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7일 새로 임명된 장관들과 청와대 춘추관으로 이동중인 노무현 대통령(왼쪽에서 세 번째).
노무현 정부 출범 한 달. ‘변화와 개혁’에 대한 노대통령의 의지는 여전히 확고해 보인다. 개혁세력을 전면에 등장시킨 인사에서 이런 의지는 쉽게 읽을 수 있다. 외견상 상승기류를 타고 있으며 국민들의 기대치도 높다. 여론조사기관 fn리서치(대표 이상준)가 전국 성인남녀 2154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66%가 “정치권에 긍정적 변화가 있다”고 답했다. 검찰 등 인사정책에 대해서도 71.6%가 신선한 시도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기대의 이면에는 불안의 그림자도 어른거린다. DJ 정권의 유산인 대북송금 특검 문제를 비롯, 북한 핵문제, 이라크전쟁 등이 한꺼번에 노대통령의 개혁 발걸음을 붙잡는다. A비서관은 “사방이 벽이라는 느낌”으로 집권 한 달의 경험을 토로한다. 집권 한 달을 맞은 노무현 정부의 개혁 기상도는 먹구름이 잔뜩 몰려오는 형국이다.
“청와대는 공룡처럼 키우고 우리만 죽이냐”
“행정자치부(이하 행자부)는 앞으로 행정개혁부 또는 지방자치육성부 등으로 이름을 바꿔서 개혁업무를 10년 이상 맡겨야 할 것 같다.” 3월17일 오후 노대통령은 이정재 금융감독위원장 등에 대한 임명장 수여식에 배석한 김두관 행자부 장관에게 중단 없는 개혁을 강조했다. 노무현 정부의 첫번째 개혁 타깃은 ‘정부조직(시스템)’이다. 자르고, 폐지하고, 통합해 효율적인 정부를 만드는 것이다. 김두관 장관이 1급 공무원들의 사표를 받으면서 효율적인 정부를 향한 개혁나팔은 울렸다. 고위 공직자들을 대상으로 한 사표 받기는 앞으로 전 부처로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직개편에는 항상 저항이 따를 수밖에 없다. “청와대는 공룡처럼 키우고 행정부처만 축소하는 것이 개혁이냐”는 공직자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행자부 한 고위 관계자는 “다면평가를 한다던 새 정부가 직급을 기준으로 인사를 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찬용 청와대 인사보좌관은 1급의 ‘운명’을 로또복권에 비유, 타는 불에 기름을 부었다. 청와대측은 “조직개편을 일거에 하지 않고 1∼2년 동안 충분히 연구해서 차근차근 해나가겠다”며 한발 물러섰지만 노무현 정부의 ‘개혁코스’를 파악한 관료사회의 혼란과 반발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공직사회 개혁과 관련, 문제의 본질은 위기에 몰린 고위 관료들의 불평과 불만이 아니다. 사안마다 행정부처와 청와대가 ‘따로 논다’는 점이 무엇보다 개혁행보를 더디게 한다. 김진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이하 재경부) 장관은 사석에서 ‘북폭설’을 거론, 주식시장을 요동치게 했다.
김두관 행자부 장관(위)과 윤덕홍 교육부총리.
조직원들을 감싸안고 가야 할 장관의 입에서 피아를 구별하는 발언도 수시로 튀어나온다.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은 취임사에서 공무원 조직을 ‘조폭’에 비유했다. 윤덕홍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은 “관료 중 감각이 가장 뒤떨어진 게 교육관료”라고 말해 해당부처 공무원들의 공분을 샀다. 이런 흐름은 이회창 전 총재를 지지했던 ‘절반’의 유권자들을 자극, 국민화합과 통합을 저해한다.
전직 장관 출신인 K씨는 이런 현상에 대해 “장관들의 정책 접근능력이 떨어지고, 장관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 같다”고 쏘아붙인다. 내각을 통할 조정하는 ‘총리’의 역할이 없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책임총리제를 표방하고 등장한 고건 국무총리의 역할과 활동은 요즘 찾아보기 힘들다. 총리 역할 부재가 시스템 때문인지, 아니면 권력운영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인지를 따져봐야 한다는 게 K씨의 지적이다. 그는 역할의 혼재가 지속될 경우 부처 이기주의 등으로 무장한 관료문화가 개혁논리를 압도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대통령과 총리의 역할 분담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지적이다.
