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팔공산을 대구의 영산이자 상징처럼 이야기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대구의 손님산(客山)일 뿐이다. 감영이 있었던 옛날 대구의 주인산(主山: 鎭山)은 연구산(連龜山)으로 현재 대구제일여중이 위치한 곳이다. 연구산이 대구의 주인산이라는 것은 조선 초기에 서거정(徐居正) 등이 펴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확인된다. “연구산은 대구의 진산이라, 돌거북을 만들어 머리는 남쪽으로 꼬리는 북쪽으로(南頭北尾) 하여 지맥을 통하게 하였다.”
연구산이 대구의 성스러운 산으로서의 기능을 하였다는 흔적은 여러 가지로 찾아볼 수 있다. 선사시대에는 지석묘가 있었으며, 비가 오지 않을 때는 기우제를 지낸 곳이며, 성황당이 있었던 곳이며, 아마도 일제시대에는 신사 터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주변에 향교, 원불교 교당 등 종교시설물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한 연구산(현재는 대구제일여중)에 사람이 만든 거북(자라)바위가 있다. 몇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누가, 언제, 왜 거북바위를 만들었을까? 그리고 거북바위의 위치가 머리는 남쪽, 꼬리는 북쪽으로 돼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곳의 거북바위는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대구의 주산인 연구산과 그 부모가 되는 산(祖山)인 대덕산과의 관계다. 대구 남쪽의 대덕산(660m)은 하나의 능선으로 이어지는 산이지만 그 이어지는 힘이 약하므로 지기(地氣)가 제대로 흐를 수 없다. 따라서 거북을 연구산과 대덕산 사이에 만들어놓아 지맥의 흐름을 강화하고자 했다. 거북의 꼬리를 북쪽으로 하여 대구를 향하게 하고 머리를 남쪽으로 하여 대덕산을 바라보게 한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이유에서다. 즉 입으로 대덕산의 지맥을 받아들여 꼬리 부분을 통해 대구에 그 지기를 내뿜어주도록 했던 것이다. 이는 거북의 꼬리 부분을 접하는 마을이 잘된다는 풍수 속설과도 일치한다. 거북은 꼬리 부분에서 알을 낳기 때문에 그 정기를 받아야만 다산과 풍요를 약속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목조 및 초가 건물이 많고 방화시설이 미비했던 옛날에는 대구에서도 화재가 빈발했다. 화재가 없게 해달라는 공동체의 염원은 하나의 상징을 만들어놓게 된다. 그럼으로써 화재에 대한 경계심과 위안을 얻고자 하는데, 그것이 바로 거북이다. 거북은 바다의 신으로 물의 신이기 때문에 강한 화기(火氣)를 제압해 준다.
실제 대구의 남쪽 대덕산은 불기운이 강한 산이다. 산의 모양이 불꽃 모양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대덕산의 많은 부분이 사납고 거대한 암반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렇다. 바위는 풍수에서는 성질상 화기로 본다. 지금은 산림이 우거져 대덕산의 속살이 잘 드러나지 않아 언뜻언뜻 화기(火氣)가 비칠 정도지만, 옛날에는 매우 강력한 화기를 보였을 것이다.
옛사람들은 대구에서 빈발하는 화재를 화기가 강한 대덕산 탓으로 돌리면서, 물의 신인 거북상을 만들어 그 머리를 대덕산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화기를 제압하도록 했을 것이다. 이 역시 진압풍수의 상징이다.
거북바위는 언제 만들어졌을까?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조차 옛날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면, 아마도 고려 혹은 신라 때 만들어졌을 것이다. 아무튼 아무리 늦춰 잡아도 1000년의 역사를 갖는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거북바위는 현재 철창에 갇혀 있다. 또한 위치도 제자리가 아니다. 사연을 살펴보니 이렇다. 대구제일여중이 운동장 한가운데에 위치한 거북바위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 했다. 그러자 주민들의 반발이 심해 타협 끝에 학교 안에 남겨두긴 하되 운동장 가장자리로 옮겨놓게 됐다. 그것도 모자라 철창으로 가둬버렸다. 1000년이 넘는 대구의 수호신이 이제는 감옥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옮기는 과정에서 거북의 위치가 동두서미(東頭西尾 : 머리는 동쪽, 꼬리는 서쪽)로 되고 말았다.
