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한 서양 음식으로 상류층과 지식인들을 모이게 한 1930년대 미쓰코시 백화점 모습.
이것만 놓고 보면 요즘 설렁탕에 대한 찬사와 별반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1927년 10월1일자 ‘별건곤’(제9호)이란 잡지에 실린 것이다. 필명을 B 기자라고 밝힌 이 글의 제목은 ‘추탕집 머슴으로 이틀 동안의 더부살이’다. 요즘과 달리 미꾸라지를 구할 수 있는 음력 8월에야 문을 여는 서울 회동의 H추탕집은 당시 색다른 맛으로 소문난 집이었다. B 기자는 그 소문의 발원지를 찾아서 독자에게 진면목을 알려준다.
카페에 간 청년과 ‘낭자’들의 즐거운 한때를 그린 김규택의 ‘세모풍경’ (사진 인용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각계각층 손님 모인 1920년대 ‘추탕’집 풍경 담아
손님에 대한 언급 역시 빠뜨리지 않는다. “아침부터 밤까지 두고 보니 각 방면의 갖가지 인사가 번갈아 들어오시지 않겠어요. 수염이 석 자 세 치라도 먹어야 양반이라더니 전에는 이런 곳에 좀처럼 들르지도 아니하실 듯한 신사가 삼척장발(三尺長髮)을 늘이고 말쑥한 양복으로 혼자 오시기도 하고, 둘을 데리고 오시고, 학교 선생님도 저고리 바람으로 오시고, 두루마기를 입고도 오셨다.” 가히 1920년대 말 식민지 서울의 추어탕집에서 일어난 사민평등(四民平等)의 실체를 확인하는 듯하다.
‘별건곤’ 1927년 8월호 삽화. 카페 안과 밖을 대조시킨 점이 흥미롭다.
‘신동아’ 1923년 6월호 삽화. 모던한 레스토랑의 모습(아래).카페 여급의 모습. ‘조광’ 1935년 11월호 삽화.
1928년 5월1일자 ‘별건곤’(제12, 13호)에는 이정섭(李晶燮)이란 작가가 쓴 ‘외국에 가서 생각나던 조선 것-조선의 달과 꽃, 음식으로는 김치, 갈비, 냉면도’라는 글을 실었다.
“내가 불란서에서 유학하던 중에 제일 그리웠던 것은 조선의 달과 진달래꽃(杜鵑花)이었다. …그뿐이냐. 동지섣달 추운 날에 백설(白雪)이 펄펄 흩날릴 때에 온돌(溫突)에다 불을 뜨뜻이 때고 3, 4우인(友人)이 서로 앉아 갈비 구워 먹는 것이라든지 냉면(冷麵) 추렴을 하는 것도 퍽 그리웠다. 그리고 양식(洋食)을 먹은 뒤에는 언제든지 김치 생각이 퍽 간절하였다. 김치야말로 외국의 어느 음식보다도 진품(珍品)이요 명물(名物)일 것이다.”
조선 후기 비딱했던 지식인 연암 박지원조차도 중국을 여행하면서 숟가락을 달라고 요구하다 망신을 당한 일 외에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이정섭처럼 솔직하게 ‘열하일기’에 남기지 않았다. 그야말로 근대의 도래는 조선의 지식인에게 음식을 두고 나름대로 온갖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도록 만들어준 새로운 세상이었다.
이런 새로운 발견은 근대적 직업이던 소설가나 시인들에게 음식을 이야기로 다루게 했다. 소설가 김량운은 1926년 ‘동광’(제8호)에 소설 ‘냉면’을 발표했다. 세계 경제의 침체로 생활이 어려웠던 시절, 신문사 기자인 순호는 여름이 극성을 부리는 8월 줄어든 월급봉투를 들고 집을 향하다 전차가 종로 근처에 이르자 갑자기 냉면이 너무 먹고 싶었다. 돼지편육과 채를 썬 배쪽, 그리고 노란 겨자를 위에 얹은 냉면 한 그릇을 갑자기 생각하고는 얼마나 급했는지 차장에게 ‘정차’란 말 대신 ‘냉면’이라고 외쳤다.
