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로서 시를 통해 언어의 정갈함을 배운다. 쏟아지는 말의 성찬보다 단아한 한마디 문장의 힘을 믿는다. 시인은 심정의 우물을 들여다보고 언어를 길어 올린다. 신문 편집자는 뉴스의 홍수 속에서 헤드라인으로 세상을 명명한다. 편집자는 늘 시인을 좇는다. 시인이 옹색해지는 시대엔 편집자도 궁색해진다. 시인과 편집자는 ‘언어의 조탁’이라는 우정을 두르고 때때로 어깨동무한다.
가슴이 휑해질 때 시집을 펼쳐 본다. 불온한 시대의 시 한 편은 시대의 심정을 꿰뚫는 메타포였다. 시의 힘은 이미지의 힘이고 메시지의 힘이다. 60여 편의 시를 묶은 한 권의 시집엔 작고 외롭고 사소한 것을 통해 본 세상사 이치가 형상화돼 있다. 시집 제목은 세상을 향한 시인의 말 걸기다. 한 시대의 이름이 된 시집이 있다. 시대의 명명력을 획득한 시집 타이틀은 문학의 기억장치로 오래오래 남는다.
‘섬’ ― 정현종, 1991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시인의 가장 짧은 시다. 1991년 출간한 시집 제목은 바로 이 짧은 시의 첫 문장에서 따왔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는 문장은 현대인의 실존적 상황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군더더기 하나 없이 설파한 절창이다. 세인은 정 시인의 수백 편 시 가운데 그를 연상하는 핵심 이미지로 이 타이틀을 떠올린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中 ― 정희성, 1978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정희성 시인이 1978년 펴낸 두 번째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시집 제목으로는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명 타이틀로 평가된다. 묵묵한 노동. 하루의 저묾과 삽자루에 맡긴 인생의 저묾. 썩어가는 샛강에 비친 달. 개발독재시대를 사는 도시 빈민의 열악한 상황을 극명하게 암시했다. 고단한 노동의 삶을 여덟 글자에 탁월하게 압축했다.
‘눈물은 왜 짠가’中 ― 함민복, 2003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아저씨가 안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 주셨습니다. (중략) 주인 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만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함민복 시인은 가난을 통탄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날선 폭력성을 탓하지 않는다. 가난이 자신에게 무슨 의미고, 가난과 뒤섞이며 살아가는 일상적 느낌이 무엇인지 담담하게 들려준다. 피부처럼 살가운 가난 속 어머니의 사랑이 가슴 절절하게 와 닿는 작품이 바로 ‘눈물은 왜 짠가’다. 힘겨운 삶을 헤쳐나갈 수 있는 ‘성장 동력’은 바로 ‘가난 속 어머니의 힘’이 밑받침하는 덕에 가능했다. 여전히 가난한 21세기 일상 속 사람은 함 시인의 짜디짠 눈물로 위로받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