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추위로 진눈깨비가 날리던 3월 초엿새, 경기도 포천 관인면에 있는 김준권씨(54) 농장에 도착했다. 김씨가 직접 지었다는 4평짜리 흙집 부엌에서 가마솥이 부글거리고 방구들은 절절 끓는다. 방 벽에 경첩으로 고정되어 있는 나무판을 내려 통나무 두 개를 괴니 그대로 식탁이다. 도착 시간에 맞춰 지어놓은 잡곡밥에 막된장으로 끓여 거무튀튀한 시래기국, 김장김치와 고추장아찌 그리고 김씨가 겨우살이용으로 만들어 저장해둔 햄과 소시지가 상에 올랐다. 말할 틈도 없이 한 그릇을 싹 비우고 나서야 야들야들한 고기맛의 출처를 물었다. “돼지 등뼈 아래쪽에 갈비뼈가 감싸고 있는 부분이 바로 안심인데 양이 적은 만큼 맛이 있죠.”
김씨가 안심으로 만들었다는 햄은 인스턴트햄의 뻣뻣함이나 인위적인 쫀득거림이 없다. 살짝 구은 살코기에서 맛볼 수 있는 부드러운 육질, 적당히 배어나오는 육즙으로 훈제 특유의 향만 아니라면 도무지 저장고기 같지 않다. 돼지에서 햄과 베이컨 부위를 발라내고 남은 고기를 갈아 만든 소시지도 육즙이 풍부해 썰어서 프라이팬에 구으면 모양이 약간 흐트러진다. 김준권씨표 육가공품의 또 다른 특징은 색상. 덩어리째 훈연하는 햄의 경우 동그랗게 썬 단면 가장자리가 나이테처럼 붉은 동심원을 그린다. 연기가 침투한 흔적이다.
“시중에 유통되는 육가공품은 연기를 쏘여 붉은색을 내는 게 아니라 발색제를 넣어 인위적으로 만든 색깔이에요. 연기를 오래 쏘이면 자연히 배어드는 향과 맛도 향신료로 대신하죠. 훈연이 자연방부제인데 그것을 제대로 안 하니까 또 방부제와 산화방지제를 넣어야 합니다. 고기로만 만드는 것도 아니고 증량제로 글루텐(밀가루에서 전분을 뺀 것)을 섞죠. 고기맛을 내려니 또 화학조미료를 섞고….”
김준권씨는 육식 예찬론자가 아니다. 오히려 개인의 건강을 위해서나 세계 평화를 위해 곡채식이 육식보다 훨씬 유익하다는 채식 평화주의자에 가깝다. 그러나 채식은 선이고 육식은 악이라는 절대 채식주의자들의 이분법적 가치관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한겨울에 몸을 차게 만드는 성질의 수박과 딸기, 상추와 같은 채소만 먹는 것보다 적당히 육식을 하는 쪽이 더 자연스럽고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치아 구조는 고기를 찢고 뜯는 송곳니와 곡물을 자르고 씹는 이가 2대 8의 비율이라고 한다. 그 비율대로만 육식과 채식을 병행하면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문제는 점점 더 안전한 고기를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김씨는 농가에서 사람-음식 찌꺼기, 똥-돼지-똥-농작물-사람으로 이어지는 완전한 순환을 위해, 또 가족의 안전한 먹을거리 마련을 위해 직접 육가공을 시작했다. 봄에 젖을 막 뗀 새끼돼지를 구입해 4, 5월부터 밭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채소류와 감자, 옥수수, 고구마 등 농사 부산물을 먹여 키운다. 이런 먹이를 주면 돼지의 육질이 쫄깃해지고 맛이 좋아진다. 이렇게 6~7개월 키워 돼지를 잡는다. 한 마리당 대략 소시지 30kg, 햄 15~18kg, 베이컨 6~7kg, 갈비 두 짝을 얻을 수 있다. 나머지 돼지 머리나 발은 물론 뼈와 내장까지 한 가지도 버릴 게 없다.
“제가 만든 육가공품을 나눠주면 대체로 맛있다, 더 구할 수 없느냐는 반응을 보이는데, 직접 만들어 먹을 생각을 못해요. 사실 고기가 주식인 유럽에서 저장용 햄, 소시지를 만드는 것은 집집마다 으레 하는 일이었죠. 마치 우리가 김치 담가 먹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고기가 워낙 귀한 음식이다 보니 저장해 두고 먹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고 자연히 가공문화가 발달하지 못했죠.”
김씨는 1989년 일본에서 1년간 농촌지도자 연수를 받을 때 육가공법을 배웠다. 한국으로 돌아와 배운 것을 잊지 않으려고 혼자서 실습만 하다 귀농운동본부가 주최하는 귀농학교에 돼지 육가공 프로그램이 생기면서 그는 겨울철 농한기를 이용해 강의를 하고 있다.
