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69

2005.01.18

“궁정동 총소리…그날 진실을 알려주마!”

  • 입력2005-01-13 18: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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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정동 총소리…그날 진실을 알려주마!”

    화제작 ‘그때 그 사람들’을 만든 사람들. 맨 오른쪽이 감독 임상수, 가운데가 주인공 김부장 역을 맡은 백윤식.

    임상수 감독의 머리는 언제나 물들여져 있다. 늦가을 은행잎 같은 황금색부터 메탈 느낌이 나는 회색까지 색깔도 다양하다. 귀고리도 반짝거린다. 눈동자가 잘 보이지 않는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는 그에게서 품위 있고 점잖은 모습은 애당초 찾아보기 어렵다. 그만큼 그의 영화는 도발적이다. ‘내 영화에 관심 좀 가져달라니까’라며 기를 쓰고 외치는 것 같다. 백주 대낮에 들으면 큰일 날 것 같은 처녀들의 걸쭉한 성 담론이 쏟아져나오거나, 본드를 흡입하는 10대 청소년들의 집단 섹스도 화면에 노출된다. 60대 노부인의 혼외정사가 등장하고 이웃집 청소년과 정사를 벌이다 흐느끼는 유부녀의 모습도 보인다. 하나같이 범속한 이야기들이 아니다. 그의 영화들은 개인의 상처를 통해 사회의 환부를 드러낸다.

    임 감독의 네 번째 연출작 ‘그때 그 사람들’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예민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10·26사태(1979)를 소재로 하고 있다. 당사자들이 아직도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고, 현 정치권의 풍향에도 영향을 미칠 사건이기 때문에 그동안 이런 영화를 만든다는 소문도 없었다. 그러나 개봉을 앞두고 영화 내용이 조금씩 흘러나오자 예상대로 ‘사실과 다르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협박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한다. 임 감독은 묻는다. 사실은 무엇인가?

    현재 남아 있는 10·26사태에 대한 기록은 당시 보안사의 수사 기록이 유일하다. 그밖에 재판정에서의 당사자들 증언이 있다. 하지만 25년 전 계엄 치하의 보안사 수사 기록이 진실의 전부일 것이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10·26사태는 분명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바꾼 지각변동의 대사건이었음에도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는 없었다.

    네 번째 도발적 작품 … 개인 상처 통해 사회 환부 노출

    왜 임 감독은 항상 이처럼 문제 있는 소재를 들고 나올까. 감독이 자신의 영화가 시대의 중심 화두로 자리잡기를 원하는 것은 나쁜 게 아니다. 그것은 영화라는 장르를 세상에 대한 발언이라고 믿고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상업적 흥행만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불필요한 욕망이다. 그러나 임상수의 예술가적 욕망은 늘 상업적 욕망과 충돌을 빚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영화는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넘나들고 있다.



    “이런 소재를 다루면 논쟁이 될 것이라는 작전 아래 영화를 기획하지는 않는다. 그런 작전이 아주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작전만 가지고 논쟁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리고 하지 않은 방식으로 찍어야 한다. 대담하게 해야 한다. 그것은 사실 내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에 적용되는 말이다.”

    그는 81학번이다. 광주의 5월로 시작된 80년대, 사화과학 서적이 탐독되고 민중문화가 대학가에 넘쳐나던 시기에 그는 비운동권이었다. 군대 가기 전 2년 동안은 연세대에서 가장 부르주아 서클인 사진반에서 놀았다. 카메라 메고 다니면 다른 학생들이 돌을 던지기도 했다. 군대 갔다 와서 2년 동안은 개인적인 문제로 혼자 외롭게 놀았다. 대학 졸업하고 월급쟁이가 되든가, 외국으로 공부하러 가든가, 충무로 현장에 가든가 결정해야 했다. 그는 영화아카데미 5기로 들어갔다. 박헌수, 박경희 감독과 싸이더스의 노종윤 이사가 동기다.

    “궁정동 총소리…그날 진실을 알려주마!”

    ‘그때 그 사람들’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무진장 코미디’가 될 것이다. 권력을 따라 우왕좌왕하는 남자들의 소극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제작자나 투자자들의 구미를 당기는 소재가 몇 개 있다. 그중 하나가 섹스 이야기다. 그래서 섹스 이야기를 해주마. 다만 그것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고민했다. 그것이 ‘처녀들의 저녁식사’다. 나는 충무로 주류 감독 중 하나다. 자본으로부터 느끼는 압력은 물론 있다. 그러나 내가 대단한 아티스트인데 상업적으로 줄을 타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한다. 촬영장에서 감독은 항상 선택을 해야 한다. 무슨 데이터나 근거가 있는 게 아니다. 작가 멋대로다. 그런 순간마다 외로워지는데, 그때 남의 눈치를 보게 된다. 가깝게는 촬영감독의 눈치를 본다. ‘눈물’ 만들 때는 별로 그런 눈치 안 봤다. ‘바람난 가족’ 때도 특별히 눈치를 보지는 않았지만 내 마음대로 찍었다는 생각은 안 든다. 이번 작품 찍을 때는 ‘떠오르는 영감 그대로 가자’고 생각했다.”

