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7일 법무부 업무보고에 앞서 강금실 법무장관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위).세풍의 주역 이석희 전 국세청 차장이 3월19일 인천공항을 통해 강제송환되고 있다.
그러나 이틀도 되지 않아 이 측근은 자신의 판단이 잘못이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 전 차장은 검찰 소환 이틀 만에 ‘16억원대 모금’이라는 기존 주장을 접고, ‘100억원대’로 모금 규모를 상향 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역의원 10여명 소환설 돌아
이 전 차장이 귀국하기 전 한나라당 주변에서는 “이 전 차장이 더 이상 실체를 숨기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인다”는 얘기가 돌았다. 한나라당 한 인사는 “이 전 차장의 부인 쪽에서 반발이 심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4년여의 도피생활에 지친 이 전 차장과 가족에 대한 당 차원의 배려가 부족했음을 지적했다. 그는 지난해 말 이 전 차장의 부인과 당 인사가 접촉했음을 넌지시 밝히며 “그때 부인의 태도가 이상했다”고 말했다.
이 전 차장이 심경 변화를 일으켜 검찰 수사에 적극 협력할 경우 세풍의 후폭풍은 당초 예상보다 훨씬 클 수밖에 없다. 이미 검찰 주변에서는 서상목 전 의원과 이회창 전 총재의 동생 회성씨, 10여명의 현역의원 소환설이 흘러 나오고 있다. 경우에 따라 이 전 총재가 조사받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 검찰이 사용처 및 조성 경위가 불분명한 138억여원에 대해서도 집중 조사를 벌이고 있어 결과에 따라서는 정치권에 큰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는 상황이다.
검찰도 공개적으로 1997년 한나라당의 대선자금 불법 모금 과정에 당시 이회창 대통령후보가 개입했는지 등 세풍 사건의 배후 의혹에 대해서도 조사하겠다는 방침을 밝히고 있다. 검찰은 이를 위해 97년 대선 때 이 전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 결성된 사조직인 ‘부국팀’ 기획담당자였던 석모씨(41)를 우선 소환하는 방안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석씨는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도 ‘부국팀’과 외곽지원팀을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했다.
세풍 사건이란 15대 대통령선거 직전인 97년 10∼12월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후보의 동생 회성씨와 서상목 한나라당 전 의원, 이석희 전 국세청 차장 등이 국세청을 동원해 세무조사 유예나 무마 등의 조건으로 24개 기업으로부터 166억7000만원의 대선자금을 불법 모금한 사건이다. 98년 8월 말 서 전 의원을 출국금지하고 본격 수사에 착수한 검찰은 99년 9월 중간 수사 결과 발표 때까지 1년여 동안 이회성씨와 배재욱 전 청와대 사정비서관, 임채주 전 국세청장, 주정중 전 중부지방 국세청장, 김태원 전 한나라당 재정국장 5명을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하고 서 전 의원을 같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지난해 12월 한나라당사에서 이부영 당시 선대위 부위원장과 안상수, 김홍신 의원(오른쪽부터)이 도청자료를 보여주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나라당을 긴장시키는 것은 ‘세풍 사건’뿐만이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이17일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 도청의혹과 나라종금 퇴출 저지 로비 사건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지시, 한나라당뿐 아니라 정치권 전체를 긴장시키고 있다. 이들 3대 사건이 상승작용을 일으킬 경우 정국을 뒤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도청의혹 사건의 최대 관심사는 국정원의 첨단 도청설비가 존재하는지, 그리고 실제 도청이 행해졌는지 여부. 검찰은 한나라당이 대선 과정에서 폭로한 ‘도청문건’에 등장하는 60여명의 실제 통화 여부와 휴대전화 도청이 기술적으로 가능한지에 대해 다각도로 조사를 벌였다. 2월에는 국정원 신건 원장을 서면조사하고 국정원 현장검증을 실시했으며 감청과 관련된 국정원 실무자들도 조사했다. 하지만 국정원의 도청 여부와 도청문건의 유출 및 작성 경위 등 사건의 ‘실체’는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그러나 서울지검 공안2부는 도청의혹 사건 수사 과정에서 뜻밖의 ‘대어’를 낚았다. 3월22일 국정원 광주지부장 이모(1급)씨를 국정원법 위반 혐의로 구속한 것. 이지부장은 지난해 대선을 앞둔 12월11∼12일 평소 친분이 있던 박모씨에게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 등을 통해 도청의혹 사건 관련 내부 감찰조사 진행상황을 알려줘 직무상 취득한 비밀을 누설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씨는 천용택 전 원장 시절부터 신건 현 원장이 취임할 때까지 2년여 동안 감찰실장으로 재직했던 인물. 천 전 원장이 감찰실장으로 발탁하자 “호남 출신 간부들은 책임지고 관리하겠다”고 충성을 맹세했고, 실제 천 전 원장의 부담을 상당부분 덜어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이 안전기획부 대공수사국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그 밑에서 행정과장을 역임한 사람을 감찰실장으로 임명한 것은 말이 안 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다.
