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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맞춤여행|경남 산청

600년 고목 아래 있노라면 선비들의 文香에 취할 듯

  • 글·사진=양영훈 한국여행작가협회 회장 blog.naver.com/travelmaker

600년 고목 아래 있노라면 선비들의 文香에 취할 듯

600년 고목 아래 있노라면 선비들의 文香에 취할 듯

낮은 돌담 위로 백목련이 만발한 남사마을의 봄 풍경.

잔뜩 부풀어오른 춘흥(春興)이 어느덧 동장군을 물리쳐버린 듯하다. 간간이 불어오는 꽃샘바람의 시샘 속에서도 봄기운은 무르익게 마련이다. 이미 남녘은 매화, 산수유가 절정이다. 그런 꽃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괜스레 마음이 조급해진다. 화사한 봄날은 생각보다 훨씬 짧기 때문이다. 그래서 꽃구경은 때를 잘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아주 짧은 특정 시기를 놓치면 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한다.

이맘때쯤 꽃구경으로는 매화가 으뜸이다. 매화는 무엇보다 향기가 매혹적이다. 인공의 어떤 향료도 매향(梅香)만큼 기품 있고 그윽하고 깊이 있는 것은 없다. 매화의 향기는 예로부터 ‘귀로 듣는 향기’라 했다. 어디선가 떨어지는 바늘 소리도 들을 수 있을 만큼 마음이 고요해야만 비로소 그 향기를 온전히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오늘날 연륜 깊은 산사와 고택치고 오래된 매화나무 한두 그루 없는 데가 드문 것도 바로 그런 연유에서다.

지리산 자락에 들어앉은 경남 산청군 단성면 운리에는 고즈넉한 절터가 남아 있다. 신라 경덕왕 때 창건됐다가 정유재란 당시 불타버렸다는 단속사 옛터다. 폐허만 남은 절터에는 두 개의 삼층석탑(보물 제72호, 73호)과 당간지주만 쓸쓸히 서 있다. 그런데도 황량함보다는 오히려 푸근함이 느껴진다. 지리산의 너른 품이 절터를 아늑하게 감싼 데다, 불국사의 석가탑처럼 단아한 멋과 안정감이 돋보이는 두 기의 삼층석탑이 절터를 지키고 서 있기 때문이다.

단속사터에는 수령 600년의 ‘정당매’가 있다. 단성면 남사마을의 원정매(元正梅), 시천면 산천재의 남명매(南冥梅)와 함께 ‘산청삼매’로 꼽히는 매화나무 고목이다. 고려 말 단속사에서 공부하던 강회백(姜淮伯)이 심었다고 한다. 훗날 그의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자 ‘정당매’라 이름이 붙여졌다. 지금도 정당매는 해마다 3월 중순이면 고결하고도 은은한 향기를 절터 가득 흩뿌린다.

원정매가 있는 남사마을은 단속사 초입의 20번 국도변에 자리한 전통마을이다. ‘남사예담촌’으로도 불리는 이 마을에는 주로 밀양 박씨, 성주 이씨, 진양 하씨 등이 조상 대대로 살아온 기와집들이 즐비하다. 언뜻 보면 수백 년 묵은 전통 양반고택으로 보이지만, 실은 20세기 초에 부와 권세를 과시하기 위해 지어진 부농주택들이라고 한다. 그래도 마을 안을 찬찬히 둘러보면 투박한 돌담길이 정겹게 이어지고 돌담 위로 매화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다.



고려 말 강회백이 심었다는 ‘정당매’ 유명 … 조식과 관련한 유적 많아

원정매를 비롯해 최씨매, 이씨매 등 남사마을의 오래된 매화나무들은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에 낙향한 선비들이 심었다. 그중 진양 하씨가 사는 분양고가의 ‘원정매’는 원정공 하집(元正公 河輯, 1303~1380)이 생전에 심었다고 한다. 수령이 600년을 훨씬 넘은 원정매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매화나무의 하나로 꼽힌다. 이 나무는 근래까지도 고매(古梅) 특유의 기품과 위엄을 갖추고 가지마다 탐스런 꽃봉오리를 가득 피어올리곤 했었다. 그런데 몇 해 전 주인 영감님이 세상을 뜨고 안주인마저 대처로 떠난 뒤로는 원정매도 갑자기 노쇠해졌다. 지금은 역동적으로 구부러진 가지만 고목이 된 채 남아 있고, 붉은 겹꽃으로 탐스럽게 피어나던 원정매의 자태는 다시 보기 어려워졌다.

