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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인물, 조선의 책|퇴계 이황과 ‘朱子大全’

책과 씨름하며 성리학 파고들기

벼슬도 버리고 연구에 몰두 … 조선의 학문 기틀 다졌지만 ‘사상의 편협성’ 초래

  •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책과 씨름하며 성리학 파고들기

책과 씨름하며 성리학 파고들기

퇴계 이황의 초상화.

나는 1000원권 지폐 앞면에 실린 이황(李滉)에게 존경의 염을 느끼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자면 퇴계(退溪)보다는 그를 화폐에 안치한 국가주의가 싫다. 한데 그 국가주의를 걷어낸다 해도 퇴계는 여전히 별로다. 퇴계가 생각했던 이상적 인간과 사회가 나의 세계관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퇴계가 민족의 스승일지는 몰라도 나의 스승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나의 호오(好惡)와 관계없이 퇴계는 중요한 인물이다. 조선의 학문사에서 퇴계는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성리학은 주자학(朱子學)이라고 한다. 주자에 의해서 성(性)과 리(理)를 논하는 장대한 학문체계가 완성됐기에 성리학은 곧 주자학이다. 주자 없는 성리학이란 바울 없는 기독교와 같다. 한데 바울과 달리 주자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직접 쓴 글과 책, 주해를 가한 책, 편집한 책 등 그의 손길이 닿은 저작물은 실로 엄청나다. 2002년 중국 상하이고적출판사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 27책을 간행했는데, 2만 쪽을 훨씬 웃도는 분량이다. 이처럼 거창 무비한 주자의 저작인 만큼 조선에 한꺼번에 수입될 수가 없었고, 200~300년에 걸쳐 조금씩 천천히 수입됐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고려 후반인 1300년경 성리학이 전래됐고, 성리학을 국가 이데올로기로 삼아 1392년 조선이 건국된 것으로 알고 있다. 또 성리학 전래로부터 약 100년 이후 성리학에 입각해 조선이 건국됐으니, 건국 당시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건 오해다. 1300년경에서 1392년까지 전래된 성리학 서적은 ‘사서집주(四書集註)’ ‘근사록(近思錄)’ ‘주자가례(朱子家禮)’ 등 몇 종에 지나지 않았고, 그 이해의 수준도 낮았다.

퇴계 이전까지는 성리학에 대한 이해 낮아

책과 씨름하며 성리학 파고들기

경북 안동시 도산면에 있는 도산서원. 도산서원은 1574년 퇴계 이황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제자들과 유림이 건립했다.

세종 때 ‘성리대전(性理大全)’이 전해졌지만, 그것만으로는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여전히 불가능했다. 더욱 깊은 이해는 주자학의 사상체계가 성립하는 과정을 이해해야 가능할 것이었다. 그렇다면 ‘사서집주’와 같은 완결된 체계의 독립 저작이 아닌, 그 완결된 체계가 성립되는 과정을 알려주는 텍스트가 있어야 할 것이다. 무엇인가? 곧 주자의 문집(文集)이다. 주자의 문집은 성리학과 함께 수입된 것으로 알기 쉽지만 이 또한 아니다. 주자의 문집에 관한 기록은 세종 때에 가서 겨우 나타날 정도다.



‘세종실록’ 11년 5월29일조를 보면 각 도의 감사에게 왕명이 내려졌음을 알 수 있다. 민간에서 ‘국어(國語)’ 등 7종의 책을 찾아 바치라 했는데, 여기에 ‘주문공집(朱文公集)’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6월27일 안동 사람 윤기(尹山己)가 ‘주문공집’ 32권을 바친다. 그 뒤 ‘실록’ 등의 자료에서 주자의 문집은 이 ‘주문공집’ 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성종 7년 5월 정효상(鄭孝常), 박양신(朴良信)이 중국에서 돌아와 근래에 중국에서 간행된 것이라며 ‘주자대전’ 20권을 바친다. 명대에 새로 간행한 주자의 문집 ‘주자대전’을 구입했던 것인데, 국가 도서관인 홍문관에 소장되고 민간에는 유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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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이 학업을 닦고 제자를 가르치던 경북 영주시의 소수서원.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될수록 주자의 여타 저작에 대한 필요성도 커졌다. 개인적으로 중국에서 수입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수요를 채울 수 없었다. 국내에서 인쇄하지 않는 한 이 책은 보급될 가능성이 없었던 것이다. 주자의 저작은 중종 때 사림들이 정계에 진출한 이후 인쇄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중종 10년 11월4일 홍문관 부제학 김근사(金謹思)는 ‘주문공집’을 위시한 성리학 관계 서적을 광범위하게 인쇄할 것을 청해 중종의 허락을 얻는다. 하지만 결과는 미상이다. 이어 사림정권의 한 축이었던 김안국(金安國)이 중종 13년 베이징에서 돌아오면서 ‘주자대전’과 ‘주자어류(朱子語類)’,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등 방대한 양의 성리학 서적을 구입해 돌아왔고, 중종에게 이 책들의 인쇄를 허락해줄 것을 청한다. 하지만 그 이듬해는 기묘년이었다. 기묘사화로 사림들이 실각하자, 책의 간행은 없던 일이 됐다.

