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적 고독에 관한 가설
고양이 한 마리
도로 위에 낙엽처럼 누워 있다
몸통이 네모나고 다리가 둥글게 말린
코끼리 같은 버스가
죽은 고양이 앞에 애도하듯 멈춰 있다
누군가 말한다
스키드 마크는
바퀴도 번민한다는 뜻이지
누군가 답한다
종점에서 바퀴는 울음을 터뜨릴 거야
새 시장은 계몽된 도시를 꿈꾸지만
시민들은 고독하고 또한 고독하다
했던 말을 자꾸 되풀이하는 것이 그 증거다
멀리서 아련히 사이렌이 울린다
한때 그것은 독재자가 돋우는 공포의 심지였으나
이제는 맹인을 이끄는 치자꽃 향기처럼 서글프다
누군가 말한다
두고 봐
종점에서 바퀴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 거야
하루 또 하루
시민들은 고독하고 또한 고독하다
친구들과 죽은 자의 차이가 사라지는 것이 그 증거다
한 사람 또 한 사람
고양이 한 마리 또 한 마리
―심보선 ‘눈앞에 없는 사람’(문학동네, 2011)에서
미련과 그리움 안고 오늘도 굴러간다
마침내 종점에 다다른 바퀴는 나이를 먹으면서 상가(喪家)에 가는 일이 점점 늘어났다. 처음으로 장례식장에 가서 구두를 벗을 때가 생각난다.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구두가 잘 벗겨지지 않았다. 딱 맞거나 작은 구두가 아니었는데도, 한쪽 발을 들고 한 손으로 발뒤꿈치를 잡은 채 낑낑대며 겨우 구두를 벗었다. 나는 본의 아니게 장례식장에서 소란을 피우고야 말았던 것이다. 힘겹게 구두를 벗고 나서야 비로소 남들이 다 하는 의례에 참여하게 됐다. 상주에게 애도를 표하고 흰 와이셔츠에 까만 재킷을 입은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일. 나는 구석에 앉아 한 사람의 죽음 때문에 이곳에 모여든 이들에 대해 가만가만 생각해봤다.
한 사람이 저세상으로 갔을 때 남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기껏해야 일 년에 한 번씩 제사상을 차리고 예를 올리는 게 다다. 불쑥불쑥 덮치는 그리움을 참다못해 시원하게 통곡하는 게 다다. 한 사람의 죽음은 그렇게 희미해진다. 잠잠해진다. 슬프게도 죽음은 예삿일이 돼버리고, 우리는 의도치 않게 너무 빨리 늙는다. 너무 빨리 아련해진다.
장례식장에 가는 횟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나 역시 죽음에 조금 더 가까워지는 일. 어쩔 수 없이 소멸에 친숙해지는 일. 친구의 아버지, 존경하던 선생님, 좋아하던 연예인, 피붙이 같던 친구들을 마침내 놓아주는 일.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내일을 맞이하고 묵묵히 내 일을 다시 시작하는 일. “고독하고 또한 고독”해지는 일. 그와 동시에 단단하고 또한 단단해지는 일. “코끼리 같은 버스”에서 내려 또박또박 걸어가는 일. 나도 모르는 사이, 죽음이란 것에 점점 무뎌지는 일. 그래서 시인은 다시 납작해진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도로 위에 낙엽처럼 누워 있”는 “고양이 한 마리”의 모습에 대해, “멀리서 아련히” 울리는 “사이렌”에 대해, 몇 시간 후 내 기억에서 감쪽같이 사라질 무명씨들의 죽음에 대해.
그것은 어쩌면 장례식장에서 “했던 말을 자꾸 되풀이하는” 사람이 돼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 또 한 사람”을 보내며 생사의 덧없음에 대해 고개 끄덕이는 일. 그렇게 눈물을 조금씩 다 쏟아내 파삭파삭 말라가는 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너털웃음을 짓고 다음 스케줄을 소화하는 일. 그러나 나는 또 외로운 것이다. 사람들 틈에서 열심히 떠들다 집으로 타박타박 걸어갈 때, 세수를 하다 문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볼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울컥하는 것이다. 어금니를 깨무는 것이다. 끝끝내 눈물은 흘리지 않으려 애쓰는 것이다. 그건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도시인은 으레 속으로 삭혀야 하니까.
오늘도 우리는 어제보다 조금 더 낡은 바퀴처럼, 또 굴러간다. 덜커덩덜커덩, 미련과 그리움을 안고. 서울이라는 이 복잡한 도시에 생채기 같은 “스키드 마크”를 내러. 어느 날, 우리는 마침내 종점에 다다라 마음 놓고 눈물을 흘릴 것이다. “번민”에 지친 “바퀴는 끝내 울음을 터뜨”릴 것이다. 꺽꺽, 시원하게 비명도 좀 내지르며.
