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해협에서 자국 유조선을 호위하고 있는 러시아 해군 호위함 어드미럴 그리고로비치. 영국 해군 제공
당시 호송선단을 이끈 군함은 러시아 태평양함대의 주력 수상전투함인 스테레구시급 초계함 소베르셴니와 레즈키였다. 만재배수량 2200t 정도에 불과한 작은 배지만 S-400 방공 시스템에 들어가는 9M96 중거리함대공미사일, 3M24 함대함미사일과 대잠헬기까지 탑재한 고성능 전투함이다. 구형함 위주인 러시아 태평양함대에서 비교적 신형으로 분류되는 스테레구시급은 6척뿐이다.
화물선 6척에 러시아 전투함·지원함 4척
그런 점에서 이번에 호송 임무를 수행한 2척은 러시아 태평양함대가 한 번에 동원할 수 있는 초계함 전력으로는 사실상 최대 규모다. 해군 함정은 3분의 1씩 나뉘어 작전, 훈련, 정비·수리를 반복하는 3직제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이 선단에 1만2900t급 유류 보급함 1척과 수리·예인을 위한 지원함 1척도 붙였다.러시아 태평양함대 주력 전투함의 호위를 받아 항해 중인 6척 가운데 선박자동식별장치(AIS) 정보로 선박명이 확인된 것은 5척이다. 각각 MV 마이아 1호와 MV 레이디 D호, MV 레이디 R호, MV 카피탄 다닐킨호, MV 레이디 마리아호다. 이들 선박은 카피탄 다닐킨을 제외하고는 국제법 위반 혐의로 제재 대상이거나 제재를 받은 해운사 소속이다. MV 레이디 R호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미국과 유럽연합(EU)의 금수 조치를 위반하고 러시아와 이란, 북한 등을 오가며 불법무기를 실어 나른 혐의로 미국 재무부, EU, 한국으로부터 제재를 받고 있다. 나머지 선박은 러시아·이란·북한을 오가며 드론과 탄약 등 불법무기를 수송한 혐의로 미국과 유럽에서 제재를 받아온 러시아 해운회사 MG-Flot LLC 소속이다.
AIS 신호를 분석해보면 이들 화물선은 4월 23일(이하 현지 시간)부터 5월 3일 사이 블라디보스토크, 보스토치니를 출항해 동해 공해상에서 러시아 군함들과 합류했다. 그리고 9일 오후부터 10일 오전 사이 쓰시마해협을 통과했다. 이들은 12∼13일 일본 오키나와 열도와 대만 사이에 있는 요나구니섬 인근 해역을 통과하고, 14일 대만과 필리핀 사이 바시해협을 지나 남중국해에 진입한 후 AIS를 껐다. 이들 선박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가벼운 화물 실은 것으로 추정
동해에서 바시해협까지 러시아 선단을 추적한 일본 해상자위대는 자국 언론에 “러시아는 태평양함대 군함들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배치될 때 이를 사전에 발표했지만, 이번에는 사전 발표가 없었다”면서 “해당 호송선단의 항해 목적을 분석 중”이라고 밝혔다. 쓰시마해협에서부터 이 선단을 추적한 일본 고속정 시라타카 측이 촬영한 사진을 보면, 화물선 6척 중 4척의 구상선수(둥근 뱃머리)가 수면 위로 노출됐고 흘수선도 여유가 많다. 만재 상태가 아니거나 가벼운 화물을 싣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배들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계속 지켜봐야겠지만, 고작 6척의 화물선에 주력 전투함 2척이 호위 전력으로 붙었다는 점에서 뭔가 중요한 화물이 실렸을 개연성이 커 보인다. 러시아가 자국 선박 보호를 위해 해군 함정을 동원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부터였지만, 이번처럼 화물선과 군함을 묶어 호송선단을 구성한 것은 처음이다.5월 기준 러시아가 자국 선박을 보호하는 호위 전력으로 투입한 군함은 총 6척이다. 대서양 방면에서 스테레구시급 초계함 수브라지텔니와 호위함 어드미럴 그리고로비치가 작전 중이다. 지중해에선 스테레구시급 초계함 스토이키, 어드미럴 고르쉬코프급 호위함 어드미럴 플로타 카사토노프가 확인된다. 대서양 방면의 수브라지텔니는 대서양에서 카리브해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쿠바를 오가는 선박들을 보호하고 있다. 어드미럴 그리고로비치는 영국해협을 오가는 자국 유조선을 영국 해군의 나포 시도로부터 지키고 있다. 스토이키와 어드미럴 플로타 카사토노프는 시리아 타르투스 항구를 거점 삼아 리비아, 말리 등 아프리카에서 활동하는 러시아의 용병 조직에 각종 불법무기와 보급품을 실어 나르는 선박을 호송하고 있다.
