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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연애할까요?”

뜨거워봤자 석 달 연애는 식은 통닭이야

영화의 창으로 본 연애 방정식 … “오래 사랑하려면 목매지 말고 편안하게”

  • 김현정/ 씨네21 기자 parady76@freechal.com

뜨거워봤자 석 달 연애는 식은 통닭이야

뜨거워봤자 석 달 연애는 식은 통닭이야

30대 싱글들의 쿨한 사랑법을 보여주는 드라마 ‘섹스 & 시티’

30대 중반에 이른 어느 선배는 연애를 통닭에 비유하곤 했다. “뜨거운 건 길어야 석 달? 그러고 나면 버리지도 못하는 쓰레기가 되는 거야. 알잖아, 식어버린 통닭이 얼마나 맛없는지.”

참 냉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후배들이 시간을 아끼기 바라는 자상한 마음에서 그런 말을 했을 뿐이다. 값싼 기름이 엉겨서 도저히 먹을 수 없는 통닭은 쓰레기봉투에 구겨넣어야 하는 거라고. 너희는 그래도 될 만큼 풍요롭게 자란 세대가 아니냐고.

맛없어진 사랑은 먼저 폼 나게 버리는 게 좋아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은 필터로 한 번 거른 듯, 그 선배보다는 부드러운 어조로 차가운 통닭을 버리라고 가르쳐준 영화였다. 디자이너로 일하는 신아는 우연히 만난 남자 동기와 한낮 뜨거운 정사를 벌인다. 낯선 이와의 섹스, 그 다음에야 찾아온 사랑. 이미 서로의 몸을 탐색한 두 사람은 곧바로 동거를 시작하고, 초콜릿을 몸에 발라 핥아먹거나 고속버스 안에서 아슬아슬하게 벌이는 섹스에 빠져든다. 그러나 사랑은 쉽게 상하는 것이기도 했다. 더 많이 사랑했던 신아는 유효기간이 끝난 사랑 앞에서 머뭇거리기보다 차라리 혼자 남는 쪽을 택한다. 씩씩하게 웃는 신아의 얼굴 뒤로,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은 두 사람의 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것 같았던 동기가 처량하게 비 맞으며 외로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차피 끝날 거라면, 만남보다는 이별의 방식이 중요한 게 아닐까. 한 번이라도 연애를 해본 사람이라면 영원 따위는 믿지 않게 마련이다.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은 맛없어진 사랑은 먼저 폼 나게 버리는 편이 낫다는 사실을 씁쓸하게 일깨우고 있었다.



이 영화를 만든 봉만대 감독은 인터뷰 도중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함께 사는 여자친구와 뜨거운 사랑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미지근하게 오래오래 가자고 말하고, 그녀도 그걸 받아들인다.”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에 후일담이 있다면 그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일본 격언은 ‘복수는 차가울 때 먹어야 맛있는 음식과도 같다’고 가르쳤지만, 연애는 식기 전에 잽싸게 갖다버려야 하는 음식과도 같다. 그러나 미지근하다면, 편하게 먹을 수 있다면, 굳이 상대를 바꿔가며 방황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뜨거워봤자 석 달 연애는 식은 통닭이야

‘유효기간이 지난 사랑은 버려야 한다’고 가르쳐주는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의 한 장면.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는 지루할 정도로 고전적인 사랑을 믿는 로맨틱 코미디지만, 그런 점에서 편안한 노후를 제시하는 영화이기도 했다.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는 카롤린 봉그랑의 소설 ‘밑줄 긋는 남자’를 모델로 삼고 있다. 현채는 도서관에서 빌린 화집에서 미지의 남자가 남긴 메모를 발견한다. 이 남자는 어느 먼 곳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 20대 초인 현채는 신비로운 연애를 꿈꿀 수밖에 없는, 아직은 어린아이다. 그 곁에는 수많은 로맨틱 코미디에서 그렇듯, 어린 시절부터 현채를 사랑해온 친구 동하가 있다. 그는 햄버거를 먹을 때마다 소스를 흘리고, 비행기보다 지하철 타는 걸 좋아하는 속없는 남자다.

그러나 그런 남자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이 평범한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다. 그가 잠에서 깨기 전에 먼저 황급히 세수를 하지 않아도 되고, 골목길에 쪼그리고 앉아 라면을 끓여먹으면서도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한탄하지 않아도 좋은 남자. 사랑하기까지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어떤 식으로 헤어져야 하나 고민할 필요 없는 남자.