    “2002년 ‘바람난 가족’ 프리 프로덕션할 때, 하얏트 호텔에서 혜화동 가는 차 안에서 명필름의 이은 대표에게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해 처음 이야기했다. 그는 내 말을 15분 동안 듣고 나더니 무조건 자기가 제작하겠다고 했다. 당시 상황은 로버트 알트만의 ‘플레이어’와 똑같다. 작가는 제작자에게 어떤 아이디어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20자로 압축한다. 이 판에서는 다 그렇게 산다. 차에서 내리는데, 진짜 혼자 많이 웃었다. 내가 이 대표에게 이야기한 것이 ‘플레이어’ 속 장면과 너무 똑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뒤 이 대표에게서 전화가 왔다. ‘정말 미안한데, 심재명씨에게 한 번만 더 이야기해달라. 내가 말하니까 감이 잘 안 산다’고 하더라. 그래서 심 대표에게 똑같이 한 번 더 이야기했다.”

    나는 궁금했다. 꼼꼼하기로 소문난 명필름의 두 대표를 그가 어떻게 단 15분 만에 설득했을까?

    “무진장 코미디가 될 것이다. 나는 돈 벌 생각밖에 없다, 그렇게 제작자들에게 사기 쳤다. 그런데 편집 필름을 보고 인물을 희화화한 게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나는 코미디를 찍으려고 생각한 적 없다. 나는 사실적으로 그렸다. 그날 궁정동 연회 참석자는 대통령, 경호실장, 비서실장으로 모두 의젓하게 행동했을 것 같지만, 알려진 것과는 달리 우왕좌왕 모두들 당황하는 코미디였을 것이다.”

    “법적인 문제는 변호사에게 일임했다. 변호사는 ‘감독 마음대로 해라. 결과를 가지고 방어하겠다’고 했다. 나는 변호사에게 도대체 사실이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는 보안사 수사 기록, 사건 당사자들의 증언, 회고록 등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아무도 회고록을 쓰지 않는다. 진실은 무덤까지 안고 가겠다는 태도가 상찬받는다. 나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박정희적 가치관을 장사 지내서 하늘나라로 보내고 싶다. 10·26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단순히 25년 전 벌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2005년 오늘까지 박정희로 상징되는 가치관 등이 여전히 남아서 우리 사회를 괴롭히고 있다. 이미 백골이 된 존재를 꺼내서 모욕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유령처럼 출몰하는 박정희적 가치관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그런 것을 장사 지내려고 한다. 그날 알려진 것은 신문기사나 TV 뉴스에 등장한 박정희의 죽음이다. 이것은 팩트다. 나는 아주 디테일하게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찍었다. 25년이 지난 지금의 대중은 과연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다. 그리고 법적인 문제를 떠나서 유족들이나 사건 관련 생존자들에게는 인간적으로 미안하다. 영화가 어떤 식으로 나오든 다시 한 번 아픈 기억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인물을 어떻게 표현하든 일단 건드린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상처를 준다. 나는 그날 등장하는 개개인을 비난하려 하지 않고,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영화는 2개월 반 동안 총 43회 촬영으로 완료되었다. 김재규 부장 역에 ‘지구를 지켜라’ ‘범죄의 재구성’의 개성 있는 연기로 한국 영화의 한복판에 진입한 백윤식이, 그의 오른팔 박선호 과장을 대신하는 주 과장 역에 한석규가 캐스팅되었다.

    “궁정동 총소리…그날 진실을 알려주마!”
    “백윤식씨를 생각하고 시나리오를 쓰긴 했지만 그 사람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실화에서 소재만 가져오고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했다. 배우들은 실제 인물을 닮으려 하지 않고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연기했다. 궁정동 마당과 본관 내부는 헌팅을 해서 비슷한 장소에서 찍었고, 사건의 중심이 되는 별관 내부는 양수리에 세트를 세우고 찍었다.

    당시 계엄 치하에서 보안사 수사 기록이 검찰 기소장이 되고, 그게 재판기록이 되었다. 사실이라고, 자료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게 전부다. 25년 전의 보안사 수사 기록을 진실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그렇게 중요한 사건인데도 국회 차원에서 조사가 이루어진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러면서 보안사 기록이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게 한국 현대사의 맹점이다. 에필로그에 김 부장이 보안사에 잡혀가서 수사받는 장면이 나온다. ‘불라는 대로 다 불 테니까…’라고. 보안사 수사 기록은 당시 보안사 수사관이 쓴 시나리오다. 아마 내가 쓴 시나리오가 훨씬 더 질이 높을 것이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10월26일 오후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12시간 정도다.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는 궁정동에서 김재규가 체포되는 육본 지하벙커까지다.

