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권이 우주 출판인 배려는 기본 중 기본](https://dimg.donga.com/egc/CDB/WEEKLY/Article/20/11/09/19/201109190500022_2.jpg)
필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 있다. 1990년대 중반 근무하던 출판사에서 한 예술서를 출간하면서 벌어졌던 일이다. 필자보다 연륜이 한참 적은 북디자이너에게 당시 필자 월급보다 3배나 많은 작업비를 준 것. 북디자이너는 그 두꺼운 책의 편집디자인을 보름 만에 끝냈다. 문제는 작업비가 아닌, 편집디자인의 완성도였다. 그 일을 계기로 필자는 한 문화센터에 북디자인 강좌 신설을 부탁했다. 강사로는 한국 북디자인 개척자인 정병규 선생을 추천했다. 자기 분노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그 강좌를 계기로 정 선생을 쫓아다니며 알게 된 이가 일본과 중국을 대표하는 북디자이너 스기우라 고헤이와 뤼징런 선생이다. 각 나라를 대표하는 북디자이너는 문화와 사상에 대한 식견이 워낙 뛰어나 늘 많은 가르침을 안겨준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기만 해도 많은 공부가 됨은 물론이다. 2004년 도쿄국제도서전에서 스기우라 선생의 ‘책의 시공(時空)을 보다’라는 강연을 들었다. 그는 책의 원형인 종이 전지 한 장을 30번 접은 것을 잘라 이으면 그 거리가 38만5000km가 돼 달까지의 거리와 같으며, 53번 접으면 1억5000만km로 태양까지 이를 수 있다는 통계를 보여줬다. 그러면서 종이가 가진 추상적인 기능성의 개념이 아닌, 광대한 공간(거리)이 책 한 권에 담겨 있음을 함축적으로 설명하면서 한 권의 책이 곧 우주라는 결론을 도출해냈다.
강연이 끝난 후 스기우라 선생에게 정 선생이 디자인한 책을 선물했다. 그는 일본 제자들 앞에서 그 책을 넘겨가며 한국 북디자인이 가진 여백의 미를 제대로 보라는 설명을 꽤나 오랫동안 했다. 이때 필자는 책은 글뿐 아니라 행간과 여백까지 읽어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을 깊이 각인했다.
2007년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뽑힌 그림책 ‘나는 한 마리 개미’(저우쭝웨이 글, 주잉춘 그림, 펜타그램)는 책에서 여백이 얼마나 많은 상상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책의 많은 부분은 흰 여백에 작은 개미의 움직임만을 간결하게 보여준다. 정 선생은 이 책의 여백은 개미에게는 한없이 크고 넓기만 한 인간 세상이라고 해석했다. 총천연색의 세속적인 인간 세상이 표백돼 여백으로 책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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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출생.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학교도서관저널’ ‘기획회의’ 등 발행. 저서 ‘출판마케팅 입문’ ‘열정시대’ ‘20대, 컨셉력에 목숨 걸어라’ ‘베스트셀러 30년’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