* 오은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
고양이 한 마리
도로 위에 낙엽처럼 누워 있다
몸통이 네모나고 다리가 둥글게 말린
코끼리 같은 버스가
죽은 고양이 앞에 애도하듯 멈춰 있다
누군가 말한다
스키드 마크는
바퀴도 번민한다는 뜻이지
누군가 답한다
종점에서 바퀴는 울음을 터뜨릴 거야
새 시장은 계몽된 도시를 꿈꾸지만
시민들은 고독하고 또한 고독하다
했던 말을 자꾸 되풀이하는 것이 그 증거다
멀리서 아련히 사이렌이 울린다
한때 그것은 독재자가 돋우는 공포의 심지였으나
이제는 맹인을 이끄는 치자꽃 향기처럼 서글프다
누군가 말한다
두고 봐
종점에서 바퀴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 거야
하루 또 하루
시민들은 고독하고 또한 고독하다
친구들과 죽은 자의 차이가 사라지는 것이 그 증거다
한 사람 또 한 사람
고양이 한 마리 또 한 마리
―심보선 ‘눈앞에 없는 사람’(문학동네, 2011)에서
미련과 그리움 안고 오늘도 굴러간다
마침내 종점에 다다른 바퀴는 나이를 먹으면서 상가(喪家)에 가는 일이 점점 늘어났다. 처음으로 장례식장에 가서 구두를 벗을 때가 생각난다.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구두가 잘 벗겨지지 않았다. 딱 맞거나 작은 구두가 아니었는데도, 한쪽 발을 들고 한 손으로 발뒤꿈치를 잡은 채 낑낑대며 겨우 구두를 벗었다. 나는 본의 아니게 장례식장에서 소란을 피우고야 말았던 것이다. 힘겹게 구두를 벗고 나서야 비로소 남들이 다 하는 의례에 참여하게 됐다. 상주에게 애도를 표하고 흰 와이셔츠에 까만 재킷을 입은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일. 나는 구석에 앉아 한 사람의 죽음 때문에 이곳에 모여든 이들에 대해 가만가만 생각해봤다.
한 사람이 저세상으로 갔을 때 남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기껏해야 일 년에 한 번씩 제사상을 차리고 예를 올리는 게 다다. 불쑥불쑥 덮치는 그리움을 참다못해 시원하게 통곡하는 게 다다. 한 사람의 죽음은 그렇게 희미해진다. 잠잠해진다. 슬프게도 죽음은 예삿일이 돼버리고, 우리는 의도치 않게 너무 빨리 늙는다. 너무 빨리 아련해진다.
장례식장에 가는 횟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나 역시 죽음에 조금 더 가까워지는 일. 어쩔 수 없이 소멸에 친숙해지는 일. 친구의 아버지, 존경하던 선생님, 좋아하던 연예인, 피붙이 같던 친구들을 마침내 놓아주는 일.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내일을 맞이하고 묵묵히 내 일을 다시 시작하는 일. “고독하고 또한 고독”해지는 일. 그와 동시에 단단하고 또한 단단해지는 일. “코끼리 같은 버스”에서 내려 또박또박 걸어가는 일. 나도 모르는 사이, 죽음이란 것에 점점 무뎌지는 일. 그래서 시인은 다시 납작해진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도로 위에 낙엽처럼 누워 있”는 “고양이 한 마리”의 모습에 대해, “멀리서 아련히” 울리는 “사이렌”에 대해, 몇 시간 후 내 기억에서 감쪽같이 사라질 무명씨들의 죽음에 대해.
그것은 어쩌면 장례식장에서 “했던 말을 자꾸 되풀이하는” 사람이 돼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 또 한 사람”을 보내며 생사의 덧없음에 대해 고개 끄덕이는 일. 그렇게 눈물을 조금씩 다 쏟아내 파삭파삭 말라가는 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너털웃음을 짓고 다음 스케줄을 소화하는 일. 그러나 나는 또 외로운 것이다. 사람들 틈에서 열심히 떠들다 집으로 타박타박 걸어갈 때, 세수를 하다 문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볼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울컥하는 것이다. 어금니를 깨무는 것이다. 끝끝내 눈물은 흘리지 않으려 애쓰는 것이다. 그건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도시인은 으레 속으로 삭혀야 하니까.
오늘도 우리는 어제보다 조금 더 낡은 바퀴처럼, 또 굴러간다. 덜커덩덜커덩, 미련과 그리움을 안고. 서울이라는 이 복잡한 도시에 생채기 같은 “스키드 마크”를 내러. 어느 날, 우리는 마침내 종점에 다다라 마음 놓고 눈물을 흘릴 것이다. “번민”에 지친 “바퀴는 끝내 울음을 터뜨”릴 것이다. 꺽꺽, 시원하게 비명도 좀 내지르며.
* 오은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