삼십대 중반을 조금 넘긴 또 다른 선배는 연애를 포기했다면서 “모르는 사람 만나서 친해지고, 몇 달 사귀다가 헤어지는 거, 피곤해서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럴 땐 이미 친한 사람과 연애를 하면 될 일이다. 그리고 왠지, 동하 같은 남자라면 결혼한 뒤 다른 남자와 연애를 하더라도 봐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뜨거워봤자 석 달 연애는 식은 통닭이야

21세기형 사랑 방식을 그린 영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 ‘결혼은, 미친 짓이다’ ‘싱글즈’(왼쪽부터).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연희 역시 피로에 지친 그 선배의 대안이 될 수 있는 여자다. 그녀와 친해지는 데는 하룻밤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부유한 남자와 결혼하는 게 목표인 연희는 자신의 맞선 상대인 준영이 그 기준에 한참 못 미친다는 사실을 간파한다. 마음에 드는데, 결혼은 내키지 않는 남자. 연희는 그날 밤 준영과 호텔로 가고 아주 빨리 가까워진 다음 결혼한 뒤에도 연애를 한다. 이 관계가 마음에 드는 건 연희가 주도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연희는 준영이 옥탑방을 마련하는 데 1500만원을 투자했기 때문에 그 공간을 당당하게 지배할 수 있다. 자기 마음대로 꾸며놓은 방안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와 섹스를 한다는 건 많은 여자들이 꿈꾸는 모습일 것이다. 게다가 연희에겐 돈 많은 남편까지 있으므로.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두 사람이 헤어진 뒤 몇 달이 흘렀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옥탑방을 찾는 연희에게서 끝을 맺는다. 그녀는 끝까지 자신이 만남과 헤어짐의 방식을 결정한다.

귀여운 눈웃음으로 사랑받아온 엄정화는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 출연한 뒤 ‘싱글즈’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에 연이어 모습을 드러냈다. 애교 많은 여자는 막무가내이기 쉽다. 그 애교를 따라하고 싶지 않더라도, 마음대로 살고 싶은 건 보편적인 바람일 것이다.

‘싱글즈’의 동미는 그렇게 마음대로 사는 여자다. 친한 남자친구와 룸메이트로 살고 있는 동미는 사랑이나 책임에 묶이지 않는다. 묶일 줄도 모른다. 술 취한 상태에서 한 하룻밤 섹스로 아이를 갖게 되었어도, 아이 아버지에게 자기 옆에 있으면 안 된다고 못박을 줄은 안다. 그녀가 낳은 아이는 행복하지 않을까. 동미는 사랑밖엔 난 몰라라고 노래하는 여자보다는 강하고 호된 어머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때문에 사랑이 그 세상의 중심이 되어선 안 된다. 사랑에 목숨 거는 사람들은 그 사랑이 떠난 뒤 빈자리를 메워줄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매느라 수십 년에 지나지 않는 삶을 흘려보내게 될 것이다.

뜨거워봤자 석 달 연애는 식은 통닭이야

드라마 ‘섹스 & 시티’의 네 주인공인 캐리, 샬롯, 미란다, 사만다(왼쪽부터).

그 때문에 ‘섹스 & 시티’가 내게 남긴 가장 중대한 교훈은 어떤 남자에게도 사랑한다고 말해선 안 된다는 진리다. 이 TV 시리즈의 화자인 섹스 칼럼니스트 캐리는 애인 빅에게 “당신을 사랑해”라고 외치고선 몹시 당황해한다. 캐리와 빅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즐기기만 해도 좋았던 연애는 서로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서로를 책임져야 하는 심각한 관계로 변한다는 사실을. 연애가 느슨하다면 관계는 답답하다. 관계는 조금씩 빠져나가는 사랑을 포박하는 그물과도 같다. 죽을 것처럼 절박했던 사랑도 언젠가는 흔적조차 남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관계가 되어버린 연애는 아직 조그만 흔적은 찾을 수 있다고 서로를 협박한다. 식은 통닭을 냉장고에 넣어두는 것처럼, 부질없는 짓이다. 냉정하게 포기하고, 사랑에 목매지 말고, 오래 사랑해야 한다면 최대한 편안하게. 2000년을 넘어서 만난 영화들은 내게 그렇게 살아도 좋다고 가르쳐주었다.



주간동아 435호 (p24~26)

김현정/ 씨네21 기자 parady76@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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