총리 및 내각이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해 생기는 구멍은 노대통령이 모두 막고 나서 업무의 효율성 측면에서 우려를 낳고 있다. 이창동 장관이 ‘신취재지침’을 내놓자 노대통령은 “부적절하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농림부가 “북한에 3년간 매년 300만섬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하자 노대통령은 “결정된 정책이 아니다”며 수습에 나섰다. 3월 초 김진표 경제부총리는 “법인세를 단계적으로 내리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하루 만에 제동을 걸고 나선 사람은 노대통령이었다. 신중한 검토 없이 먼저 언론에 발표하는 관료들의 무책임함도 지적돼야 하지만 매사 대통령이 교통정리에 나서는 것도 모양이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인수위 출신 민주당 한 전문위원은 “이런 상황이라면 경제부총리든 건설교통부 장관이든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고 단언한다. 내각에 권한을 넘겨주는 ‘분권형 대통령’은 더더욱 실현하기 어렵다. 결국 효율적인 정부를 표방한 새 정부의 개혁 슬로건은 무색해진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개혁의 구체안도 이런 흐름에서는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
경제문제는 노무현 개혁의 아킬레스건이다.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AWSJ)은 2월24일 “노당선자의 최대 도전은 재벌 등 한국경제의 병폐”라고 지적했다. 노대통령도 3월7일 “시장개혁의 가장 큰 걸림돌이 재벌체제”라며 강력한 시장개혁을 강조했다. SK그룹 최태원 회장의 구속과 더불어 ‘재벌개혁론’이 등장했지만 후유증도 대단했다. 이라크전 발발 가능성, 가계부채 급증, 북한 핵문제 등 국내외에 산적한 악재들이 시장개혁론을 압박했다. 점진적, 자율적이라는 수사가 자주 등장했고 급기야 노대통령은 11일 재경부 업무보고에서 ‘속도조절론’을 입에 올렸다. 이후 경제부처에서는 쟁점이 되어온 집단소송제 등 세 가지 개혁 외에 다른 것은 모두 보류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총리실 한 관계자는 “경제가 잘못되면 만사가 잘못된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라는 지적을 내놨다. 이 인사는 새 정부의 경제개혁은 이제 시장친화적으로 갈 것”이라고 새로운 진로를 전망했다. 상황논리에 무게를 두는 발언으로 경제논리가 개혁의지보다 앞선다는 진단이다.
경제상황론을 앞세운 속도조절은 역대 정권에서 늘 경제 구조개혁 실패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들은 경제가 좋을 때는 ‘경제가 망가진다’는 우려 때문에, 경제가 안 좋을 때는 ‘더 나빠진다’는 이유로 머뭇거리다 결국 개혁에 실패했다. 노무현 정권도 바로 이 덫 앞에 선 것이다. 이코노미스트는 3월15일자에서 “노대통령의 개혁 노력이 힘겨울 것이라는 조짐들이 이미 나타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노대통령이 당면한 가장 현실적 이슈는 남북 및 대미관계다. 이 문제와 관련, 새 정부의 기조는 분명하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는 절대 허용할 수 없지만 물리적 제재에는 반대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평화적 해결 원칙이다. 이 때문에 한·미관계 사상 가장 냉랭한 상황이다. 미국 보수파들은 노대통령이 “중립국을 만들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던진다. 전능의 수단과 방법을 가진 미국이 이런 대접을 받고 가만 있을 리 없다. 이라크전쟁 후 미국의 대북 시나리오에서는 대화보다 힘의 논리가 앞설 수도 있다는 전망이 흘러나온다. 문제는 평화적 해결이라는 원칙에도 불구하고 이를 현실화하기 위한 구체적 수단이 없다는 점이다.
3월21일 노무현 대통령이 주한 외국인 투자기업 CEO와 외국인 투자 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정치개혁과 관련, 노대통령의 평소 생각은 자율개혁이다. 그러나 요즘 노대통령은 “정치개혁이 완전히 좌절됐다고 생각하면 직접 나설 생각이 있다”는 말을 자주 입에 올린다. 민주당 내에서는 위기 타개책으로 분당과 신당 창당, 신당 창당에 버금가는 재창당 등(상자기사 참조) 여러 갈래의 해법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얽혀 있는 민주당에서 ‘개혁’ 기운은 찾아보기 힘들다.
盧 “자율 정치개혁 안 되면 직접 나설 생각”
이런 현상을 지켜보던 한나라당 안상수 의원은 13일 청와대 인터넷 홈페이지에 “김대중 정부의 지나친 인기 영합 정책과 포퓰리즘적 국정운영으로 국민이 고통받고 피해를 보았다”고 충고했다. 그는 노대통령과 사법시험 17회 동기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한 지 이틀째인 21일 오전 9시, 노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와 임시 국무회의를 잇따라 주재하며 이라크전과 관련한 정부대책을 점검했다. 점심 때에는 윌리엄 오벌린 주한 미상공회의소 회장, 장 자크 그로하 주한 유럽상공회의소 소장 등 외국기업 CEO 16명과 함께 오찬 간담회를 했다. 이라크전과 북한 핵문제로 인한 외국기업인들의 우려를 불식하고 투자를 유치하려는 목적으로 마련된 자리였다. 저녁에는 박관용 국회의장, 정대철 민주당 대표,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대행, 김종필 자민련 총재 등과 만찬을 했다. 파병에 대한 배경 설명 등에 이어 정치권의 협조를 구하는 자리였다. 취임 한 달을 맞은 노대통령의 하루는 이처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개혁’의 그림자는 노대통령을 비켜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