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9일 녹색대학에서 운영하는 서울 인사동의 음식점 시천주에서 고객이 ‘녹색화폐’ 10%와 원화 90%로 음식값을 지불하고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이들이 한밭레츠(www. tjlets.or.kr)라는 지역통화운동 단체에 가입해 있기 때문. 지역통화운동(LETS·Local Exchange and Trade System)은 미리 등록한 회원들이 그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지역통화를 이용해 재화 및 서비스를 서로 거래하는 네트워크 조직이다. 이런 네트워크를 주도하는 것은 탐욕으로 왜곡돼 있는 돈의 본래 기능(교환수단)을 되찾고 지역공동체를 되살리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IMF 당시 실업자 구제책으로 선보여
지역통화운동은 1983년 캐나다의 한 광산촌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마이클 린튼이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고안한 뒤 전 세계적으로 퍼져 지금은 3000여개나 운용되고 있다. 이것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은 96년 ‘녹색평론’이라는 잡지를 통해서였다. 이후 98년 3월 신과학운동 단체인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의 모임’(www.herenow.co.kr)에서 미래화폐라는 이름으로 지역통화운동을 처음 시작했다. 당시는 한국 사회가 IMF 관리체제라는 특수한 상황 하에 있어서 이것이 실업자 구제책의 일환으로 소개되면서 2000년 11월경엔 31개에 달할 정도로 활성화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지역통화운동은 IMF 관리체제를 벗어나면서 다시 활기를 잃어 운영단체들이 유명무실해져 갔다. 현재 비교적 활발하게 지역통화운동을 벌이고 있는 단체는 한밭레츠와 광주나누리(www.kjnanuri.or.kr) 정도고, 녹색연합의 ‘녹색장터’,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의 모임’, 관악 지역화폐, 교육 관련 출판사인 ‘민들레’(www.mindle.org)의 민들레 교육통화, 송파구 자원봉사센터에서 운영하는 ‘송파 품앗이’ 등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정도다.
이처럼 지역통화운동이 침체기에 접어든 것은 △IMF 체제 때와 같은 절박한 사회적 수요가 없어졌고 △시스템 운용이 생각보다 힘들다는 점이 확인된 데다 △회원관리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는 게 지역통화운동 전문가인 이창우 서울시정개발연구원 연구위원의 분석이다.
그러나 최근 사회 일각에서 지역통화운동의 네트워크를 새롭게 조직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3월21일엔 서울 상봉동 지역의 품앗이 모임인 ‘상봉레츠’가 추진위원회를 발족했고, 부산지역에서는 부산YMCA가 ‘Y공동체(지역사랑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지역통화공동체를 준비하고 있다. 특히 최근 한밭레츠가 ‘두루지폐’를 만들었고, 올 3월 개교한 녹색대학(총장 장회익)의 운영 주체인 그린네트워크가 ‘녹색화폐’를 만드는 등 지역화폐운동이 새로운 전기를 맞는 느낌이다.
국내 지역통화운동 단체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한밭레츠는 대전지역에서 2000년 2월 70명으로 시작했지만 3월 현재 회원이 400여명에 이를 정도로 커졌다. 이곳에서 사용하는 화폐 단위는 ‘두루’로 두루두루 널리 쓰이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이러한 이름을 붙였다. 모든 물품이나 서비스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현금 대신 사용되는 공동체 화폐인 두루는 원화와 같은 가치다. 이곳에서는 평균적으로 월 150여건의 거래가 이뤄지고 있으며, 거래량도 2002년 기준으로 2500만원에 2500만 두루를 합친 규모로 크게 늘어났다.
지난해 여름 광주나누리측이 광주시민을 대상으로 지역화폐 사업설명회를 하고 있다.
한밭레츠에서 가장 활성화되고 있는 것은 의료 분야다. 지난해 8월 회원 중 의사와 한의사들이 주도해 만든 병원인 ‘민들레 의료생협’(이사장 김조년)이 레츠 가맹점 형태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 회원들은 이곳에서 두루로만 계산하거나, 원과 두루를 각각 50%씩 부담하고 진료를 받는다.
