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부는 업무보고에서 2004년 7월부터 가입할 수 있도록 퇴직연금 도입을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4인 이하 사업장 적용·연금 지급형태 이견
그러나 각론으로 들어가면 재경부와 노동부는 물론 노사 간에도 퇴직연금 도입 방안을 둘러싼 이견이 적지 않아 쉽게 합의가 이뤄지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우선 정부 내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좁혀지지 않고 있다. 당장 용어 선택부터가 다르다. 재경부는 ‘기업연금’으로, 노동부는 ‘퇴직연금’으로 표현한다. 재경부는 기업에 세제혜택을 줘 현행 퇴직금 제도를 연금 형태로 바꿔나가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반면, 노동부는 퇴직 근로자들의 노후대책을 수립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재경부는 기업연금 도입을 통해 증시 활성화를 꾀한다는 계획이고 노동부는 증시 활성화를 위해서는 퇴직연금 도입은 안 된다는 주장이다. 노동부측에서는 지난해 10월 이미 정부안을 내놓고 노사정위원회에서 이미 논의가 진행중인데 재경부가 이를 가로채려는 게 아니냐는 시각마저 보이고 있다. 노사정위원회가 퇴직금 제도 개선을 의제로 선정한 것은 1998년이다. 여러 차례의 실무 논의를 거쳐 지난해 10월에는 정부안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후 지난해 11월부터 노사정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했지만 4인 이하 사업장 적용 여부, 연금 지급형태 등을 둘러싼 노사 간 이견으로 인해 협상이 벽에 부딪힌 상태다. 현재 민주노총은 퇴직연금 도입 자체를 반대하고 있고 한국노총은 조건부 찬성의 입장이다. 그러나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 모두 재경부가 주장하는 증시 활성화를 위한 퇴직연금 도입에는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는 상태. 경영자총협회(이하 경총)도 도입 자체에는 찬성하지만 현재 정부안을 그대로 강행한다면 동의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우선 퇴직연금을 어떤 식으로 갹출할 것이냐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다. 퇴직연금은 확정급여형(DB·Defined Benefit)과 확정갹출형(DC·Defined Contribution)으로 크게 나뉜다. DB는 근로자가 받는 연금 수준을 사전에 확정해놓는 데 반해 DC는 사용자가 매달 내놓는 돈을 일정하게 하고 근로자가 받는 연금 수준은 운용실적에 따라 다르게 하는 방식이다. 근로자들 입장에서는 운용실적에 따른 위험부담이 적은 확정급여형을 선호하게 마련. 노조측이 정부안에서 확정갹출형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한국노총 정길오 정책국장은 “확정갹출형을 배제하지 않으면 노조가 아예 없는 사업장에서는 당연히 사용자의 뜻에 이끌려 확정갹출형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정부안에서는 DB와 DC를 모두 허용하고 노사협의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반면 사용자 단체에서는 노대통령의 퇴직연금 조기 도입 지시 이후 노동부가 연금 도입방안과 관련해 친(親)노조 성향으로 돌아서고 있다고 보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4인 이하 사업장 및 1년 미만 단기근속 근로자에 대해 기업연금 도입을 추진한다는 대목. 현재 노동부는 4인 이하 사업장에 대해서는 5인 이상 사업장과 달리 퇴직연금 적용을 선택사항이 아닌 강제사항으로 하되 일정한 예고기간을 둔 뒤 단계적으로 적용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용자 단체측이 반발하고 나설 조짐이다. 경총 이호성 고용·사회복지팀장은 “기업연금 적용대상을 4인 이하 사업장으로 확대하면 결과적으로 영세기업들이 퇴직금 부담을 피하기 위해 정규직 고용을 꺼리게 될 것”이라며 부담이 근로자들에게 되돌아갈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사용자 단체들이 퇴직연금 도입에 소극적인 이유는 또 있다. 기업들 입장에서는 퇴직금 제도가 기업연금으로 대체되면 과거 퇴직금에 해당하는 액수의 ‘생돈’을 외부 금융기관에서 조달해야 할 형편이기 때문. 그동안 대부분의 기업들이 근로자들의 퇴직금을 장부상으로만 적립해놓고 사실상 이를 운용자금으로 이용해왔던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나 퇴직연금은 매달 일정액의 갹출금을 실제로 외부 금융기관에 적립해야 하기 때문에 퇴직금이 떠맡아왔던 운용자금은 고스란히 날아가는 셈이다. 기업들이 퇴직연금 부담에 따른 비용 증가 요인을 감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기업에선 퇴직금이 사실상 운용자금 오랜 관행
일단 노사정위원회에서 노사 합의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정부가 자체안을 그대로 강행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렇게 될 경우 경총은 퇴직연금 도입 문제를 국민연금과 연계해서 다뤄야 한다는 카드를 새롭게 꺼낸다는 입장이다. 정부안대로 퇴직연금을 4인 이하 사업장에까지 적용하게 되면 이에 따른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결국 정부가 국민연금의 사용자 부담분을 줄여줘야 한다는 논리다. 이렇게 되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당장 국민연금은 보건복지부(이하 복지부), 기업연금은 노동부 소관이어서 경총의 요구대로 기업연금 부담분을 국민연금 부담분에서 상쇄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경총 관계자는 “지금도 이 문제를 놓고 복지부와 노동부가 ‘핑퐁게임’을 펼치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4인 이하 사업장 부분에 대한 이론도 있다. 금융감독원 신기철 연금감독팀장은 “4인 이하 사업장 근로자들의 문제는 사회안전망 확충을 통해 해결해야지 퇴직연금 지급대상을 무조건 모든 사업장으로 늘린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사용자 부담률이 미미한 고용보험이나 산재보험의 경우도 4인 이하 사업장에 전부 적용하고 있지만 가입률은 70% 정도에 불과한 형편이라는 것. 법적 강제사항인데도 전체 사용자의 30% 정도는 현실적으로 이를 지불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정부가 4인 이하 사업장에 대해 퇴직연금 적용을 의무화하되 퇴직연금 제도가 정착한 뒤에 단계적으로 실시한다는 절충안을 낸 것도 결국 노사 양측의 눈치를 본 결과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퇴직금 제도는 하나의 ‘산’입니다. 평지에다 공원을 만들기도 쉽지 않은데 산을 움직여서 그 자리에 공원을 만들려니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한국노동연구원 방하남 연구위원의 말이다. 세계적으로 유일한 한국형 퇴직금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하면서도 아직도 ‘퇴직금 시대’의 향수에 젖어 있기는 사용자나 근로자 모두 마찬가지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