귀농학교의 육가공 실습은 돼지 잡는 일에서 시작한다. 남성 수강생에게는 망치를 주어 순식간에 돼지의 정수리를 내리쳐 기절시키는 일을 맡기고, 여성에게는 칼을 주어 기절한 돼지의 목 부위 동맥을 찌르게 한다. 모두 안 하려고 쭈뼜거리지만 밥상에 앉아 다 된 밥만 먹으려 하느냐고 따끔하게 한마디 하면 엉거주춤 달려든다. 그러나 서툰 솜씨 때문에 정수리를 맞은 돼지가 도망가기 일쑤고 결국 마무리는 김준권씨 몫으로 돌아온다.
“누군가는 산 생명 잡는 일을 반드시 해야 하고, 또 어느 짐승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 밥상에 오르는 것이 자연의 순리다. 생존을 위해 다른 존재를 잡아먹고, 죽어서 다른 존재의 피와 살이 되는 먹이의 순환은 그대로 자연의 이법일 터, 어찌 인간이라고 여기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김준권)
돼지가 완전히 숨을 거두면 털을 벗겨내고 몸통 구석구석을 닦은 다음 해체작업에 들어간다.
돼지 머리와 발목을 자르고 배를 가른다. 먼저 안심을 확보하고 햄에 쓸 엉덩이와 뒷다리 고기를 분리하고, 갈비를 감싼 부위 즉 삼겹살을 떼낸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삼겹살은 그냥 구워도 맛있는데 훈제까지 하면 얼마나 맛있겠느냐는 설명에 군침이 돈다. 김씨는 훈제한 돼지갈비 맛을 본 사람은 절대 소갈비를 찾지 않는다고 했다. 부스러기 고기와 비계는 분쇄기로 갈아 소시지 만드는 데 쓴다.
“몇 집이 어울려 돼지 한 마리 잡으면 한 계절 동안 먹을거리가 생기죠. 주택에서도 배관만 잘하면 작은 훈연통을 만들어 육가공을 할 수 있습니다. 대신 고기는 정육점에 부탁해 얼리지 않은 것을 사다가 만들어야 합니다. 돼지 외에도 닭이나 오리, 연어와 같은 생선, 오징어(물오징어보다 냉동한 것)를 훈제해 일상적인 먹을거리를 직접 준비해 보세요.”
지난해 말 한 방송사가 주도한 ‘채식주의’ 열풍이 다소 진정되자 사람들은 진짜 ‘잘 먹고 잘 사는 법’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김준권씨 말대로라면 가장 안전하고 맛있는 음식은 내가 사는 땅에서 난 것으로 어머니나 아내가 요리해 준 것, 가족의 먹을거리를 직접 장만한 것이다. 내 손으로 만드는 햄, 소시지, 베이컨은 그 시작일 뿐이다.
김씨가 안심으로 만들었다는 햄은 인스턴트햄의 뻣뻣함이나 인위적인 쫀득거림이 없다. 살짝 구은 살코기에서 맛볼 수 있는 부드러운 육질, 적당히 배어나오는 육즙으로 훈제 특유의 향만 아니라면 도무지 저장고기 같지 않다. 돼지에서 햄과 베이컨 부위를 발라내고 남은 고기를 갈아 만든 소시지도 육즙이 풍부해 썰어서 프라이팬에 구으면 모양이 약간 흐트러진다. 김준권씨표 육가공품의 또 다른 특징은 색상. 덩어리째 훈연하는 햄의 경우 동그랗게 썬 단면 가장자리가 나이테처럼 붉은 동심원을 그린다. 연기가 침투한 흔적이다.
“시중에 유통되는 육가공품은 연기를 쏘여 붉은색을 내는 게 아니라 발색제를 넣어 인위적으로 만든 색깔이에요. 연기를 오래 쏘이면 자연히 배어드는 향과 맛도 향신료로 대신하죠. 훈연이 자연방부제인데 그것을 제대로 안 하니까 또 방부제와 산화방지제를 넣어야 합니다. 고기로만 만드는 것도 아니고 증량제로 글루텐(밀가루에서 전분을 뺀 것)을 섞죠. 고기맛을 내려니 또 화학조미료를 섞고….”