그동안은 이런 거래가 품앗이통장과 등록소 홈페이지에 기록되는 것으로 끝났지만 최근 한밭레츠는 통장 대신 사용할 지폐(500두루, 1000두루, 5000두루, 1만 두루) 4종을 발행했다. 그 이유는 △회원들 사이에서 실제 화폐와 같은 실물감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있었고 △계정상으로만 주고받을 때 가격 책정에 소극적이거나 실제 거래 당사자들끼리 협의해야 할 일을 등록소에 위임하는 경향이 있어 이를 개선할 필요가 있었으며 △회원 확대와 가맹점 확대를 위한 홍보를 위해서도 실제 화폐가 필요했기 때문.
‘녹색화폐’ 등 대안화폐 운동도 등장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대전의 한밭레츠가 ‘두루지폐’(오른쪽)를 발행하면서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맞고 있다. 회원들이 김장을 담그고 있는 모습.
‘생태주의 교육’을 기치로 내건 녹색대학의 그린네트워크는 지역통화의 변종인 ‘녹색화폐’를 발행해 대안화폐운동을 벌이고 있다. 화폐단위는 ‘사랑’이며, 1000사랑, 5000사랑, 1만 사랑이 있다. 그린네트워크는 한국조폐공사에 의뢰해 6000만원의 비용을 들여 30억원어치 녹색화폐를 발행했다.
녹색화폐가 원화와 다른 점은 무엇보다 쓰일 수 있는 곳이 한정돼 있다는 점. 이 돈이 통용되는 공간은 경남 함양군에 있는 녹색대학, 함양읍내 일부 가맹점과 공동체마을인 청미래마을, 서울 인사동과 성남에 있는 음식점인 ‘시천주’, 그리고 천연염색염료사업단, 건강식품사업단 등으로 구성된 그린네트워크 산하기관이다. 또한 이자가 없고 당사자들 간에 동의가 있어야 거래가 가능하며, 녹색대학의 교수와 학생의 노동시간에 같은 가격이 매겨지는 ‘등가의 가치’가 존중된다.
실제로 녹색대학에서 교수와 교직원은 급여의 25%를 녹색화폐로 받으며, 학생들은 등록금의 25%를 교내 아르바이트를 통해 번 녹색화폐로 낼 수 있다. 녹색화폐는 학교 안의 매점이나 함양의 일부 떡집, 목욕탕 등에서 10%, 혹은 30%를 원화와 같이 낼 수 있다. 가맹점에서는 이 녹색화폐로 녹색대학의 유기농산물 판매점 등에서 물품을 구입할 수 있다.
그린네트워크가 화폐를 발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녹색대학 관계자는 “그동안 공동체운동이 실패해온 것이 바로 경제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이 대안화폐로 경제적인 문제를 일부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고 발행하게 됐다”며 “공동체 구성원 간의 결속력을 돈독히 해주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려의 목소리도 만만찮다. 이처럼 손에 잡히는 화폐를 만들어 유통시키는 경우 관리의 문제나 권력집중, 인플레이션 등 기존 화폐 시스템의 실패를 반복하기 쉽기 때문이다. 역시 화폐 발행을 계획하고 있는 광주나누리의 김인철 책임간사는 “통화를 발행하는 경우 거래가 단기적으로 활성화될 수 있지만 자칫 회원들이 많이 소유하려고 욕심을 부리거나 하여 관계 개선을 목적으로 한 지역통화운동의 취지에서 벗어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한밭레츠를 처음 기획한 박용남 대전의제21추진협의회 사무처장은 “화폐 발행은 레츠를 활성화하기 위한 임시방편일 뿐”이라며 “거래 수수료만으로는 운영주체가 제대로 굴러갈 수 없기 때문에 호주 영국 등처럼 우리도 정부나 재단 차원에서 적극 레츠를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돈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나 지역의 활성화를 위해서도 그 필요성이 인정되는 지역통화운동이 새 기로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