남사마을을 뒤로하고 지리산 쪽으로 40여 리 더 들어가면 산청군 시천면 소재지인 사리가 나온다. 옛날에 ‘덕산’이라 불리던 이 마을은 지리산 동부지역의 교통 요충지이자 물산의 집결지였다. 또한 조선시대 퇴계 이황에 견줄 만큼의 대학자였던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의 은거지로도 유명하다. 지금도 시천면 사리와 그 이웃의 원리에는 산천재, 덕천서원, 남명묘소, 세심정 등 남명의 유적이 여럿 남아 있다.

그중 덕천강변에 자리한 남명의 처소 산천재를 이맘때 찾아가면, 어디선가 흘러나온 매향이 온몸을 휘감는 듯하다. 산청삼매의 하나인 ‘남명매’가 흘리는 향기다. 산천재 마당에 있는 이 매화 노목은 남명이 직접 심었다고 전해진다.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처사로 살았던 남명의 지조를 닮아서인지 남명매의 꽃향기도 유달리 청신하고 고아(高雅)하다.

시천면 소재지의 덕산삼거리에서 지리산 천왕봉 아래의 중산리까지는 14km쯤 된다. 덕천강 물길과 나란히 달리는 20번 국도를 따라가노라면, 길 굽이를 돌아설 적마다 지리산 천왕봉이 명멸(明滅)을 거듭한다. 바람결에 일렁이는 대숲 위로 불끈 치솟은 천왕봉은 한달음이면 닿을 듯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해발 1915m의 천왕봉은 가장 가까운 출발점인 중산리에서도 꼬박 4시간 넘게 걸어야 올라설 수 있다. 그래서 그 정상을 향해 선뜻 발길을 내딛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지리산은 먼발치서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 좋고 마음 든든한, 민족의 영산(靈山)이자 명산(名山)이다.

추천 일정



당일 07:00 경부고속도로 서울톨게이트 진입 → 09:40 통영대전고속도로 단성IC(서울톨게이트에서 285km) 통과 → 09:40~10:00 단성IC(20번 국도, 지리산 방면)~문익점 목화시배지~남사삼거리(우회전, 1001번 지방도)를 거쳐 단속사터에 도착 → 10:00~11:00 단속사터의 유물과 정당매를 구경한 뒤 남사마을로 이동 → 11:00~13:30 남사마을 답사 후 점심식사(녹차수제비) → 13:30~15:30 남사마을~남사삼거리(직진)~창촌삼거리(직진) 등을 경유해 산천재 도착 후 남명 유적 답사 → 15:30~17:30 산천재~덕산삼거리(직진)~중산리 코스에서 드라이브를 즐긴 뒤 다시 나와 덕산삼거리(좌회전, 59번 국도)~내원사 입구~대원사 입구~밤머리재~산청IC 입구 삼거리 등을 경유해 통영대전고속도로 산청IC 진입

※ 1박2일 일정으로 느긋하게 여행할 경우에는 청학동과 삼성궁을 둘러볼 만하다. 중산리 직전의 내대리에서 1047번 지방도를 이용해 삼신봉터널을 지나면 금세 청학동과 삼성궁에 도착한다. 여유가 있다면 지리산 동쪽 자락인 삼장면 대포리의 내원사와 유평리의 대원사도 꼭 들러볼 만한 고찰이다.


여행 정보



600년 고목 아래 있노라면 선비들의 文香에 취할 듯

남사예담촌전통찻집의 녹차수제비와 파전.

숙박 남사마을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전통가옥인 황토집(016-9620-7411)을 비롯해 몇 곳의 민박집이 있다. 산천재가 자리한 산청군 시천면 일대에는 뷰캐슬펜션(055-973-2250), 작은풍경펜션(055-974-0074), 삼청호수펜션(055-973-4866) 등의 여러 펜션이 있다.

맛집 산청 남사마을에 자리한 남사예담촌전통찻집(011-9314-0422)에서는 전통차뿐 아니라 떡국, 녹차수제비, 파전 등을 맛깔스럽게 내놓는다. 그리고 지리산을 자주 찾는 산꾼들 사이에 시천면 사리의 팔도한우촌(055-973-0092)은 한우구이와 갈비탕, 시천면 중산리의 지리산산꾼의집(055-972-1212)은 산채비빔밥을 잘하기로 소문난 집이다. 그 밖에 산청읍내의 춘산식당(055-973-2804)은 산청에서 가장 내력 깊고 손맛 좋은 한정식집으로 손꼽힌다.




주간동아 2008.04.01 629호 (p88~89)

글·사진=양영훈 한국여행작가협회 회장 blog.naver.com/travel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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