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4월1일과 5월8~11일에 각각 공연을 펼칠 빈 필과 오페라 ‘투란도트’. 공연계에서는 ‘진지한 공연이라기보다 이벤트성 성격이 강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빈 필은 3월31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공연에 이어 4월1일 월드컵경기장에 마련된 특설무대에서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 사라사테의 ‘카르멘 판타지’(협연 사라 장) 등을 연주하는 야외음악회를 연다. 이로부터 한 달여 뒤인 5월8~11일에는 같은 장소에서 한국오페라단이 주최하는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 야외공연이 열린다.
두 공연은 모두 2002 한·일 월드컵 기념공연이자 ‘국내 최대의 야외공연’을 모토로 내세우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공연들을 보기 위해 월드컵경기장에 입장할 관객은 회당 4만6000명에 이른다. 국내 최대의 연주회장인 세종문화회관이 3800여석인 것을 감안해보면 ‘경기장 음악회’의 엄청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공연 예산 역시 각각 30억원과 50억원이라는 천문학적 규모다.
그런데 이쯤에서 약간의 의문이 생겨난다. 과연 경기장에서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날씨나 습기에 민감한 현악기들이 대거 포진해 있는 오케스트라가 야외공연에 나선다는 점도 이례적이다. 빈 필의 입장에서도 축구경기장 연주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음악계는 한목소리로 비판
MBC와 함께 빈 필 공연을 공동주최한 IMG 예술기획의 이성봉 실장은 “빈 필은 유럽사람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다. 그런데 유럽사람들은 하나같이 축구에 열광적이어서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리는 공연이라고 하니 흔쾌하게 응했다”고 전했다. 야외공연에 대한 빈 필의 개런티는 통상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공연의 회당 개런티(20만 달러)의 두 배가 넘는다고.
야외에서 연주회가 열릴 때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역시 음향이다. 상암 월드컵경기장은 건축 당시부터 월드컵 이후 각종 문화행사에 사용될 것을 고려해서 특별히 음향설계를 한 경기장이다. 그러나 경기장 그라운드에 잔디가 깔려 있고 벽과 지붕이 있어 음악회장으로 이용하기에는 잔향이 긴 편이라는 분석도 있다. 잔향이 길어지면 음들이 섞여 음의 명료도가 떨어지게 마련. 한 음향전문학자는 “상암경기장은 문화행사를 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경기장이기는 하나 이곳은 어디까지나 경기장이지 콘서트홀은 아니다”라며 일반 콘서트홀 같은 음향 수준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주최측 역시 음향 문제 해결에 가장 신경을 쓰고 있다. MBC측은 오스트리아 제미니브이 소속 음향전문가들을 초청하는 한편 관중석에 흡음천을 설치해 소리의 반사를 줄이기로 했다. 또 스피커와의 거리에 상관없이 일정한 음을 전파할 수 있는 특수 스피커를 동원했다. 동원되는 음향 장비의 가격만도 100억원에 달한다. 또 공연 전날 서울내셔널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빈 필의 연주 레퍼토리를 협연곡까지 똑같이 연주하는 사상 초유의 ‘음향 리허설’까지 가질 예정.
영화감독 장이모가 연출하는 ‘투란도트’의 경우는 1997년 중국 베이징의 쯔진청(紫禁城)에서 열린 야외공연을 다시 제작하는 경우이기 때문에 빈 필에 비하면 한층 느긋한 입장이다. 지난 3월10일에는 장이모가 직접 디자인했다는 폭 150m, 높이 45m의 대규모 세트 모형이 공개되기도 했다. 오페라 칼럼니스트 유형종씨는 “오페라 대중화에는 긍정적 영향을 미칠 이벤트라고 본다”며 “특히 무대장치가 볼 만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제는 ‘경기장 음악회가 얼마나 볼 만하냐’를 따지기 전에 과연 경기장에서 클래식 음악회와 오페라를 공연하는 풍토가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음악계 관계자들은 이에 대해 한결같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공연기획사인 크레디아의 백성현 이사는 “빈 필은 자신들의 연주홀인 빈 무지크페라인 잘에 맞도록 개량된 호른을 쓸 만큼 연주장소에 민감한 오페라단이다. 연주회장에서 들려주는 것과 같은 수준의 연주를 경기장에서도 들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또한 97년 중국 베이징 공연의 경우 오페라의 실제 배경인 쯔진청을 무대로 사용한 것이지만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굳이 ‘투란도트’를 공연할 이유가 있느냐는 의문도 제기된다.
결정적으로 대형 경기장 음악회가 예삿일이 되면서 본격적인 공연에 몰리는 관객들이 그만큼 감소하는 부작용이 생겨나고 있다. 예술의전당 안호상 예술사업국장은 “그렇지 않아도 공연장 운영이 어려운 상황에서 경기장 음악회는 공연계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강한 어조로 경기장 음악회를 비판했다.
음악평론가 홍승찬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는 경기장 음악회가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기 힘들 것이라고 진단한다. “음악회가 대형화되면 다양한 공연들이 사라지고 오직 ‘큰 음악회’만 남게 될 가능성이 크죠. 그런데 경기장 같은 대형 공간에서 공연한다고 해서 그 공연의 질이 높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음악 관계자들은 “경기장 음악회는 음악회라기보다 하나의 이벤트이자 쇼다”라고 이야기한다. 사회 전반에 걸쳐 진지한 분위기가 점점 사라지면서 공연계에서도 높은 예술적 수준보다는 경제적인 이득을 극대화하는 데 관심이 커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가장 진지한 음악인 클래식마저 이벤트성 공연이 당연해진 현실은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