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서도 여전히 아이의 영혼을 갖고 살아갈 수 있고, 어려서는 어른의 영혼을 가진 의젓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만인이 반기는 축복받은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인생이라는 삶의 곡선은 이와 반대이기 십상이다. 작가 마크 트웨인은 인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인생에서 가장 좋은 것은 처음에 오고, 가장 나쁜 것은 맨 마지막에 온다.”
미국 문학사에서 기념비적인 이 말은 1920년대, 당시 26세이던 스콧 피츠제럴드의 마음을 강렬하게 움직였다. 그 유명한 ‘위대한 개츠비’를 쓰기 몇 년 전 피츠제럴드는 이 말에서 영감을 얻어 단편 한 편을 준비했는데, 순간 인생에서 맛없는 사과를 먼저 먹게 되는 한 사나이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1860년대에 미국에서 태어나 육아용품으로는 지팡이와 시가가 필요했고, 30대인 아버지보다 할아버지들과 같이 있는 것을 더 좋아했던 한 소년의 이야기다. 그 소년에게 시간은 거꾸로 흘러, 50대에 20대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다소 황당한 내용이다. 재기 발랄한 만화 같은 이 단편은 ‘벤자민 버튼의 흥미로운 사건’이라는 제목으로 세상의 빛을 봤고, 이후 40여 년간 할리우드의 각종 공연 소재로 등장했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감독 데이비드 핀처)의 출발점도 바로 이 단편이다.
영화는 시간대를 1918년 남부로 옮겨, 미국의 역사를 관통하며 점점 젊어지는 벤자민 버튼의 회고와 그가 사랑했던 데이지(‘위대한 개츠비’의 여주인공인 바로 그 데이지의 이름에서 땄으리라 짐작되는)의 회고가 쉼 없이 교차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영화 시작부터 아들을 잃은 시계공이 거꾸로 가는 시계를 만들어내듯, 그리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거꾸로 돌리는 장면이 등장하듯 이 영화는 진정 시간을 위한, 시간에 의한, 시간의 영화다.
피츠제럴드의 머릿속에서 시간예술로 승화한 이 영화는 상영시간 2시간43분 내내 물화(物化)되어 관객의 땀구멍 사이로 흘러든다. 관객들은 이 긴 시간 동안 꼼짝없이 이야기에 빠져든다. 데이비드 핀처 감독이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주고 싶은 것은 우리가 늙어가면서 상실하는 것, 그러나 늙어가면서도 변함없는 어떤 것에 대한 성찰, 시간 속에 발을 담글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에 관한 것이 아닐까 싶다.
영화 속에서 나이가 점점 젊어지는데도 벤자민은 “내 인생이 얼마나 남았을까?”라고 읊조린다. 60대에 들어선 데이지가 20대로 젊어진 청년 벤자민에게 “모든 게 변했어”라고 하자, 벤자민은 “변하지 않는 뭔가가 있다”며 오히려 그녀를 위로한다.
벤자민은 그만의 독특한 인생을 살면서 노인으로 유년기를 보낸 것에 대해 슬퍼하지 않고, 청년으로 노년기를 보내는 것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벤자민은 데이지가 어디에 있든 “잘 자, 데이지”라고 밤 인사를 보낸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는 죽고 아버지에게 버림받아 양로원에서 길러지는 벤자민의 삶은 주변 노인들의 숱한 죽음의 연대기들과도 잇닿아 있다. 각자의 스토리를 짊어지고 사는 이들은 모두 자신의 시간과 인생의 옷감에 매달린 단추들처럼 조롱조롱하다. 그래서 핀처 감독은 벤자민 주변 노인들의 회고담을 자신이 좋아하는 버스터 키튼 식의 무성영화로 기꺼이 옮겨 보탠다. 이야기의 곁가지를 더해줄 뿐인 이러한 회고담 방식은 ‘아멜리에’나 ‘인게이지먼트’의 장 피에르 주네의 연출이 그러하듯, 사람과 사람의 불가분한 관계망과 스쳐가는 인연을 거미줄처럼 엮어낸다.
브래드 피트, 80대부터 20대까지 완벽한 소화
물론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라도 영화에서 가슴 깊숙이 꽂히는 서정적인 부분은 50대에 들어선 중년의 남자가 20대 소녀를 사랑하고, 그 이후에는 사랑하는 여인이 늙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남자의 비극적인 인생일 것이다. 두 사람은 마흔이 돼서야 스치듯이 인연을 포갠다. 그 이전까지 벤자민은 꽃다운 나이의 데이지가 딴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이후 데이지는 늙어버린 자신의 육체를 젊디젊은 벤자민 앞에서 드러내는 것을 감내해야 한다.
80대부터 20대까지 소화해낸 브래드 피트와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는 말할 나위 없이 발군이고, 할리우드의 찬탄할 만한 특수효과는 그 모든 시간의 마법에 천금 같은 사실성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세븐’ ‘파이트 클럽’ 등 스릴러 장르에 의지해 시각적 이미지의 연금술사로 화려하게 할리우드에 등극한 감독 핀처가 이제는 점점 더 원숙한 이야기꾼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절감한다.
이 영화는 오래된 가족 사진첩을 넘겨보듯 깊은 상념에 빠지게 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그동안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생의 단면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늙어갈 수 있는 것, 동질적 기억의 밀도로 묶인 동시대 사람들과의 연대에 동참할 수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감사해야 할 것들이다. 사람들은 시간을 대적할 수 없는 괴물로 여긴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들이 누리는 모든 것은 시간이 주는 선물이 아닐까.