이씨는 감찰실장 재직 시절 ‘국정원 내 실세’로 통했던 김은성 전 차장과 상당한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 임동원 전 원장 시절 정성홍 전 경제과장의 ‘진승현 게이트’ 연루의혹에 대해 내부감찰을 벌이는 과정에서 김은성 전 차장이 정 전 과장을 적극 비호했기 때문. 그러나 신건 원장의 ‘배려’로 신원장 취임 직후 광주지부장으로 갈 수 있었다.
국정원 내부감찰 자료를 휴대폰 문자 메시지 등을 통해 외부로 유출한 혐의로 3월22일 구속된 이건모 국정원 광주지부장.
검찰은 이제 불법도청 의혹을 제기한 한나라당 의원 쪽으로 수사방향을 돌리고 있다. 도청의혹을 제기한 인물은 한나라당 김영일 사무총장과 정형근, 이부영 의원 3명. 대선 전 이들은 국정원의 도청을 ‘팩트’로 몰고 갔다. 그러나 최근 이들 주변에 미묘한 변화가 감지된다. 도청자료 입수 경위에 대해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것.
우선 이부영 의원은 “김총장한테서 문건을 받아 공개한 것일 뿐 입수 경위 등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한다”고 했다. 김총장은 “여러분도 잘 아는 당내 정보통이 문건을 입수했다”고 했다. 김총장이 말한 정보통은 정형근 의원. 그러나 정의원은 “김총장 폭로는 나와 무관하다”고 선을 그었다. 이들은 검찰소환에 당장 응하지는 않겠다는 입장이다.
도청의혹 사건은 정형근 의원이 지난해 10월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이 검찰 간부에게 전화를 걸어 ‘현대상선의 4000억원 대북지원설’에 대한 축소수사를 요구했고, 국정원이 이를 도청한 자료가 있다”고 폭로함으로써 정치 쟁점이 됐다. 한나라당은 이어 16대 대선을 코앞에 둔 지난해 11월 말 김총장이 “국정원이 현역의원과 기자, 언론사 사장 등의 통화내용을 무차별 도청했다”며 이른바 ‘도청문건’을 폭로했다. 이는 여야 정치인들 사이의 맞고소로 이어졌고, 검찰은 수사에 착수했다.
나라종금 사건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초조감은 여권이 훨씬 더하다. 나라종금 퇴출 저지 로비 사건에 전·현 정권의 실세들이 관련됐는지 여부가 의혹의 핵심이다. 노대통령은 이와 관련, 17일 법무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만약 내가 걸림돌이어서 수사가 중단됐다면 그런 정치적 고려는 할 필요 없다”면서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다.
노대통령의 이런 지시는 정치권에 미묘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임기 초반의 개혁 작업에 속도를 낼 수 있는 명분을 얻고, ‘정계개편’을 위한 본격 사정에 들어가기 위한 사전 포석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나타내는 쪽도 있다. “민주당 구주류나 동교동계, 더 나아가 일부 한나라당 의원까지 사정대상에 포함해 정치개혁이나 정계개편의 원동력으로 삼기 위해 일부 측근의 희생까지 감수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될 정도였다.
반면 측근에 대한 면죄부용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동안의 조사 결과 측근 연루설은 별다른 실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나 이를 공식화하기 위해 수사 재개를 지시했다는 것이다. 검찰 일각에서는 “설사 노대통령의 측근들이 나라종금측으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이 확인된다고 해도 그들이 당시 정치인 신분도 아니어서 처벌할 근거가 모호하다는 점에서 노대통령의 지시는 측근들의 ‘짐’을 빨리 내려달라는 뜻 아니겠느냐”는 관측이 나온다.
나라종금 퇴출 저지 로비 의혹 역시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한나라당의 폭로로 정치 쟁점화됐다. 한나라당은 지난해 12월15일 “보성그룹의 2조원대 공적자금 운용 비리를 수사하던 검찰이 지난해 6월 ‘보성그룹이 계열사인 나라종금의 퇴출을 막기 위해 정치권에 로비를 벌였다’는 진술을 확보하고도 내사를 중단했다”고 폭로, 파문을 몰고 왔다. 한나라당은 당시 검찰의 관련 수사기록까지 공개하며 사건 은폐 의혹을 제기했다.
의혹이 불거지자 검찰은 “보성그룹 산하 L사의 자금담당 이사 최모씨에게서 ‘1999년 8월 보성그룹 김호준 회장의 지시로 노무현 당시 민주당 대통령후보의 측근인 안모씨에게 2억원, 염모씨에게 5000만원을 건넸다’는 진술을 받았으나 김회장 등 관련자들이 완강히 부인하고 계좌추적에서도 단서가 나오지 않아 내사를 중단했다”고 해명했다.
검찰은 노대통령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상황 변화가 없는 한 더 이상의 수사 진행은 어렵다는 입장이다. 보성그룹의 자금관리를 총괄했던 유모씨가 미국으로 출국해 잠적한 데다 돈을 건넸다고 주장하고 있는 최씨의 진술은 믿을 수 없는 부분이 많아 증거로 삼기 힘들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