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불새\'
최근 가장 두드러진 건 ‘불새리안’. MBC-TV 미니시리즈 ‘불새’ 속에서 살다시피 하는 ‘왕팬’들을 일컫는 말이다. ‘결사대’도 있다. 역시 MBC 수목드라마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서 따온 ‘결혼하고 싶은 여자부대’다. 그 전엔 SBS ‘발리에서 생긴 일’의 팬들을 일컫는 ‘발리 러버’가 있다. 드라마 폐인의 원조 격으로는 MBC ‘다모’의 ‘다모 폐인’을 꼽는다. 비교적 소수였지만 MBC ‘네 멋대로 해라’의 열성팬들이 남녀 주인공이 자주 만나던 버스정류장을 찾아가 ‘메모지 붙이기’를 감행한 것도 드라마 폐인 증상이라 할 수 있겠다.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
드라마에 모든 것 투자 不狂不及
가장 큰 차이는 TV 시청이라는 수동적 행위를 매우 적극적인 활동으로 바꿔놓았다는 데 있다. 이들은 드라마 홈페이지와 팬 사이트에서 살다시피 하며 울고 웃고 논쟁하는 데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투자한다. ‘폐인’이란 말이 ‘디시인사이드’라는, 디지털로 놀고먹고 사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사이트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생각하면, 드라마 폐인은 그야말로 드라마를 통해 ‘불광불급’하는 종족들이다.
드라마 폐인은 TV에서 방송되는 드라마를 텍스트 삼아 드라마 팬 사이트에 명대사, 명장면을 옮기는 건 기본이고 편집과 패러디를 하기도 한다. ‘불새’에서 미란(정혜영 분)은 악의 화신이지만, 미란의 대사를 중심으로 편집해보면 냉정한 남자에게 모든 것을 건 가련한 여자일 뿐이다.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깨고 등장인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는 것이다. 또 ‘대장금’을 패러디해 드라마만큼 유명해진 ‘월간 궁녀’도 있다.
드라마 폐인의 원조 ‘다모’
‘다모’의 정형수 작가는 “원고지 3000장 분량의 팬픽을 몇 편 받았다. 수준도 놀랄 만큼 뛰어났다. ‘다모’는 하나의 동기일 뿐이고 전혀 다른 이야기가 풀려나온다. 내가 ‘다모’의 모티브를 방학기씨의 만화에서 가져왔듯, ‘다모’가 또 다른 창작물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현상”이라고 말한다. ‘다모’를 연출한 이재규 PD는 ‘다모’의 팬이 쓴 팬픽 ‘나비’를 베스트극장에서 드라마화하기도 했다.
‘불새’ 역시 하이틴들의 로맨스 팬터지 소설 할리퀸 문고에서 원안을 따온 것이며, 작가 난나씨는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 공감해 웹진 ‘컬티즌’에 만화 ‘독신도 벼슬이다’를 6월 중순부터 연재하기로 했다.
드라마 '결혼하고 싶은 여자'
‘불새’와 ‘결혼하고 싶은 여자’ 역시 배타적이라 할 만큼 소구층이 명확한 드라마다. ‘불새리안’은 대개 10대와 20대 초반 트렌디한 여성 시청자들이며 ‘결사대’는 2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의, 일과 결혼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고 있는 여성 시청자들이다. 말하자면 자기들끼리의 대화다.
재미있는 것은 ‘다모’ 폐인들이 ‘불새리안’과 ‘결혼하고 싶은 여자’로 분화되는 현상을 보인다는 점이다. ‘다모’를 통해 이서진, 하지원, 김민준이라는 스타를 발견한 폐인들은 각각이 주인공을 맡은 드라마 ‘불새’, ‘발리에서 생긴 일’, ‘폭풍 속으로’로 흘러다닌다. ‘불새 밀어주기 운동’ 같은 건 이들의 힘이다.
8등신 모델 등장하는 패션잡지
시청률 50%를 넘긴 MBC 드라마 ‘대장금’
이들은 스타들이 보여주는 유행에 매우 민감하다. 주인공의 옷, 헤어스타일, 자동차, 공간, 음식, 배경음악이 감각을 만족시키지 않으면 드라마를 외면한다. 한 드라마 사이트 관리자는 “젊은 드라마 시청자들은 사랑도 다각관계를 좋아하고, 소위 ‘후카시’ 잡는 캐릭터를 좋아한다. 이들에게 드라마는 8등신 모델들이 등장하는 패션잡지와 같다”고 말한다.
‘결혼하고 싶은 여자’로 넘어온 폐인들은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공감하는 경우가 많다. 방송기자라는 힘든 직업에 실연, 그리고 두 남자의 저울질을 겪는 신영(명세빈 분), 성격은 좋지만 소녀가장이라 애인 구하기도 어려운 순애(이태란 분), 돈과 연애에 인생을 걸어 마음 편한 승리(변정수 분) 등 30대 초반의 싱글 세 명이 일과 연애에서 겪는 고군분투가 드라마의 내용이다. 그래서 팬 사이트엔 종종 싱글족들의 토론이 벌어진다.
드라마 ‘다모’를 소재로 한 패러디 ‘다모폐인일보’
흥미로운 사실은 드라마 폐인들이 적극적이고 자발적이지만 방송사에서는 이들을 철저한 데이터로 관리하고 있다는 것. 드라마 인기몰이에 막대한 영향을 주는 데다 이들이 주인공들의 명대사, 명장면을 보기 위해 ‘다시보기’를 하면서 내는 돈이 방송사에 적잖은 수입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이들 드라마는 ‘이벤트형 드라마’로 불리기도 한다.
더 큰 수익은 주인공들이 입는 옷, 만나는 장소인 찻집, 그들의 외제차에서 나온다. 왜 드라마의 연인들이 그토록 자주 목걸이를 선물하겠는가. 스폰서가 있기 때문이다. 한 드라마 PD는 “협찬을 받아 제작비 상당 부분을 충당하기 때문에 목걸이를 ‘인연’의 계기로 넣고 각도도 잘 나오게 찍어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한 드라마 사이트에 열성팬들이 만들어 올린 ‘창작품’들.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오리지널 판이라 할 수 있는 ‘섹스 앤 더 시티’는 시들하던 ‘펜디’라는 브랜드를 전 세계적인 핫 트렌드로 띄워놓았다. ‘섹스 앤 더 시티’가 ‘문화’가 된 순간부터, 사람들은 영화배우 아무개와 똑같은 펜디 백을 샀다고 말하는 것은 부끄러워하지만 ‘섹스 앤 더 시티’의 펜디 백을 사는 것은 자랑스러워한다.
삼성경제연구소의 고정민 팀장은 “드라마 폐인은 전형적인 ‘파드(fad·일시적 유행) 현상’으로 분위기에 잘 휩쓸리는 20대 초반 소비자들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산업적으로도 주목할 만하다”고 말한다.
드라마 폐인은 “인터넷의 쌍방향성에서 태어난 새로운 트렌드”(문화비평가 박동범) 임이 틀림없으나 한편으로 매우 수동적인 소비 시스템의 궤도로 흐를 위험성을 갖고 있다. 그것이 대중문화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