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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삶|‘버마행동’ 대표 뚜라

한국서 키우는 버마 민주화의 꿈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한국서 키우는 버마 민주화의 꿈

한국서 키우는 버마 민주화의 꿈
8월8일 전 세계에 뉴스를 배급하는 통신사들은 1988년 8월8일 미얀마에서 벌어진 대규모 민주화 시위 18주년을 맞아 세계 각지에서 ‘미얀마 민주화 촉구 시위’가 열렸다는 소식을 타전했다. 아웅산 수치의 초상화를 앞세운 시위에는 한국에서 열린 ‘8888 버마민중항쟁 18주년-버마 인권주간’ 행사도 포함돼 있었다.

한국에서 버마 인권주간 행사를 주도한 단체는 버마인 이주노동자들이 만든 ‘버마행동’이다. 그늘에 서 있기도 어려운 폭염 속에서 이들은 비 오듯 흐르는 땀을 씻으며 서울 여의도에서부터 인사동까지 ‘버마 민주화 촉구 자전거 캠페인’을 벌였고, 매일 오후 인사동에서 ‘잊혀진 얼굴, 폭력의 그 현장’이라는 거리 사진전을 열었다.

사진전이 열린 인사동에서 만나기로 한 ‘버마행동’ 대표 뚜라(35) 씨는 약속 시간보다 좀 늦게 나왔다. 훌쩍 큰 키에 커다란 눈을 가진 그의 얼굴에서 땀방울과 미안함이 쏟아졌다.

“정말 죄송합니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일이 생각보다 오래 끌었어요.”

인권 탄압 등 고국 소식 알리고 이주노동자들 위한 방송 활동



유창하게 한국말을 하는 그는 한국의 이주노동자들 사이에서 ‘인기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은 RTV의 ‘이주노동자 다국어뉴스’와 ‘이주노동자 세상’을 진행하는 ‘방송인’이기도 하다. 버마, 필리핀, 태국 등 이주노동자들이 직접 제작하는 이 프로그램은 “이주노동자들로 하여금 자기가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인지를 알게 해준다”고 한다.

“‘버마 인권주간’을 맞아 버마-태국 국경 활동가(버마 국민 20만명이 각종 탄압을 피해 버마와 태국 국경지대에 ‘난민촌’을 형성하고 있다)를 초청해 강연을 하기로 했는데, 한국 대사관에서 비자를 내주지 않아 애를 먹었습니다. 방금 비자가 나온 것을 확인하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불과 며칠밖에 머물 수 없지만, 시간 맞춰 비자가 나와서 다행입니다.”

늦은 이유를 듣고 나니, 오히려 휴대전화로 재촉한 것이 미안해진다.

뚜라 씨가 인사동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버마에서 벌어진 ‘8888 버마민중항쟁’과 당시 희생된 사람들(최소 2000~2만명)에 대한 자료집을 나눠주지만, 사람들은 “버마? 아웅산 수치? 어디서 들어보긴 했는데…”라는 반응이다. 군사독재 정부가 1989년 버마의 국호를 미얀마로 바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아시아 민주주의의 상징인 아웅산 수치 여사가 여전히 테러의 위협 속에서도 비폭력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뜨거운 태양과 냉담한 한국인 사이에서 뚜라 씨는 ‘미얀마가 아니라 버마’를 알리기 위해 외롭게 싸우고 있었다.

“이 정도면 많이 달라졌어요. 버마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버마의 민주화를 지지하는 한국 단체들도 많이 늘어났습니다. ‘버마행동’을 만든 2003년엔 아무도 없었거든요.”

한국서 키우는 버마 민주화의 꿈

돈도 인력도 충분치 않은 ‘버마행동’은 버마의 실상을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자전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이렇게 오래 한국에서 살게 될지 몰랐다”는 뚜라 씨가 한국에 첫발을 내딛은 건 1994년. 다른 이주노동자처럼 산업연수생 자격으로 왔다. 버마에서 아웅산전문학교를 졸업한 뚜라 씨는 전공인 기계조립 기술을 더 배우고 싶어 유학을 결심했다. 처음에는 미국으로 가려고 했지만 유학 비용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또 한 가지, 당시 국민들의 거센 민주화 요구 앞에서 미얀마 정부는 아웅산 수치 여사를 상대로 대화 제스처를 취했다. 뚜라 씨를 비롯한 많은 학생운동가들은 곧 민주화를 위한 진전이 이뤄질 것이라 믿었다. 뚜라 씨는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막연한 생각만 들었고, 결국 외국에서의 경험이 매우 유용할 것이라고 판단해 한국행을 결심했다.

