4~5쪽씩 하고, 매월 400만원의 패션지 광고를 하며, 억대 런칭쇼까지 한다는 건 다른 목적이 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올 초에 이미 주얼리 딜러들 사이에선 ‘조심하라’는 연락이 돌았다”고 전했다.

    명품 사기거나 사치거나

    서울 경찰청 외사과에서 압수한 가짜 명품 시계. ‘빈센트앤코’ 사건은 명품의 모조품 생산을 넘어서, 상류층에 가공의 명품과 역사를 날조해 판 희대의 사기극으로 기록될 만하다.

    게다가 이 ‘시흥산 명품’은 고장이 잦았다. 한 시계 구입자의 측근은 “시계를 산 친구가 시곗바늘이 떨어져나가 매장에 가져갔더니 이틀 만에 수리해주었다. 명품 시계는 스위스 등 본사에서 수리를 하기 때문에 최소 3주는 걸리는 것이 상식이다. 좀 이상하다는 말이 입소문으로 퍼졌다”고 전했다.

    또 다른 문제의 G시계의 경우, 인터넷 시계 동호회를 통해 역사를 ‘날조’한 사실이 밝혀졌다. ‘가짜 명품’이라는 여론에 대해 G시계를 수입 판매한 이모 씨는 기자회견을 열어 “180년 역사란 말은 잘못됐지만, 어쨌거나 이태리 장인이 만든 명품이다”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G시계를 판매한 백화점 잡화팀 담당자는 “우리도 조사 중이라 구매자에게 환불은 해주지 않는다”면서, 입점 전에 G의 브랜드 컨셉트나 역사를 검토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G시계 청담동 매장을 운영한 사람은 모 스타 축구선수의 친척이자 재즈 가수로 “이 사장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 나도 황당하다”는 말을 직원에게 남긴 채 매장 문을 잠그고 출근하지 않는 상태다. 그녀의 홈페이지엔 G시계를 산 유명 연예인들의 사진이 아직 남아 있어서, ‘빈센트앤코’와 마찬가지로 스타마케팅에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시계 자체에 대해 불만을 터뜨린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빈센트앤코’의 화보 촬영을 진행한 한 패션지 사진기자는 “시계 자체는 멋져 보였다. 가격도 모른 채 업체에서 ‘억대’ 시계라고 해서 장갑을 낀 채 보물 다루듯 촬영했다”고 말했다. ‘가짜는 카메라를 못 속인다’고 하지만, 이 경우에는 카메라가 속아 넘어갔다.

    명품도 하청 시스템으로 대량생산

    실제로 ‘빈센트앤코’는 9000만원대 시계에 진짜 다이아몬드와 악어가죽 스트랩을 이용했다. 원가만 무려 300만원이었다고 한다. 반면 1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진짜 명품 시계 중에는 수십만~100만원대 제품도 적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은 ‘빈센트앤코’를 가짜라고 하고, ‘5년 역사를 180년 역사라고 말했을 뿐’이라는 G 브랜드의 설득에도 환불을 요구하고 있다. 명품은 가격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품질도 문제 되지 않는다. 현재 시계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컴플리케이션 워치’(이와 대비되는 것이 ‘주얼리 워치’)의 경우 실생활에서 거의 쓸모없는 레귤레이터, 문페이즈 등의 기계 메커니즘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천문학적인 가격이 붙는다. 스위스의 장인이 손으로 톱니바퀴를 깎았든, 중국에서 선반으로 찍었든 오늘날 소비자에겐 별 차이가 없다.

    결국 명품을 이루는 것은 이미지와 시간의 덩어리, 즉 오랜 역사라는 얘기다. 명품은 디자인과 기술 혁신의 역사, 경쟁자들의 추격과 대량생산의 위기를 넘기면서 사용자의 삶을 통해 만들어진다. 여기에 예술적 안목을 갖춘 명사들의 추천이 더해져 시계나 구두는 효용 가치를 넘어선 ‘무엇’이 된다. 시계는 이제 ‘바쉐론 콘스탄틴’이거나 ‘스와치’다. 비쌀수록 가치가 커진다는 ‘베블런 효과’도 작용한다.

    명품 사기거나 사치거나

    서울 청담동 명품 골목에 위치한 G부티크. G는 180년 역사를 가진 명품으로 홍보됐지만, 런칭 5년밖에 안 된 시계였다.

    그러나 현대는 ‘약간의 사기성을 띤 기업들이 고가품 시장으로 올라가고, 기존의 고가품은 보통 사람들을 향하여 내려오는’ 시대다.(제임스 B. 트위첼, ‘럭셔리 신드롬’) 오늘날 절대다수의 ‘명품’은 대량생산과 하청 시스템으로 만들어진다. 100년 넘는 역사의 유럽 패션하우스들은 30, 40대 젊은 디자이너들을 영입해 봄가을로 정신없이 유행을 만들어낸다. 이 때문에 오늘날 ‘명품’이란 장인적 가치를 지닌 불변의 수제품이라기보다는 전통을 자랑하는 브랜드의 로고를 박고 유행을 선도하는 ‘사치품(luxury goods)’이다.

