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숙명여대와 효성여대, 평택대 등에서 사학을 가르치고 삼균학회 학술연구위원장을 지낸 조항래 전 교수. 그는 4년 전 현직에서 완전히 은퇴했지만, 한말 일제침략의 역사에 대한 탐구열과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
“일제의 침략과 강점, 그리고 독립운동과 친일파의 관계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첫 번째 단계인 일제침략 과정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독립운동사와 친일파에 대한 연구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국민이 독립운동사에는 관심을 가지면서도 일제침략사에는 별로 주목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미개척 분야이던 일제침략 과정에 대한 연구는 쉽지 않았다. 국내에 남아 있는 자료도 거의 없을 뿐 아니라 일본에 남아 있는 관련 문서 대부분이 기밀문서에 해당돼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 전 교수는 자신의 연구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만한 자료가 있는 곳은 어디든지 달려갔다. 1976~77년께 일이다. 일본 나라(奈良)현의 한 대학에서 활동 중인 ‘조선학회’로부터 초청장이 왔다. 조 전 교수는 그걸 기회로 한동안 일본에 머물면서 도쿄대학 및 교토대학 도서관, 국회도서관, 도요(東洋)문고 등 고서적을 보관하고 있는 곳을 모조리 뒤졌다.
지금까지 20여 권 저서와 200여 편 논문 발표
그때 한 고서점에서 입수한 자료가 북한에서 발행한 ‘역사문제연구’라는 책이다. 유신정권 시절에 그런 책을 국내로 반입했다가는 곧바로 ‘철창행’이었지만 조 전 교수는 다른 자료 속에 몰래 숨겨서 들여왔다. 독일이 통일되기 전 동베를린에서 열린 ‘한국학회’에 참석했다가 공산권 학자들에게서 얻은 자료도 신변의 위협을 감수하면서 숨겨 들여오기도 했다.
조 전 교수는 “친일파들은 만나는 것 자체를 꺼렸다. 자료도 은밀한 것이 많아서 구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정말 눈치 봐가며 공부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고 과거를 회상했다.
조 전 교수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지금까지 모두 20여 권의 저서와 2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가운데 8편의 글을 하나로 묶어 2006년 4월 ‘한말 일제의 한국침략사연구’라는 단행본으로 발간해 문화관광부로부터 올해의 우수 학술도서로 선정됐다.
조 전 교수는 “이 책에는 일본 외무성에서 편찬한 ‘신사체경일기’와 제2차 수신사인 김홍집의 ‘조선책략’이라는 자필본이 포함돼 있는데, 내가 처음 발굴한 자료들로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내용을 보면 강화도조약 당시 일본이 어떤 수작을 부렸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조 전 교수는 이어 “국내에 일제침략사라는 이름으로 책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이 분야 연구가 미진했다”며 후학들에게 한마디 당부를 전했다.
“한말 일제침략사 등 그늘진 역사에 대한 연구 없이 독립운동사나 친일파 등 다른 부분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기는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