그러나 한국의 산업연수생이란 현대판 노예와 다르지 않았다. 그가 일한 공장의 한국인 사장들은 “돈 없어 못 준다”는 말로 임금을 떼먹었다. 더구나 곧 민주화될 것 같았던 고국의 정치 상황은 더 나빠졌다. 뚜라 씨가 다닌 모교는 폐교됐고, 2003년에는 야당 지도자를 상대로 한 테러가 발생해 70명이 사망하는 ‘디페인 학살 사건’이 벌어졌다.

그가 열심히 한국어를 배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너무 억울하고 말하고 싶은 것이 많아서”였다고 한다. 당시 이주노동자들은 저개발 국가에서 온 값싼 임금의 신기한 외국인이었을 뿐,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한국인이나 국제단체도 없었다.

94년 산업연수생으로 첫발 … 현재 난민신청 중

“이주노동자의 상황을 제대로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한국 언론에서 간혹 이주노동자들의 딱한 삶을 다루긴 해도 동등하다기보다 ‘우리보다 낮은 수준의 사람들 문제’란 전제가 깔려 있더군요. 우리는 개그 소재로 전락한 ‘블랑카’가 싫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눈물거리’로 그리는 것도 싫습니다. 물론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효과는 있지만, 우리의 삶이 그렇게 한 가지 측면으로만 그려져선 안 됩니다.”

실제로 이주노동자들은 공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뚜라 씨처럼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하기도 하고, 뚜라 씨 친구 미누 씨처럼 보컬 그룹을 하거나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도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이미 한국의 한 ‘부분’이 돼 있다.

현재 뚜라 씨의 신분은 미등록 이주노동자, 즉 ‘불법체류자’다. 2005년 5월에 한국 정부에 난민 신청을 내고 몇 차례 츨입국 관리소에 연락을 했지만 한 번도 실질적인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한다.

“난민 신청을 낸 건 한국에서 살고 싶기 때문이 아닙니다. 난민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버마가 민주화되기 전엔 고국에 갈 수 없습니다. 가족들과 내 젊은 시절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거죠. 버마인 중 누구보다 한국 사회를 잘 아는 우리가 한국에서 이주노동자와 버마 민주화를 위한 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한국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처럼 전 세계의 버마인들이 네트워크를 이뤄 민주화를 요구한다면 우리의 꿈은 실현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난민 신청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뚜라 씨는 휴대전화와 은행계좌를 가질 수 없고, TV 시청도 할 수 없다. 한국에서 그는 유령과 같은 존재다. 그가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TV도 보는 건 그를 돕는 여러 친구들 덕분이다.

“현재 한국에는 버마 이주노동자가 70여 명 있습니다. 그들이 공장에 다니며 받은 월급을 모아 ‘버마행동’을 지원하죠. 제가 ‘버마행동’의 대표로 이렇게 활동할 수 있는 건 모두 그들의 피와 땀 덕분입니다. 정말로 큰 책임을 느낍니다.”

1992년 우리나라는 ‘난민협약’에 가입했지만, 심판이 나기까지는 보통 4~5년이 걸린다고 한다. 미얀마인도, 한국인도 아닌 ‘사라진 버마인’으로서 뚜라 씨의 삶이 얼마나 길어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만의 하나, 난민 신청이 거부돼 미얀마로 돌아간다면 그는 죽음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다.

“8월8일 버마에서 2000명의 민주화 운동가들이 모여 18년 전에 희생된 버마 국민들을 애도하는 추도식을 올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버마의 미래를 낙관합니다. 한국 정부가 버마를 가스개발 광구로만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국인들이 이웃 나라에 가서 돈만 벌어오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부탁합니다.”

뚜라 씨의 조국 버마는 지금 우리의 과거와 참 많이 닮아 있다. 한국에 대한 뚜라 씨의 인식에는 같은 경험을 한, 아시아의 이웃이라는 기대가 담겨 있다. 어쩌면 버마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아시아의 미래는 아닐까. 적어도 여기서 아시아의 평화에 기여하는 길은 찾게 될 것이라고, 뚜라 씨는 말한다.



주간동아 549호 (p60~61)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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