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가 건설한 바르샤바 무역타워에서 바라본 바르샤바 시내 전경.
다음 목적지는 300km 남짓 거리에 있는 수도 바르샤바다. 생각보다 굴곡이 심한 구릉지대로 이어진 국도. ‘얼마간 돌아가더라도 동쪽 강줄기를 따라 바르샤바로 들어가는 지방도로를 택했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20년이나 된 체코산 중고 자전거에 무거운 짐까지 앞뒤로 실은 탓에 웬만한 구릉에도 내려서 걸어야만 했다. 걷다가 타다가의 반복이지만 단 1m도 대신해줄 사람이 없다. 한발 한발 게으름 안 피우고 전진할 뿐. 다행히 어느 정도 여행 감각이 되돌아왔고, 육체적으로도 자전거 주행에 익숙해졌다.
마수리아 지역엔 수많은 호수와 대평원 ‘장관’
없는 돈을 들여가면서까지 이 힘든 자전거 여행을 떠나오는 이유를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 편안함에서 오는 지루함이 체질에 안 맞는다. 한마디로 고생 체질인 셈이다. 육체적으로는 힘든 게 사실이다. 그러나 길 위에 서 있는 순간, 내 마음엔 한 조각 번민의 티끌도 없다. 우주를 내 마음대로 움직이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인가! 다만 내 길을 갈 뿐.
프라하를 출발한 이후 ‘브로츠와프’(폴란드 남서부 도시)에 들렀을 때 그곳 대학기숙사에서 3일을 머문 것 외엔 계속 야영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상설 야영장이 아닌 곳에서는 늘 신변 안전이 문제다. 특히 대도시 주변이 위험하다. 하지만 야영은 동시에 현지인들과 친해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의사 소통이 원활하지는 않지만, 느낌과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하기에 그만큼 정감 있는 만남이 된다. 그리고 상설 야영장에서는 많은 유럽 배낭족들을 만날 수도 있다. 특히 자전거 여행자들과 만나면 남녀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친해진다. 이 좋은 만남의 여운이 힘든 여행을 이어가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한줄기 바람이 그리운 중부 유럽 폴란드 대평원 속으로 이어진 국도. 평지 또는 대평원을 의미하는 ‘폴란드’라는 이름은, 달려도 달려도 지평선만 보이는 이 나라에 가장 적절한 국명이다. 지극한 단순, 즉 단순의 극치가 자리하는 공간에서는 번뇌 같은 거추장스러운 감정이 생겨나지 않아 좋다. 특히 육체적 감각이 한계를 넘어섰을 때의 고요함, 감정의 기복에 의해 생겨나는 기쁨이나 슬픔 같은 게 없다. 텅 빈 마음에서 오는 평온함만이 자리한다.
폴란드의 한 캠핑장에서 만난 친구들.
다음날 오전, 장비 점검과 자전거 수리로 한나절을 보내고는 오후에 바르샤바대학을 찾았다. 비가 내리는 교정엔 방학 기간이어선지 학생들이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겨울방학이 2주인 대신 여름방학이 긴 유럽 대학의 경우, 여름방학이면 학생들 대부분이 배낭여행을 떠난다.
마수리아의 작은 호숫가
들판에서 꺾은 듯한 꽃다발을 앞에 두고 빗속에서 거리 모퉁이에 앉아 손님을 기다리는 할머니들이 있는 대로를 따라 숙소로 돌아왔다. 바르샤바의 거리는 15년 전보다 더 어두워진 느낌이다. 유럽연합(EU) 가입을 위해 무리하게 서유럽 수준까지 물가를 올려놓은 상태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실업률까지 30%를 웃도는 게 지금 동유럽 나라들의 현실이다. EU 가입이라는 화려한 이벤트가 서민들 생활에 고통만 주고 있는 셈이다.
바르샤바 옛 시가지 풍경
길에서 만난 젊은 커플 덕분에 이틀 동안 편한 잠
바르샤바를 출발한 뒤 이틀째 정오, 마수리아 지역으로 향하는 53번 국도에 올랐다. 그런데 3일째 오후, 이 지역 최대의 관광지로 알려진 미코라이키(Mikolajki)를 향하던 도중에 엉뚱한 소도시로 접어들었다. 가지고 있는 지도가 오래됐고 시골마을마다 비슷비슷한 이름들이 많은데도 도로 표지판을 정확히 확인하지 않은 채 나 자신을 너무 믿은 결과다.
고교 졸업반 친구들이 열어준 '웰컴 파티'.
'과학과 문화의 궁전', 폴란드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카톨릭 성당(왼쪽부터)
졸지에 진수성찬을 곁들인 환영파티를 받고, 몇 번의 축배가 오고 간 뒤에야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알고 보니 올 9월에 대학에 진학하는 고등학교 졸업반들이다. 황당함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일주일 정도 머무르라는 것이다. 일정이 있어 그럴 순 없고 이틀 밤만 신세 좀 지겠다고 전했다. 새벽녘에야 파티가 겨우 끝나고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세상사 요지경이라지만 생각지도 않은 여러 일이 생겼다.
다음날 친구들의 안내로 주변에 있는 호수들을 둘러보고는 저녁에 한국음식을 대접했다. 결국 이날도 파티로 연결되어버렸다.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폴란드 사람들은 도저히 못 따라갈 것 같다. “킴, 하루만 더…” 하며 붙잡는 친구들에게 다음을 기약하자며 안녕을 고했다. 아름다운 호반 속에 있는, 중세의 미적 감각이 전해오는 마을 ‘미코라이키’를 거쳐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경에 다다랐다. 많은 좋은 인연들을 만날 수 있었던 폴란드는 오래도록 기억 속에 머무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