외국 음식 밀려오자 ‘조선요리의 특색’이란 글 싣기도
평양 사람들이나 먹었던 냉면을 난생 처음 서울 사람들이 먹게 되면서 생긴 기막힌 사연이 소설의 제목으로까지 등장했으니, 요즘 음식을 주제로 한 각종 이야깃거리가 결코 최근에 일어난 일이 아님을 확인한다.
왜냐하면 적어도 19세기 말까지 서울에서 변변한 음식점이란 종로 피맛골 골목에 있던 선술집과 재동 주택가에 있던 내외주막 정도였다. 상업도시가 별로 없었고, 사람들의 여행도 생각만큼 흔하지 않았다. 그런데 19세기 말부터 서울이 점차 근대적 상업도시로 탈바꿈하면서 전차, 자동차, 전화기, 신문 등과 함께 ‘식당’도 근대적 산물로 등장했다.
그러니 이런 변화의 물결을 주도하던 근대 지식인들에게 식당과 그곳에서 판매하는 음식은 당연히 화젯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서양식당, 중국식당, 일본식당 따위가 서울 거리에 등장하니 그 신기함은 모던보이와 모던걸을 모이게 하는 집합처가 되었다.
1933년 1월15일자 조선일보에는 ‘카페-낭자국(娘子國)에서는 소시민국(小市民國) 공주들의 ‘스위하트’들을 흘려다가 ‘칵텔(칵테일)’과 ‘폭스트로트’에 소위 ‘곤약(야)구’를 만드는 한편, 자막대기를 잠결에도 휘두르며 꿈속에서도 늦게 술 취해 들어오는 남편을 벼르는 여성들은 그동안 이만저만하게 남편과 쟁의를 해보지 않은 게 아니지만, 33년에는 ‘마담’병대(兵隊)를 조직하여 몽둥이를 제각기 들고 카페 문전에서 공략을 취할 것이다. ‘카페’광들 카페 출입에 ‘마담’의 몽둥이를 당해낼 전략을 생각하였는가?’라는 기사가 실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식민지 상황에서 일본을 거쳐 들어온 서양의 대중문화와 음식을 접하면서 이른바 ‘조선음식’에 대한 관심과 논의도 근대 지식인에게는 중요했다.
대한제국 마지막 연회 책임자였던 안순환(安淳煥, 1871~1942)은 1928년 5월1일자 ‘별건곤’에 ‘식도원주(食道園主) 안순환’이란 이름으로 ‘조선요리의 특색’이란 글을 실었다. 그는 서양음식, 중국음식, 일본음식과 조선음식을 비교하면서 조선음식은 첫째, 제철에 나는 재료로 만든 음식이 많고 둘째, 양념으로 인해 음식맛이 좋고 그것이 독기를 없애 소화가 잘되며 셋째, 음식 배열의 규칙이 정연하고, 넷째, 여러 가지 음식을 한 상에 모두 놓아서 손님을 접대하는 데 좋다고 했다.
음식점보다 유흥장으로 변한 ‘요리옥’ 비판
카페 여급의 모슴. '조광' 1935년 11월호 삽화.
당시 남성 지식인들이 음식과 식당을 두고 이런저런 글을 썼지만, 그들은 음식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음식점의 분위기와 그곳에서 느끼는 감성을 더 강조했다. 결국 일제강점기에 생긴 근대적 식당 역시 밥집이 아니라 술집이었고, 그래서 남성들의 정치적 관계가 이뤄지는 곳이었다. 그러니 음식에 대한 근대 지식인의 레시피는 단지 근대적 분위기에 도취한 결과였다.
이런 ‘전통’이 한동안 노작가들의 ‘소일거리’가 되어 ‘맛있는 집’ 순례가 신문과 잡지에 이어졌다. 그러나 진정한 음식비평가가 이 땅에 등장했는지는 회의적이다. 아마도 여전히 우리에게 외식은 특별한 일이고, 음식은 ‘어머니 밥상’처럼 낭만적이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