거북바위를 원래의 자리에 옮겨놓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두 가지는 바뀌어야 한다. 철창을 없애야 하고, 거북의 머리가 남쪽으로 오도록 남두북미로 위치를 바꾸어야 한다. 그래야 대구가 번창할 것이다.
연구산이 대구의 성스러운 산으로서의 기능을 하였다는 흔적은 여러 가지로 찾아볼 수 있다. 선사시대에는 지석묘가 있었으며, 비가 오지 않을 때는 기우제를 지낸 곳이며, 성황당이 있었던 곳이며, 아마도 일제시대에는 신사 터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주변에 향교, 원불교 교당 등 종교시설물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한 연구산(현재는 대구제일여중)에 사람이 만든 거북(자라)바위가 있다. 몇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누가, 언제, 왜 거북바위를 만들었을까? 그리고 거북바위의 위치가 머리는 남쪽, 꼬리는 북쪽으로 돼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곳의 거북바위는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대구의 주산인 연구산과 그 부모가 되는 산(祖山)인 대덕산과의 관계다. 대구 남쪽의 대덕산(660m)은 하나의 능선으로 이어지는 산이지만 그 이어지는 힘이 약하므로 지기(地氣)가 제대로 흐를 수 없다. 따라서 거북을 연구산과 대덕산 사이에 만들어놓아 지맥의 흐름을 강화하고자 했다. 거북의 꼬리를 북쪽으로 하여 대구를 향하게 하고 머리를 남쪽으로 하여 대덕산을 바라보게 한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이유에서다. 즉 입으로 대덕산의 지맥을 받아들여 꼬리 부분을 통해 대구에 그 지기를 내뿜어주도록 했던 것이다. 이는 거북의 꼬리 부분을 접하는 마을이 잘된다는 풍수 속설과도 일치한다. 거북은 꼬리 부분에서 알을 낳기 때문에 그 정기를 받아야만 다산과 풍요를 약속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목조 및 초가 건물이 많고 방화시설이 미비했던 옛날에는 대구에서도 화재가 빈발했다. 화재가 없게 해달라는 공동체의 염원은 하나의 상징을 만들어놓게 된다. 그럼으로써 화재에 대한 경계심과 위안을 얻고자 하는데, 그것이 바로 거북이다. 거북은 바다의 신으로 물의 신이기 때문에 강한 화기(火氣)를 제압해 준다.
실제 대구의 남쪽 대덕산은 불기운이 강한 산이다. 산의 모양이 불꽃 모양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대덕산의 많은 부분이 사납고 거대한 암반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렇다. 바위는 풍수에서는 성질상 화기로 본다. 지금은 산림이 우거져 대덕산의 속살이 잘 드러나지 않아 언뜻언뜻 화기(火氣)가 비칠 정도지만, 옛날에는 매우 강력한 화기를 보였을 것이다.
옛사람들은 대구에서 빈발하는 화재를 화기가 강한 대덕산 탓으로 돌리면서, 물의 신인 거북상을 만들어 그 머리를 대덕산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화기를 제압하도록 했을 것이다. 이 역시 진압풍수의 상징이다.
거북바위는 언제 만들어졌을까?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조차 옛날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면, 아마도 고려 혹은 신라 때 만들어졌을 것이다. 아무튼 아무리 늦춰 잡아도 1000년의 역사를 갖는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거북바위는 현재 철창에 갇혀 있다. 또한 위치도 제자리가 아니다. 사연을 살펴보니 이렇다. 대구제일여중이 운동장 한가운데에 위치한 거북바위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 했다. 그러자 주민들의 반발이 심해 타협 끝에 학교 안에 남겨두긴 하되 운동장 가장자리로 옮겨놓게 됐다. 그것도 모자라 철창으로 가둬버렸다. 1000년이 넘는 대구의 수호신이 이제는 감옥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옮기는 과정에서 거북의 위치가 동두서미(東頭西尾 : 머리는 동쪽, 꼬리는 서쪽)로 되고 말았다.
거북바위를 원래의 자리에 옮겨놓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두 가지는 바뀌어야 한다. 철창을 없애야 하고, 거북의 머리가 남쪽으로 오도록 남두북미로 위치를 바꾸어야 한다. 그래야 대구가 번창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