현재 대서양과 지중해에서 활동하는 러시아 해군 호위 전력은 ‘지역 방어’ 전략을 취한다. 보호해야 할 수송선에 비해 해군 전투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반면 최근 태평양에서 식별된 호송선단 운용 양상은 지역 방어가 아닌 ‘맨투맨’ 형태다. 그만큼 해당 선박에 실린 화물이 매우 중요한 물건은 아닐까 의심되는 정황이다.
호송선단은 해적과 사략선이 들끓던 대항해시대에 처음 등장했다. 당시 신대륙에서 채굴된 막대한 금과 은이 바닷길을 통해 유럽으로 향했다. 이 뱃길을 따라 해적은 물론, 정부의 승인을 받아 약탈을 일삼던 사략선이 판을 쳤다. 유럽 여러 나라는 이때부터 상선단에 군함을 동행시키기 시작했다. 독일 U보트가 악명을 떨친 제1·2차 세계대전 때도 호송선단이 맹활약했다. 양차 대전이 끝나고 국제법이 정립되면서 호송선단은 더는 필요하지 않게 됐다. 또한 국제법에 따라 모든 국가의 선박은 국제 수역에서 자유롭게 항해할 수 있는 항행의 자유를 누렸다. 특정 선박이 군사적 목적을 수행한다는 것을 명확히 증명하지 못하는 한 군함이 민간 선박을 공격하는 것은 전쟁범죄 행위로 처벌받는다. 그래서 지난 수십 년간 호송선단은 해적이 많은 소말리아 인근 바다 등 일부 해역에서만 제한적으로 활동했다.
이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했던 호송선단을 러시아가 부활시킨 이유는 뭘까. 지금 바다에서 러시아 선박을 위협하는 것은 해적이 아니라 미국과 유럽 등 서방 국가들의 해군이다. 러시아 선박이 공해상을 항해하다가 나포 또는 격침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처음으로 호송선단을 부활시킨 것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그림자 전쟁’
러시아가 불안에 빠진 근본적 원인은 자기네가 시작한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당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우크라이나 전장에 한정됐다. 그러나 러시아 본토는 물론, 흑해 연안과 발트해, 지중해, 심지어 유럽과 중동으로까지 전장이 확장됐다. 수없이 많은 나라가 직간접적으로 이 전쟁에 얽힌 실정이다. 예를 들어 북한은 직접 참전해 교전 당사국이 됐을 뿐 아니라,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는 데 필요한 대량의 무기와 탄약을 공급하고 있다. 이란의 경우 러시아에 드론과 탄약을 대량 지원했다. 중국도 드론, 차량, 탄약과 무기 원료를 러시아·이란·북한에 공급한 것은 물론, 러시아가 서방 제재를 피해 전쟁 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유럽에 이른바 ‘그림자 전쟁’ 형태로 도발을 시도 중이다. 유럽 각지 군수공장과 군사시설을 대상으로 한 방화·폭파 등 사보타주가 이어지고 사이버공격도 일상이 됐다.우크라이나와 서방 세계도 반격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2024년 가을부터 시리아 내전에 개입해 반군에 드론 부대를 파병함으로써 친러 아사드 정권 붕괴에 일조했다. 북아프리카 말리에서 러시아 용병 그룹을 공격하는가 하면, 지중해의 러시아 유조선과 화물선을 드론으로 공격하기도 했다. 최근 중동 각국이 이란의 자폭 드론 공격을 받자, 이들 나라에 요격 드론 부대를 보내 방공 작전을 돕고 드론 전력 강화도 지원하고 있다. 서방 국가들은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고 있다. 특히 불법무기나 제재 대상 원유를 실은 러시아 선박을 해상에서 차단·나포하는 활동을 확대 중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미국 CNN이 2024년 러시아 화물선이 스페인 앞바다에서 침몰한 사건을 재조명하며 “이 사건은 러시아제 잠수함용 원자로가 북한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 중 하나가 수행한 작전일 개연성이 있다”고 보도해 이목을 끌고 있다.