    명품과 사치품의 혼동과 맹목적 선호는 세계적인 현상이다. 그렇지 않다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류의 소설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될 리 없고, 서구에서 ‘부자중독증(affluenza)’이나 ‘사치열병(luxury fever)’ 같은 단어들이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본의 에세이스트 나카무라 우사기는 이를 일본의 청담동 격인 ‘아자부의 풍토병’이라고 규정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명품으로 사기 치기도 쉬워졌다. 특히 서구 문화에 익숙하지 않으면서 현대화를 통해 ‘선망’만 키운 아시아의 소비자들이 주된 공략 대상이다. 명품 마케팅, 즉 사치와 사기 마케팅에서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은 대중스타를 활용하는 것이다.

    감히 별들을 어떻게 모으냐고? 홍보기획사와 계약을 맺으면 된다. 런칭 한 달 홍보에 350만~500만원 정도 든다. 한 홍보기획사 대표는 “제품이 비싸면 비쌀수록, 명품이면 명품일수록 홍보사 이력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홍보비는 오히려 내려가는 역설이 발생한다”고 말했다. 대표 등의 이력에 대해서는 “미국에서 왔다”고 하면 100% 통과다.

    보통 사람들도 명품 사기 희생자

    ‘빈센트앤코’의 이모 대표도 청담동에서 ‘미국 유학 동기들’과 영어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자주 연출했지만, 그가 어느 대학 출신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현실 세계에서 ‘패션 7080’ ‘명품남녀’ ‘사모님’ 같은 개그 프로그램보다 더 리얼한 개그가 펼쳐진 셈이다.

    “전에는 연예인을 런칭 파티에 부를 때 100만원 정도의 상품을 주면 됐는데, 요즘에는 보통 300만~500만원 정도다. 연예인 매니저에게는 스케줄을 만들어달라며 30만~50만원 정도의 상품권을 선물하는 게 관행이다. 탤런트 K, B, L, H 등이 행사에 적극 참석하며, 효과도 큰 연예인으로 꼽힌다. 스타들이 구입하겠다면 20~25% 정도 할인해준다.”(홍보대행사 직원)

    브랜드 런칭 파티엔 5000만원에서 3억원 정도의 돈이 들지만 일단 지명도를 높이면 외상도 쉽고, 친구도 많아지며, 투자자도 모인다. 이들은 어느 날 자신이 사기당했음을 깨닫지만, 그땐 이미 법에 호소하기도 어렵다. 개인이 타인의 사기 행각을 법적으로 증명하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때쯤이면 사기꾼은 고위층과 막역하게 노는 ‘명사’가 돼 있어서 여기저기에 손도 써놓는다.

    2004년 교포 출신의 명품 모시 디자이너로 언론에 이름을 알린 뒤 서울 성북동에 호화 부티크를 내고 스타 마케팅을 악용했던 민모 씨가 전형적인 예다. 그녀는 투자자를 상대로 한 사기 및 횡령 등의 혐의가 인정되자 곧바로 도주, 현재 수배 중이다. 당시 홍보대행을 했던 S 씨는 “한 공영 TV 프로그램이 민 씨를 세계 패션업계에서 성공한 대단한 한국인으로 소개했고, 정·재계 인사들과 연예인들이 민 씨와 어울렸기 때문에 그녀의 말을 모두 믿었다. 런칭 무렵 사기라는 확신이 생겨 뒤늦게 검찰에 진정서까지 냈지만, 오히려 무고죄로 고소하겠다는 협박을 당했다”고 말했다.

    명품 사기의 희생자는 안목 없는 소수의 졸부들뿐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도 ‘부자중독증’에 전염돼 명품 브랜드의 립스틱 한 개, 슈트 한 벌이라도 구입하려고 한다. 청소년들은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작은 명품 로고를 소유하려고 든다(최근엔 ‘로고’만 수를 놓아주는 브랜드들도 있다!).

    오랫동안 한국의 사치품 업계에서 일해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빈센트앤코’가 마지막이 아닐 것”이라고 말하면서 요즘 “언론 매체에 자주 노출되는 몇몇 브랜드들이 이미 거론되고 있다”고도 했다. 초고가 시계 브랜드를 국내에 런칭한 마케팅 관계자는 “한동안 타격이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잘된 일”이라고 말했다.

    “국내에 수입되는 수십 개의 초고가 시계 브랜드는 불과 1000명의 고객을 상대로 치열한 경쟁을 벌입니다. ‘사소한 명품의 차이’를 아는 사람들이 사고 또 산다는 겁니다. 이 사건으로 명품의 가치는 가격이 아니라 안목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않을까요?”

    모두가 노동자는 아니지만, 모두 소비자로 살아간다. “살아가면서 무엇을 이루는가보다 무엇을 소비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됐다”는 작가 마르셀 뒤샹의 말이 우리의 현실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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