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32

2006.04.25

아들 뒷바라지 올인하다 빚잔치

  • 입력2006-04-19 17: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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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 뒷바라지 올인하다 빚잔치
    국민대 건너편 정릉3동 길섶. 대여섯 평이 될까 말까 한 조그만 떡집을 나는 한 달에 한 번 아침식사 대용 인절미를 사러 들렀다. 작은 키에 땟국이 흐르는 꾀죄죄한 떡집 주인과는 어느덧 농담도 주고받는 친한(?) 사이가 됐다.

    그날 아침도 떡집 주인은 인절미를 썰고 나는 떡 꼬랑지를 먹으며 무료하게 기다리다, 이튿날 골프 라운드 약속이 잡혀 있던 참이라 한쪽 벽에 걸린 커다란 거울을 보며 백스윙 자세를 잡고 있었다.

    “골프 하세요?”

    떡집 주인이 떡 썰던 일손을 놓고 휙 돌아서며 큰 소리로 하는 질문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사장님도 골프 하세요?”

    그는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자랑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우리 아들이 해요.”



    그의 아들 골프로 얘기 봇물이 터졌다. 요약하면 그의 아들은 고등학교 2학년으로 골프를 시작한 지 1년 반이 됐는데, 며칠 전 필드에 나가 80대 초반을 기록해, 그저께 저녁엔 주인이 아들을 가르치는 레슨프로를 불러 갈비를 뜯다가 ‘아들이 골프에 천재성이 있다’는 말을 듣고 3차까지 가는 바람에 대취했다는 것이다. 아들에게 쏟아 붓는 돈이 한 달에 400여만 원, 다음 달 여름방학 때 뉴질랜드 전지훈련을 가면 700여만 원이 들어간다나. 부인은 보험설계사이고, 온 집안이 아들의 골프에 올인을 했으며, 자기는 아들의 장래를 확신한다는 것이다.

    미간이 찌푸러진 나는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아드님이 공부는 좀 하나요?”

    서슴없는 대답이 나온다. “걔는 공부에 취미 없어요.”

    운동도 좋지만 공부 병행하는 풍토 아쉬워

    그가 인절미에 콩가루를 입히는 동안 나는 망설였다. 바른말을 해줘서 이 사람의 들뜬 풍선을 터뜨려야 하나, 남의 일에 상관하지 말아야 하나. 나는 전자를 택하기로 했다. 깊은 얘기는 다음번 소주 자리를 마련해서 하기로 하고, 외국 학생 운동선수 얘기만 간단히 했다.

    ‘미국이나 유럽, 일본에서는 아무리 운동을 잘해도 학점을 못 따면 운동을 할 수가 없다. 운동선수 학생들이 모두 프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대학 졸업 때 담당 코치가 면담을 해서 그들의 진로에 결정적인 조언을 한다. 프로가 안 된, 그리고 프로가 못 된 선수들도 자기 전공을 따라 사회에 적응한다. 그러니 운동을 하더라도 공부는 시켜라.’

    그러나 나의 충고가 떡집 주인에게는 마이동풍이었다.

    “언제 공부하고, 언제 운동해요.”

    말이 나온 김에 소줏집에서 할 얘기를 미리 해버렸다. ‘아들은 너무 늦게 시작했고, 그에게 온 집안이 올인하는 건 너무나 위험한 도박이다’ 등등.

    그러자 그는 버럭 화를 냈다.

    “최악의 경우 레슨프로가 돼도 월급쟁이보다는 낫다고요.”

    나는 더 할 말을 잃어 인절미를 받아들고 나와버렸다. 자연히 떡을 사러 그 집에 가던 발길도 뚝 끊어졌다.

    1년여가 흐른 어느 날 저녁, 집에 가다가 떡집이 헐리고 그 자리에 다른 가게가 들어서는 듯 공사 중인 모습을 보고 건너편 분식가게에 들어갔다.

    “아들 치다꺼리하다 망해서 빚잔치를 하고, 수유리 쪽으로 이사 가 시장에서 채소 좌판 한대요.”

    그곳에서 분식집 주인의 씁쓸한 얘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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