‘포레스트 검프’의 각본가 에릭 로스의 대사 한 대목처럼 인생은 ‘지나간 세월 앞에서 미친개처럼 돌아버릴 수도 있고 운명을 탓하며 욕할 수도 있지만, 결국 끝이 다가오면 그냥 지나가게 놔둬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생은 한 다스의 초콜릿 박스 같다’고 표현한 영화 ‘포레스트 검프’처럼 이 영화는 ‘인생은 한 다스의 단추 상자와 같다’고 말한다. 시간의 오랏줄에 매달린 단추 같은 우리네 삶을.
“인생에서 가장 좋은 것은 처음에 오고, 가장 나쁜 것은 맨 마지막에 온다.”
미국 문학사에서 기념비적인 이 말은 1920년대, 당시 26세이던 스콧 피츠제럴드의 마음을 강렬하게 움직였다. 그 유명한 ‘위대한 개츠비’를 쓰기 몇 년 전 피츠제럴드는 이 말에서 영감을 얻어 단편 한 편을 준비했는데, 순간 인생에서 맛없는 사과를 먼저 먹게 되는 한 사나이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1860년대에 미국에서 태어나 육아용품으로는 지팡이와 시가가 필요했고, 30대인 아버지보다 할아버지들과 같이 있는 것을 더 좋아했던 한 소년의 이야기다. 그 소년에게 시간은 거꾸로 흘러, 50대에 20대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다소 황당한 내용이다. 재기 발랄한 만화 같은 이 단편은 ‘벤자민 버튼의 흥미로운 사건’이라는 제목으로 세상의 빛을 봤고, 이후 40여 년간 할리우드의 각종 공연 소재로 등장했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감독 데이비드 핀처)의 출발점도 바로 이 단편이다.
영화는 시간대를 1918년 남부로 옮겨, 미국의 역사를 관통하며 점점 젊어지는 벤자민 버튼의 회고와 그가 사랑했던 데이지(‘위대한 개츠비’의 여주인공인 바로 그 데이지의 이름에서 땄으리라 짐작되는)의 회고가 쉼 없이 교차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영화 시작부터 아들을 잃은 시계공이 거꾸로 가는 시계를 만들어내듯, 그리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거꾸로 돌리는 장면이 등장하듯 이 영화는 진정 시간을 위한, 시간에 의한, 시간의 영화다.
피츠제럴드의 머릿속에서 시간예술로 승화한 이 영화는 상영시간 2시간43분 내내 물화(物化)되어 관객의 땀구멍 사이로 흘러든다. 관객들은 이 긴 시간 동안 꼼짝없이 이야기에 빠져든다. 데이비드 핀처 감독이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주고 싶은 것은 우리가 늙어가면서 상실하는 것, 그러나 늙어가면서도 변함없는 어떤 것에 대한 성찰, 시간 속에 발을 담글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에 관한 것이 아닐까 싶다.
영화 속에서 나이가 점점 젊어지는데도 벤자민은 “내 인생이 얼마나 남았을까?”라고 읊조린다. 60대에 들어선 데이지가 20대로 젊어진 청년 벤자민에게 “모든 게 변했어”라고 하자, 벤자민은 “변하지 않는 뭔가가 있다”며 오히려 그녀를 위로한다.
벤자민은 그만의 독특한 인생을 살면서 노인으로 유년기를 보낸 것에 대해 슬퍼하지 않고, 청년으로 노년기를 보내는 것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벤자민은 데이지가 어디에 있든 “잘 자, 데이지”라고 밤 인사를 보낸다.
남녀 주인공 역을 맡은 브래드 피트와 케이트 블란쳇은 각자 거꾸로 세월을 산다.
브래드 피트, 80대부터 20대까지 완벽한 소화
물론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라도 영화에서 가슴 깊숙이 꽂히는 서정적인 부분은 50대에 들어선 중년의 남자가 20대 소녀를 사랑하고, 그 이후에는 사랑하는 여인이 늙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남자의 비극적인 인생일 것이다. 두 사람은 마흔이 돼서야 스치듯이 인연을 포갠다. 그 이전까지 벤자민은 꽃다운 나이의 데이지가 딴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이후 데이지는 늙어버린 자신의 육체를 젊디젊은 벤자민 앞에서 드러내는 것을 감내해야 한다.
80대부터 20대까지 소화해낸 브래드 피트와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는 말할 나위 없이 발군이고, 할리우드의 찬탄할 만한 특수효과는 그 모든 시간의 마법에 천금 같은 사실성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세븐’ ‘파이트 클럽’ 등 스릴러 장르에 의지해 시각적 이미지의 연금술사로 화려하게 할리우드에 등극한 감독 핀처가 이제는 점점 더 원숙한 이야기꾼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절감한다.
이 영화는 오래된 가족 사진첩을 넘겨보듯 깊은 상념에 빠지게 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그동안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생의 단면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늙어갈 수 있는 것, 동질적 기억의 밀도로 묶인 동시대 사람들과의 연대에 동참할 수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감사해야 할 것들이다. 사람들은 시간을 대적할 수 없는 괴물로 여긴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들이 누리는 모든 것은 시간이 주는 선물이 아닐까.
‘포레스트 검프’의 각본가 에릭 로스의 대사 한 대목처럼 인생은 ‘지나간 세월 앞에서 미친개처럼 돌아버릴 수도 있고 운명을 탓하며 욕할 수도 있지만, 결국 끝이 다가오면 그냥 지나가게 놔둬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생은 한 다스의 초콜릿 박스 같다’고 표현한 영화 ‘포레스트 검프’처럼 이 영화는 ‘인생은 한 다스의 단추 상자와 같다’고 말한다. 시간의 오랏줄에 매달린 단추 같은 우리네 삶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