    “그날 상황을 내가 다 아는 것처럼 찍었다. 그것은 설득력 있게 찍었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놀았을까? 나는 자문하고 상황을 만들어갔다. 연회 장면에 호기심이 많은데 남자들이 먼저 술 먹고 있었고 여자 두 명이 나중에 허겁지겁 들어온다. 두 여자가 거기에 있었던 것은 팩트다. 심수봉씨가 이 영화를 보면 좋아할 것이다. 박정희가 첫 발을 맞았을 때 모두 다 사라지고 여자 둘만 남았다. 사실 그렇게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가장 의연하고 인간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은 두 여자다.”

    “박선호 과장은 자기가 죽는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대통령의 엽색행각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재판부에서 강력하게 제재했다. 심지어 같은 피고석에 앉아 있던 김재규도 ‘야, 이야기하지 마’라고 소리쳤다. 그런데 박 과장이 변호사에게는 이야기했다. 그것이 외부로 흘러나왔다. 당시 이대 채플에서 김동길씨가 공개적으로 거론했다. 궁정동 만찬에 어떤 연예인이 다녀갔다는 유언비어가 파다했다. 그러나 그 장면을 이 영화에서는 많이 다루고 있지 않다. 살짝 건드리고 있다.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을 것이다. 시비를 거는 순간 자기들이 수렁에 빠질 것이다. 한 작품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수록 좋다. 그런 점에서 대중들이 나의 고상한 의도를 몰라주고 영화를 본 뒤 ‘아니, 쭛쭛. 놈들이 이렇게 놀았단 말이야?’라고 반응해도 할 말은 없다.”

    “이 영화의 제작자인 심재명씨가 나에게 말했다. 10·26을 대담하게 다루어서 사회적 혹은 정치적 파장을 일으키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예술적인 향기를 가지려면 친구를 죽이고 확인사살해야 하는 주 과장의 고뇌를 얼마나 잘 그리는가에 달려 있다고. 물론 정치적·역사적 발언도 한다. 궁정동에서 술 마시고 총 쏘는 장면 찍을 때 박정희가 너무 우아하게 그려지는 게 아닌가라는 지적이 있었다. 나는 박정희 역을 맡은 송재호씨에게 나이스한 젠틀맨으로 연기해달라고 부탁했다.”

    “시비를 걸면 수렁에 빠질 것” … 2월 초 개봉 예정

    “그 당시 나는 경복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학교에서 궁정동 별관까지는 실제 100m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날 학교 가기 전, 누군가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아버지는 한국일보 해직기자(영화평론가 임영)다. 그래서 나는 박정희의 죽음을 다른 학생들보다 먼저 알았다. 학교 가는데 착검한 군인이 단독군장하고 지키고 서 있었다. 미국 방송사 로고가 찍힌 카메라를 든 기자가 군인과 시비가 붙었었다. 며칠 뒤, 학교에서 단체로 문상을 갔다. 그때는 애도하는 척하지 않으면 잡혀갈지 모르는 분위기였다. 박정희의 죽음을 즐거워했던 아버지도 조기를 게양했으니까.”

    “아버지는 자유주의자다. 내가 대학 졸업하고 준정부 기관인 영화진흥공사 산하의 영화아카데미에 진학할 때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데뷔하기 전 백수시절, ‘나도 네가 넥타이를 매고 아침 9시에 출근하지 않는 것은 좋지만, 왜 이렇게 어렵게 사니’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모든 아버지들이 아들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겠지만, 특히 아버지는 내 영화를 별로 안 좋아한다. ‘처녀들의 저녁식사’를 보더니 ‘그냥, 스케치군’이라고 한마디 하셨다. 그러나 이번 영화는 조금 좋아할 것 같다. 처음에는 ‘박정희를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그려서는 안 돼’라고 걱정하셨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쓰고 일본어 대사 번역을 부탁했더니, ‘객관적으로 그렸네, 이 정도면 돼. 재미있어’라고 하셨다. 박정희보다 우리 아버지가 훨씬 더 뒷세대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친구들을 만나면 일본어가 먼저 나온다. 우리가 술 마시면 되지도 않는 영어 쓰려고 하는 것처럼, 그 세대들에게는 일본어가 그렇다. 박정희도 일본 갔을 때 공식 자리에서 통역 없이 일본어를 써 구설에 오른 적이 있다. 영화 속에서 박정희는 결정적인 순간에 일본어로 말한다.”

    “영화를 찍는 것은 작품의 마무리다. 기획하고 시나리오 쓸 때가 그 작품의 시작이다. 찍는다는 것은 이미 기획된 것을 실행하는 기계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항상 다음 작품을 생각할 때가 재미있다. 다음 작품은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다.”

    40억원의 제작비가 들어간 ‘그때 그 사람들’의 러닝타임은 103분이다. 임 감독은 손익분기점을 넘는 300만 이상의 관객을 기대하고 있다. 이 영화는 예정대로라면 2월 초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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