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달할 수 없는 인류의 이상향을 그린 소설 ‘유토피아’의 저자 토마스 모어는 ‘4계절의 사나이’(사진 위)로 불렸다. 그건 문학가에다 법학자이자 유능한 정치가이기까지 했던 그의 다채로운 재능에 대한 헌사와도 같은 별명이었다. 그래서 그를 소재로 만들어진 1960년대의 걸작 영화 제목도 ‘4계절의 사나이’로 붙여졌다. 아카데미 작품상까지 수상한 영화는 이처럼 다재다능한 인물이 맞이한 비극적이고 장렬한 죽음을 생생히 그리고 있다.
영국왕 헨리 8세의 충직한 신하였던 모어는 두 가지 문제로 왕과 충돌을 빚는다. 역사상 유명한 앤 불린(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과의 결혼을 위한 이혼 및 영국 국교회의 창설 시도였다. 모어는 왕의 이혼과 재혼을 승인하지 않고 영국 국교회의 창설도 반대한다. 왕의 회유와 협박에도 끝내 고집을 꺾지 않은 그는 런던탑에 갇히고 만다. 감옥에 찾아온 딸과 아내가 살아남기 위해 배교할 것을 간청하지만, “나는 가톨릭 신앙을 위해 죽는다”고 거절한다.
“영혼을 파는 자는 세상을 다 얻어도 덧없다”는 게 그의 단호한 유언이었다. 모어는 이 죽음으로 훗날 자신의 화려한 이력에다 ‘가톨릭 성인’의 호칭까지 덧붙이게 된다.
그러나 종교분쟁의 악순환에서 희생된 이가 모어뿐만은 아니었다. 모어와 함께 수많은 사람이 헨리 8세에 의해 목이 날아갔고, 모어의 죽음 뒤로도 영국은 100여년간 종교 유혈극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영국은 대륙의 나라들에 비해 오히려 종교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비교적 빨리 벗어난 경우다. 영화 ‘여왕 마고’는 모어가 죽은 지 몇 십년 뒤 바다 건너 프랑스에서 일어난 종교 내전의 참극을 담고 있다. 바로 1572년 신교도 수천명이 하룻밤 사이에 떼죽음을 당한 ‘성바돌로매의 대학살’을 소재로 한 영화다.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무자비하게 죽음을 당하는 영화 속 학살극의 참상은 오늘날 그 어떤 전쟁터의 모습보다 끔찍하다.
영화 속 모어와 프랑스 신교도의 죽음을 지켜보노라면 오늘날 서구에서 누리고 있는 종교의 자유가 왜 가장 본질적 자유가 될 수밖에 없는지를 알 수 있다. 다른 무엇보다 수많은 사람의 피를 통해 얻어낸 귀중한 자유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종교의 자유는 단순히 한 종교를 선택할 권리만의 문제가 아닌 자기의 내심 또는 양심을 지킬 자유와 다름없었던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이 종교의 자유, 혹은 양심의 자유가 어떻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두 가지 사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송두율 교수의 경우다. 송교수를 둘러싼 논란의 핵심에는 학자로서의 양심의 자유의 한계를 얼마나 인정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었다. 이 문제를 둘러싼 본질적인 논란은 별개로 치고 다만 공교로웠던 것은 그가 학문 활동을 했던 곳이 독일의 뮌스터였다는 점이다. 뮌스터는 중세 이후 유럽을 휩쓴 종교전쟁의 결정판인 30년 전쟁의 종전 조약인 베스트팔렌조약이 맺어진 베스트팔렌 주의 주도다. 이 조약을 통해 유럽의 종교 유혈극은 대체로 막을 내리고 종교의 자유가 국제적으로 공인된다. 송교수의 귀국 때 빚어진 사태는 종교의 자유, 양심의 자유 신장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의 무대였던 뮌스터와 수십년 만에 돌아온 고국 간에 놓여진 지리적 거리, 그리고 그보다 더한 역사적 거리를 새삼 생각케 했다.
그리고 바로 얼마 전에는 한 고등학생의 단식으로 공론화된 학교에서의 예배선택권의 문제가 새삼 우리 사회·종교의 자유의 현실에 대해 자문을 던졌다. 한국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종교천국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느 나라보다 종교의 자유가 넘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특히 시내에 즐비한 십자가를 두고 ‘예수가 재림한다면 한국이 될 것’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개신교의 성장은 놀라울 정도다. 그러나 양적 성장에 걸맞은 고민과 내실이 있는지를 이 나이 어린 고교생은 묻고 있는 것이다. 그 물음 위에는 “한국에서의 종교적 부흥은 종교에 대한 관심이 아닌, 오히려 종교적 무관심의 표현”이라는 어느 교수의 말이 겹쳐진다.