CNN이 재조명한 당시 사건 개요는 이렇다. 2024년 12월 23일 러시아 선적 화물선 MV 우르사 마요르가 스페인 인근 해역에서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해사당국에 신고된 내용에 따르면 12월 11일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출항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던 이 배는 지중해에 들어서고 얼마 안 된 22일 원인 불명의 폭발로 침몰했다. 22일 AIS 신호상 속도가 1노트 이하로 떨어지며 표류하기 시작한 우르사 마요르는 인근을 지나던 상선이 배에 접근했을 때 이미 선체가 크게 기울어진 상태였다. 이 배는 기관실에서 3번째 폭발이 발생하기 전까지도 조난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뒤늦게 스페인 해안경비대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배는 이미 침몰한 상태였다. 선장 등 14명이 극적으로 구조됐지만 2명은 탈출하지 못하고 선체와 함께 수심 2500m 아래로 가라앉았다.

일본 해상자위대가 포착한 러시아 호송선단의 화물선 중 일부. 일본 통합막료감부 제공
2024년 침몰 러 선박, 北에 원자로 운송 의심
그런데 해당 사건 발생 직후 러시아는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러시아는 우르사 마요르가 침몰한 해역으로 정보수집함 얀타르와 제29특임잠수함여단을 보냈다. 한 달 뒤인 1월 28일 러시아는 “이 배가 적대 국가의 테러 공격으로 침몰했다”고 발표했다. 공식적으로 이 배에 실린 화물은 380t 규모의 대형 항만용 크레인 2개였고 목적지는 블라디보스토크였다. 그런데 스페인 당국에 구조된 후 조사를 받은 선장과 승조원들은 “배에 핵연료가 포함 안 된 잠수함용 원자로 2개가 실렸다. 행선지는 블라디보스토크가 아닌 북한 라진항”이라고 진술했다고 한다. 배에 실린 원자로는 퇴역한 전략원잠에서 떼어낸 VM-4SG 가압경수로 2기로, 북한의 원자력 잠수함에 들어갈 물건이었다고 알려졌다. 이에 따라 미국은 사건 발생 해역에 WC-135W 기상정찰기를 보내 집중 정찰 작전을 수행했다. 원자로 손상에 따른 인공방사성동위원소 유출, 즉 방사능 오염 가능성을 조사한 것이다.우르사 마요르 선체에 가로 50㎝ 세로 50㎝ 구멍을 뚫어 순식간에 침몰시킨 무기로는 초공동 어뢰 바라쿠다가 지목됐다. 초공동 어뢰란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인공 기포를 만들고, 그 기포 속 공동(cavity)으로 로켓 추진 어뢰가 날아가도록 한 무기다. 현재 실전 배치된 초공동 어뢰는 러시아의 시크발과 이란이 이를 복제한 후트뿐이다. 당시 러시아 화물선을 침몰시킨 것으로 지목된 바라쿠다는 2005년 독일에서 시제품 12발이 제작된 뒤 개발이 취소됐다. 공식적으로는 실전에 배치된 적 없는 것이다. 바라쿠다는 최대속도 400㎞/h로 매우 빠르지만 사거리는 10㎞ 이내로 짧고 방향 전환이 불가능한 직주 어뢰다. 그런 점에서 선박이나 잠수함을 이용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쿠다 시제품을 우르사 마요르를 향해 발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아는 우르사 마요르가 침몰한 후 자국 선박에 대한 보호 조치를 크게 강화했다. 러시아가 선박 호송 작전을 전 세계 바다로 확대하면서 호송선단이 미국과 EU, 일본 등의 해군과 대치하는 일도 늘고 있다. 신냉전 구도가 심화할수록 러시아 그림자 함대 선박이 더 위험한 물건을 실어 나를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이들이 해상에서 서방 해군과 대치하거나 충돌할 여지도 커진다. 러시아 그림자 함대의 활동 영역에서 한반도 해역 역시 예외는 아닐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