주자의 편지 추려 ‘주자서절요’ 엮기도

김안국은 기묘사화가 일어난 지 18년 후인 1537년 정계로 돌아온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교서관(校書館) 제조(提調)가 되자 자신이 염원했던 책들을 인출해 유포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그 책이름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현전하는 ‘주자대전’ 판본 중 가장 연대가 앞선 것이 중종 38년(1543)본인데, 김안국이 인쇄를 주관했던 책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주자대전’은 본문 100권, 속집 12권, 별집 10권으로 도합 95책의 막대한 분량이었다.

퇴계는 1543년 10월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됐으나 곧 휴가를 청해 고향으로 돌아간다. 11월에 또 예빈시 부정(副正)에 임명됐으나 역시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뒷날 그는 남명 조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이 벼슬을 하게 된 것은 ‘집안이 가난하고 어버이께서 연로하였기(家貧親老)’ 때문이었으며, 1543년부터는 벼슬을 하려는 마음이 없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퇴계는 1543년 이후 여러 번 관직에 임명됐으나, 늘 오래 머물지 않고 귀향했다. 나는 1543년 퇴계의 은퇴 결심이 그해 간행된 ‘주자대전’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퇴계집’에 ‘주자서절요서(朱子書節要序)’란 글이 있다. 퇴계가 주자의 편지를 추려 ‘주자서절요’를 엮고 그 앞에 붙인 서문이다. 이 서문에서 그는 마흔셋의 나이에 ‘주자대전’과 만났던 것을 인상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에 따르면 ‘주자대전’은 동방에 거의 없고, 있어도 겨우 있는 것으로, 본 사람 역시 아주 드문 책이었다(此書之行於東方, 絶無而僅有, 故士之得見者蓋寡). 그 역시 이 해에 비로소 ‘주자대전’이란 책이 있는 줄 알았던 것이니, ‘주자학자’ 이황도 43세 이전에는 ‘주자대전’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다. 그는 또 ‘주자대전’을 입수하고도 이 책이 어떤 책인 줄 몰랐다고 말하고 있다. 왜일까? 95책이나 되는 ‘주자대전’의 내용을 짧은 시간에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자대전’의 복잡하고 미묘한 내용을 이해하면서 읽어낸다는 것은 엄청난 지적·육체적 노동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학자 퇴계 앞에 일생일대의 과제가 던져진 것이다. 퇴계는 병을 핑계 삼아 고향 ‘퇴계’로 돌아와 문을 닫고 조용히 앉아 ‘주자대전’을 읽어나갔다. 그는 마침내 “점차 그 말에 맛이 있음과 그 뜻의 무궁함을 깨닫게 됐고 특히 서찰에 대해 느낀 바가 있었다(自是漸覺其言之有味, 其義之無窮, 而於書札也尤有所感焉)”고 말한다.

이 시기에 불교는 이단으로 취급, 축출돼 있었다. 그렇다면 세계와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해석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성리학이 이미 존재했지만, 주자의 몇몇 저술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했다. 특히 퇴계는 불교와 성리학의 차이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사서집주’ ‘주자가례’ ‘근사록’을 낳게 한 그 사유의 과정과 더욱 상세한 설명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제 성리학의 집대성자 주자의 전집 ‘주자대전’이 그의 눈앞에 놓였다. 동아시아의 한 귀퉁이에 살던 지식인 퇴계는 주자의 언설과, 주자란 항성 주위에 몰려든 수많은 인간과 그들의 학문적 담론이 이루어내는 장엄한 세계를 처음 경험했고, 거기서 자신의 의문을 풀 수 있었던 것이다.

책과 씨름하며 성리학 파고들기

이황이 제자 송암 권호문에게 글씨체본으로 써준 ‘퇴도선생필법(退陶先生筆法·왼쪽)과 주자대전.