김준권씨는 육식 예찬론자가 아니다. 오히려 개인의 건강을 위해서나 세계 평화를 위해 곡채식이 육식보다 훨씬 유익하다는 채식 평화주의자에 가깝다. 그러나 채식은 선이고 육식은 악이라는 절대 채식주의자들의 이분법적 가치관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한겨울에 몸을 차게 만드는 성질의 수박과 딸기, 상추와 같은 채소만 먹는 것보다 적당히 육식을 하는 쪽이 더 자연스럽고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치아 구조는 고기를 찢고 뜯는 송곳니와 곡물을 자르고 씹는 이가 2대 8의 비율이라고 한다. 그 비율대로만 육식과 채식을 병행하면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문제는 점점 더 안전한 고기를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김씨는 농가에서 사람-음식 찌꺼기, 똥-돼지-똥-농작물-사람으로 이어지는 완전한 순환을 위해, 또 가족의 안전한 먹을거리 마련을 위해 직접 육가공을 시작했다. 봄에 젖을 막 뗀 새끼돼지를 구입해 4, 5월부터 밭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채소류와 감자, 옥수수, 고구마 등 농사 부산물을 먹여 키운다. 이런 먹이를 주면 돼지의 육질이 쫄깃해지고 맛이 좋아진다. 이렇게 6~7개월 키워 돼지를 잡는다. 한 마리당 대략 소시지 30kg, 햄 15~18kg, 베이컨 6~7kg, 갈비 두 짝을 얻을 수 있다. 나머지 돼지 머리나 발은 물론 뼈와 내장까지 한 가지도 버릴 게 없다.
“제가 만든 육가공품을 나눠주면 대체로 맛있다, 더 구할 수 없느냐는 반응을 보이는데, 직접 만들어 먹을 생각을 못해요. 사실 고기가 주식인 유럽에서 저장용 햄, 소시지를 만드는 것은 집집마다 으레 하는 일이었죠. 마치 우리가 김치 담가 먹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고기가 워낙 귀한 음식이다 보니 저장해 두고 먹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고 자연히 가공문화가 발달하지 못했죠.”
김씨는 1989년 일본에서 1년간 농촌지도자 연수를 받을 때 육가공법을 배웠다. 한국으로 돌아와 배운 것을 잊지 않으려고 혼자서 실습만 하다 귀농운동본부가 주최하는 귀농학교에 돼지 육가공 프로그램이 생기면서 그는 겨울철 농한기를 이용해 강의를 하고 있다.
귀농학교의 육가공 실습은 돼지 잡는 일에서 시작한다. 남성 수강생에게는 망치를 주어 순식간에 돼지의 정수리를 내리쳐 기절시키는 일을 맡기고, 여성에게는 칼을 주어 기절한 돼지의 목 부위 동맥을 찌르게 한다. 모두 안 하려고 쭈뼜거리지만 밥상에 앉아 다 된 밥만 먹으려 하느냐고 따끔하게 한마디 하면 엉거주춤 달려든다. 그러나 서툰 솜씨 때문에 정수리를 맞은 돼지가 도망가기 일쑤고 결국 마무리는 김준권씨 몫으로 돌아온다.
“누군가는 산 생명 잡는 일을 반드시 해야 하고, 또 어느 짐승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 밥상에 오르는 것이 자연의 순리다. 생존을 위해 다른 존재를 잡아먹고, 죽어서 다른 존재의 피와 살이 되는 먹이의 순환은 그대로 자연의 이법일 터, 어찌 인간이라고 여기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김준권)
돼지가 완전히 숨을 거두면 털을 벗겨내고 몸통 구석구석을 닦은 다음 해체작업에 들어간다.
돼지 머리와 발목을 자르고 배를 가른다. 먼저 안심을 확보하고 햄에 쓸 엉덩이와 뒷다리 고기를 분리하고, 갈비를 감싼 부위 즉 삼겹살을 떼낸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삼겹살은 그냥 구워도 맛있는데 훈제까지 하면 얼마나 맛있겠느냐는 설명에 군침이 돈다. 김씨는 훈제한 돼지갈비 맛을 본 사람은 절대 소갈비를 찾지 않는다고 했다. 부스러기 고기와 비계는 분쇄기로 갈아 소시지 만드는 데 쓴다.
“몇 집이 어울려 돼지 한 마리 잡으면 한 계절 동안 먹을거리가 생기죠. 주택에서도 배관만 잘하면 작은 훈연통을 만들어 육가공을 할 수 있습니다. 대신 고기는 정육점에 부탁해 얼리지 않은 것을 사다가 만들어야 합니다. 돼지 외에도 닭이나 오리, 연어와 같은 생선, 오징어(물오징어보다 냉동한 것)를 훈제해 일상적인 먹을거리를 직접 준비해 보세요.”
지난해 말 한 방송사가 주도한 ‘채식주의’ 열풍이 다소 진정되자 사람들은 진짜 ‘잘 먹고 잘 사는 법’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김준권씨 말대로라면 가장 안전하고 맛있는 음식은 내가 사는 땅에서 난 것으로 어머니나 아내가 요리해 준 것, 가족의 먹을거리를 직접 장만한 것이다. 내 손으로 만드는 햄, 소시지, 베이컨은 그 시작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