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싱글들의 쿨한 사랑법을 보여주는 드라마 ‘섹스 & 시티’
참 냉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후배들이 시간을 아끼기 바라는 자상한 마음에서 그런 말을 했을 뿐이다. 값싼 기름이 엉겨서 도저히 먹을 수 없는 통닭은 쓰레기봉투에 구겨넣어야 하는 거라고. 너희는 그래도 될 만큼 풍요롭게 자란 세대가 아니냐고.
맛없어진 사랑은 먼저 폼 나게 버리는 게 좋아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은 필터로 한 번 거른 듯, 그 선배보다는 부드러운 어조로 차가운 통닭을 버리라고 가르쳐준 영화였다. 디자이너로 일하는 신아는 우연히 만난 남자 동기와 한낮 뜨거운 정사를 벌인다. 낯선 이와의 섹스, 그 다음에야 찾아온 사랑. 이미 서로의 몸을 탐색한 두 사람은 곧바로 동거를 시작하고, 초콜릿을 몸에 발라 핥아먹거나 고속버스 안에서 아슬아슬하게 벌이는 섹스에 빠져든다. 그러나 사랑은 쉽게 상하는 것이기도 했다. 더 많이 사랑했던 신아는 유효기간이 끝난 사랑 앞에서 머뭇거리기보다 차라리 혼자 남는 쪽을 택한다. 씩씩하게 웃는 신아의 얼굴 뒤로,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은 두 사람의 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것 같았던 동기가 처량하게 비 맞으며 외로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차피 끝날 거라면, 만남보다는 이별의 방식이 중요한 게 아닐까. 한 번이라도 연애를 해본 사람이라면 영원 따위는 믿지 않게 마련이다.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은 맛없어진 사랑은 먼저 폼 나게 버리는 편이 낫다는 사실을 씁쓸하게 일깨우고 있었다.
이 영화를 만든 봉만대 감독은 인터뷰 도중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함께 사는 여자친구와 뜨거운 사랑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미지근하게 오래오래 가자고 말하고, 그녀도 그걸 받아들인다.”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에 후일담이 있다면 그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일본 격언은 ‘복수는 차가울 때 먹어야 맛있는 음식과도 같다’고 가르쳤지만, 연애는 식기 전에 잽싸게 갖다버려야 하는 음식과도 같다. 그러나 미지근하다면, 편하게 먹을 수 있다면, 굳이 상대를 바꿔가며 방황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유효기간이 지난 사랑은 버려야 한다’고 가르쳐주는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의 한 장면.
그러나 그런 남자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이 평범한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다. 그가 잠에서 깨기 전에 먼저 황급히 세수를 하지 않아도 되고, 골목길에 쪼그리고 앉아 라면을 끓여먹으면서도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한탄하지 않아도 좋은 남자. 사랑하기까지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어떤 식으로 헤어져야 하나 고민할 필요 없는 남자.
삼십대 중반을 조금 넘긴 또 다른 선배는 연애를 포기했다면서 “모르는 사람 만나서 친해지고, 몇 달 사귀다가 헤어지는 거, 피곤해서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럴 땐 이미 친한 사람과 연애를 하면 될 일이다. 그리고 왠지, 동하 같은 남자라면 결혼한 뒤 다른 남자와 연애를 하더라도 봐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21세기형 사랑 방식을 그린 영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 ‘결혼은, 미친 짓이다’ ‘싱글즈’(왼쪽부터).
귀여운 눈웃음으로 사랑받아온 엄정화는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 출연한 뒤 ‘싱글즈’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에 연이어 모습을 드러냈다. 애교 많은 여자는 막무가내이기 쉽다. 그 애교를 따라하고 싶지 않더라도, 마음대로 살고 싶은 건 보편적인 바람일 것이다.
‘싱글즈’의 동미는 그렇게 마음대로 사는 여자다. 친한 남자친구와 룸메이트로 살고 있는 동미는 사랑이나 책임에 묶이지 않는다. 묶일 줄도 모른다. 술 취한 상태에서 한 하룻밤 섹스로 아이를 갖게 되었어도, 아이 아버지에게 자기 옆에 있으면 안 된다고 못박을 줄은 안다. 그녀가 낳은 아이는 행복하지 않을까. 동미는 사랑밖엔 난 몰라라고 노래하는 여자보다는 강하고 호된 어머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때문에 사랑이 그 세상의 중심이 되어선 안 된다. 사랑에 목숨 거는 사람들은 그 사랑이 떠난 뒤 빈자리를 메워줄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매느라 수십 년에 지나지 않는 삶을 흘려보내게 될 것이다.
드라마 ‘섹스 & 시티’의 네 주인공인 캐리, 샬롯, 미란다, 사만다(왼쪽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