영국왕 헨리 8세의 충직한 신하였던 모어는 두 가지 문제로 왕과 충돌을 빚는다. 역사상 유명한 앤 불린(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과의 결혼을 위한 이혼 및 영국 국교회의 창설 시도였다. 모어는 왕의 이혼과 재혼을 승인하지 않고 영국 국교회의 창설도 반대한다. 왕의 회유와 협박에도 끝내 고집을 꺾지 않은 그는 런던탑에 갇히고 만다. 감옥에 찾아온 딸과 아내가 살아남기 위해 배교할 것을 간청하지만, “나는 가톨릭 신앙을 위해 죽는다”고 거절한다.
“영혼을 파는 자는 세상을 다 얻어도 덧없다”는 게 그의 단호한 유언이었다. 모어는 이 죽음으로 훗날 자신의 화려한 이력에다 ‘가톨릭 성인’의 호칭까지 덧붙이게 된다.
그러나 종교분쟁의 악순환에서 희생된 이가 모어뿐만은 아니었다. 모어와 함께 수많은 사람이 헨리 8세에 의해 목이 날아갔고, 모어의 죽음 뒤로도 영국은 100여년간 종교 유혈극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영국은 대륙의 나라들에 비해 오히려 종교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비교적 빨리 벗어난 경우다. 영화 ‘여왕 마고’는 모어가 죽은 지 몇 십년 뒤 바다 건너 프랑스에서 일어난 종교 내전의 참극을 담고 있다. 바로 1572년 신교도 수천명이 하룻밤 사이에 떼죽음을 당한 ‘성바돌로매의 대학살’을 소재로 한 영화다.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무자비하게 죽음을 당하는 영화 속 학살극의 참상은 오늘날 그 어떤 전쟁터의 모습보다 끔찍하다.
영화 속 모어와 프랑스 신교도의 죽음을 지켜보노라면 오늘날 서구에서 누리고 있는 종교의 자유가 왜 가장 본질적 자유가 될 수밖에 없는지를 알 수 있다. 다른 무엇보다 수많은 사람의 피를 통해 얻어낸 귀중한 자유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종교의 자유는 단순히 한 종교를 선택할 권리만의 문제가 아닌 자기의 내심 또는 양심을 지킬 자유와 다름없었던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이 종교의 자유, 혹은 양심의 자유가 어떻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두 가지 사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송두율 교수의 경우다. 송교수를 둘러싼 논란의 핵심에는 학자로서의 양심의 자유의 한계를 얼마나 인정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었다. 이 문제를 둘러싼 본질적인 논란은 별개로 치고 다만 공교로웠던 것은 그가 학문 활동을 했던 곳이 독일의 뮌스터였다는 점이다. 뮌스터는 중세 이후 유럽을 휩쓴 종교전쟁의 결정판인 30년 전쟁의 종전 조약인 베스트팔렌조약이 맺어진 베스트팔렌 주의 주도다. 이 조약을 통해 유럽의 종교 유혈극은 대체로 막을 내리고 종교의 자유가 국제적으로 공인된다. 송교수의 귀국 때 빚어진 사태는 종교의 자유, 양심의 자유 신장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의 무대였던 뮌스터와 수십년 만에 돌아온 고국 간에 놓여진 지리적 거리, 그리고 그보다 더한 역사적 거리를 새삼 생각케 했다.
그리고 바로 얼마 전에는 한 고등학생의 단식으로 공론화된 학교에서의 예배선택권의 문제가 새삼 우리 사회·종교의 자유의 현실에 대해 자문을 던졌다. 한국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종교천국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느 나라보다 종교의 자유가 넘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특히 시내에 즐비한 십자가를 두고 ‘예수가 재림한다면 한국이 될 것’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개신교의 성장은 놀라울 정도다. 그러나 양적 성장에 걸맞은 고민과 내실이 있는지를 이 나이 어린 고교생은 묻고 있는 것이다. 그 물음 위에는 “한국에서의 종교적 부흥은 종교에 대한 관심이 아닌, 오히려 종교적 무관심의 표현”이라는 어느 교수의 말이 겹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