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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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정승 6판서’ 배출 명당 있나

  • 김두규/ 우석대 교수 dgkim@core.woosuk.ac.kr

    입력2003-03-27 13: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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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정승 6판서’  배출 명당 있나

    경기 양평군 양동면 쌍학2리 백아골에 있는 택당의 무덤(왼쪽)과 그의 조부 묘.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였던 택당(澤堂) 이식(李植·1584∼1647)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친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선양(瀋陽)에 끌려갔다 오기도 했다. 한문학에 정통하여 조선 중기 한학 사대가의 한 명으로 꼽히는 그는 풍수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져 20대 후반에 전북 고부에 안장된 할아버지 묘를 직접 경기 양평으로 이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풍수를 중시했던 것은 비단 택당뿐 아니라 조선조 유학자들의 공통된 특징이었다. 그렇다면 성리학 이외의 그 어떤 학문도 배척했던 조선 지식층에서 왜 풍수만은 그리도 중시했을까? 이는 조선의 국교였던 유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

    먼저 유교는 그 실천윤리의 하나로 효를 매우 강조했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살아 계신 부모를 잘 모시는 것을 효행의 근본으로 삼았는데 부모가 돌아가신 후 좋은 땅에 모시는 것 역시 효행의 덕목 중 하나로 여겼던 것이다. 두 번째로 유가(儒家)의 생사의식(生死意識)도 풍수와 결부돼 있었다. 명당에 조상을 모시면 후손이 번창하고, 그렇게 되면 제사가 끊이지 않아 조상이 후손 속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조선조 사대부들은 풍수를 거의 종교와도 같이 신봉했다.

    아무튼 택당이 효를 실천하기 위해 조부 묘를 이장한 곳은 경기 양평군 양동면 백아골.

    광해군 당시의 명풍수 이의신이 소개한 명당자리였다. 이의신은 광해군에게 도읍지를 한양에서 파주군 교하면으로 옮길 것을 건의(교하천도론)하여 당시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택당은 이의신 외에도 당대의 유명 풍수들을 모두 불러 모아 조부 묘에 대해 자문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의 참모였던 두사충, 선조의 신임을 얻어 서울 동대문 밖의 동묘(관묘) 터를 잡았던 박상의, 인조의 어머니 인헌왕후 무덤자리를 잡았던 오세준이 바로 그들로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국가 최고의 명풍수로 꼽히던 인물들이었다.



    이때 택당의 초빙을 받은 4명의 국풍(國風) 사이에서는 혈(穴)의 종류에 대한 재미있는 논쟁도 벌어졌다. 도대체 혈이 무엇이며, 왜 그에 관한 논쟁이 기록에 남게 되었을까?

    혈이란 유골이 안치될 정확한 지점과 방향을 말한다. 좋은 땅은 혈의 모양이 일정한 모습을 갖추고 있는데, 크게 와겸유돌(窩鉗乳突) 네 가지로 나누어 사상(四象)이라고도 한다. 실력 있는 풍수는 혈을 식별할 줄 알고, 그 혈을 사상으로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이 때문에 성리학의 대가이자 풍수에도 능했던 주자(朱子)는 “무덤에서의 혈은 침 놓을 혈자리와 같아 터럭만큼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바로 이 혈을 두고 두사충, 이의신, 박상의, 오세준 등 당대의 국풍들은 의견을 달리했다. 택당의 조부 묘자리에 대해 와혈이니, 겸혈이니, 유혈이니 하면서 서로 다른 시각으로 접근했던 것. 최고의 실력을 갖춘 국풍들이 혈상을 구분하는 데 왜 이렇게 의견이 분분했을까?

    사실 이는 고려의 풍수와 조선의 풍수의 차이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고려의 풍수는 ‘국역 풍수’로 세세한 묘지 풍수를 중시하지 않았던 반면, 조선의 풍수는 효를 강조하는 윤리의식과 묘지 풍수가 강조됐다. 더욱이 임진왜란 때 명나라 풍수들이 들어오면서 묘지 풍수는 더욱더 정밀해졌다. 중국의 묘지 풍수 역시 16세기 중엽에야 정교한 모습을 갖추게 됐던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당시 조선 풍수들은 그것이 진혈(眞穴)임을 알고서도 사물(穴)과 언어(穴名)를 제대로 대응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어쨌든 택당은 이 자리에 조부 묘를 이장했고, 이 명당 덕분에 ‘3정승 6판서가 나왔다’고 후손들은 믿고 있다.



    실전 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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