퇴계는 특히 주자의 편지에 주목했다. 편지는 ‘주자대전’ 100권 중 48권이니 거의 절반에 해당하고 내용은 곧 논문에 가깝다. 퇴계는 ‘주자서절요서’에서 ‘주자대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 대개 전집 전체를 두고 말한다면, 전집은 대지와 같고 바다와 같다. 없는 것이 없지만 그 요령을 얻기 어렵다. 서찰의 경우 사람들의 타고난 자질의 높고 낮음과 학문의 얕고 깊음을 따라, 증세를 살펴 약을 쓰고 사물의 성질을 보고 풀무질과 망치질을 베풀 듯, 혹은 누르기도 하고 혹은 드날려주기도 하고, 혹은 인도하기도 하고 혹은 구제해주기도 하고, 혹은 격려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혹은 물리쳐 깨우쳐주기도 하였다. 마음의 은밀하고 미묘한 틈에서 작은 악조차 용납하지 않았고, 의리를 궁구할 즈음에는 먼저 털끝 같은 차이도 환히 살피었다. …그러므로 남들에게 일러줄 때면 능히 사람들이 감발(感發)하여 흥기(興起)하게 만들었다. 단지 당시 직접 배운 문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100세 뒤라 할지라도 그 가르침을 듣는다면, 귀를 당겨 듣고 그 앞에서 직접 말씀을 듣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

주자와 그 사우(師友) 간의 편지는 당시의 성리학이란 관념적 학문체계 속에서 제기될 수 있는 수많은 의문과 그에 대한 답이었다. 그것은 달리 말해 성리학을 진리로 알고 있는 조선의 지식인들이 자신의 학문행위 속에서 제기할 수 있는 의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퇴계는 주자의 편지를 주자와 그 문인 사이의 것만으로 한정하지 않고, 주자와 수백 년 뒤 조선 지식인들과의 대화로 본 것이다. 그러나 이 편지는 너무나 방대하다. 중복되는 것도 있고, 꼭 볼 필요가 없는 것도 있다. 그래서 그는 학문에 절실한 것만을 추려 14권 7책으로 줄인다. 주자의 저작은 주자 당시 송대 지식인에 대한, 그리고 송대 역사에 대한 지식을 필요로 했다. 이 작업을 최초로 정밀하게 수행한 사람이 바로 퇴계였던 것이다.

‘주자서절요’의 서문은 1558년 4월 쓰여졌지만, 1561년 성주(星州)에서 20권 10책으로 처음 간행됐다. 이후 1572년 정주(定州), 1611년 전주(全州)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널리 간행됐고 이 책은 주자학으로 들어가는 가장 보편적인 문이 됐다.

퇴계 이후 주자 관련 서적 쏟아져

‘주자서절요’는 하나의 신호탄이었다. 이후 조선의 학문은 거칠게 말해 ‘주자대전’을 읽고 이해하고 가공하는 것이었다. 퇴계의 제자 이덕홍(李德弘)의 ‘주자서절요강록(朱子書節要講錄)’, 조익(趙翼)의 ‘주서요류(朱書要類)’, 정경세(鄭經世)의 ‘주문작해(朱文酌海)’, 이재(李栽)의 ‘주서강록간보(朱書講錄刊補)’, 박세채(朴世采)의 ‘주자대전습유(朱子大全拾遺)’, 송시열(宋時烈)의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김창협(金昌協)의 ‘주자대전차의문목(朱子大全箚疑問目)’, 정조(正祖)의 ‘주서백선(朱書百選)’ 등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그 외의 유사한 서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장유(張維)는 1632년 ‘계곡만필(谿谷漫筆)’에서 중국에 다양한 학문이 존재하는 데 반해 조선은 오로지 주자학만 안다고 학문의 편협성을 한탄했던 바, 그 편협성의 기원은 1543년에 간행된 ‘주자대전’에 있었다. 요컨대 1543년 ‘주자대전’의 간행과 1561년 퇴계의 ‘주자서절요’의 간행은 주자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했지만, 조선의 지식인들은 ‘주자대전’이라는 마르지 않는 거대한 호수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호수에 갇힌 그들은 다른 사유와 학문을 볼 수 없었다. 나는 1543년 ‘주자대전’의 인쇄와 퇴계의 ‘주자서절요’가 학문적 상상력을 제한하는 재앙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독자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주간동아 2006.06.06 538호 (p88~90)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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